▲ 청매실 농원 홍쌍리 선생은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을 펴낸 후쿠오카 마사노부를 찾아 '흙이 밥이고 매실이 뱃속 청소기'라는 걸 깨우친 뒤 3만평에 60종이 넘는 먹을거리를 심었다

대중 대통령 시절의 일이다. 광양시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청매실농원에 가실 테니 헬기 앉을 자리를 만들라고 했다. 홍쌍리 선생(70)은 전시관 앞 비탈에 흙과 돌을 트럭 3700대 분을 부어 메웠다. 지금 장독대 자리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까 법정 스님이 오셨다. 스님은 “잘 했다. 이제 턱이 있어 됐다”며 “돈 많이 들었지? 빚 많이 졌지? 그래도 앞으로 괜찮을 것이다”고 했다.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느냐는 선생 말에 “그땐 보살이 빚에 깔려 죽을 판인데 그 소리를 어찌하겠나”고 말씀했다. 그때 전시장 올라가는 왼쪽 축대도 새로 쌓았다. 스님은 축대 위에다 항아리를 한 줄로 나란히 놓으라고 일렀다. “그 뒤에 웬 스님이 한 분 오셔서 누가 저렇게 항아리를 일자로 놓으라고 했느냐고 물어요. ‘법정 스님이요.’ 그랬더니 무릎을 치는 기라. 햇빛나면 항아리가 얼마나 번쩍거립니까? 그 스님이 용비늘이 번쩍거린다고 하더군요.”

암컷 학이 부화하려고
알을 품고 앉았는데
수컷이 섬진강 먹이를 끝없이 물어다 준다

법정 스님은 섬진강 건너 산을 가리키면서 저 앞산을 봐라. 수놈 학이고 이 뒷산은 암놈 학이다. 암컷이 부화하려고 알을 품고 앉았는데 수컷이 섬진강 먹이를 끝없이 물어다 준다. 그러니 이곳에 집을 2층보다 더 올리지는 마라. 3층 높이로 지어버리면 알이 부화가 되지 않고 썩는다고 말씀했다. “평생 잊히지 않는 기라예.”

장독대 아래 집을 짓는데 집 골조가 장독대보다 더 올라왔다. 마침 그때 법정 스님이 오셨다. 차를 대어 놓고는 건물 골조가 솟아 있는 걸 보시더니 두 말도 하지 않고 도로 차에 오르셨다. 느닷없는 스님 모습에 당황한 선생이 쫓아가서 차 문고리를 잡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스님! 와예? 하니까. 내리시더니 아따, 눈에 불이 번쩍이시면서 ‘저 건물 누가 지으랬어!’ 아이고, 너무너무 화를 내세요. ‘생각 해 봐라. 코앞에 키 큰 사람이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러지 않았나, 지어도 2층이 넘게는 짓지 말라고. 어쩌자고 저렇게 큰 건물을…’ 스님이 말을 잇지 못하셔예. 그걸 뜯어내는데 5000만원도 더 들었어요. 그나마 지붕도 안 덮고 뼈대만 세워놨을 때니까 망정이지. 뒤에 오셔서 ‘이제 됐다’ 그러시더라고. 스님은 좋은 말씀을 하셔도 부드러운 인상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화가 나시니까 무섭데예.”

임권택 감독이 100번 째 영화, <천년학>을 청매실농원에서 찍으려고 하니 초가집을 하나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초가집을 하나 지으려고 하는데 스님 좀 봐주시지요? 말씀드렸더니 온 산을 두루 둘러보시고는 ‘보살, 여기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 입을 벌리고 있네. 이게 용목이고, 여기가 용배고, 용꼬리니까 이곳에 집을 앉히면 누가 와서 하룻밤 자더라도 몸과 마음이 편할 것이다’고 하셔서 그대로 집을 앉혔지요.” 

농사를 짓든 먹든 거꾸로 가라.
땅 살리고 풀 살리고 사람 살리는,
밥상을 약상으로 만들어야

“친정아버지가 나를 국문학과를 보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하다가도 내를 공부시키지 않아서 다행이다. 공부를 시켰더라면 흙을 일구는 농사꾼이 되지 못했을 테고, ‘밥상이 약상’이라는 걸 몰랐을 텐데요.” 농사는 작품이지 돈이 아니라며, 농부라서 행복하다는 홍쌍리 선생(70). 한 해 김장을 배추 5000포기나 담는다. “우리는 1500포기쯤 먹고 나머지는 장애자들, 엄마아버지 없는 아이들, 자식 없는 노인네들과 나누지요. 김장할 때보다 배추 가꿀 때가 더 힘들어요. 배추 포기 안은 파란 벌갱이가 먹고 바깥은 달팽이가 먹어요.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팽이한테 ‘달팽아 맛있나? 니도 먹고 나도 먹자. 니가 조금만 먹는다면 잡지 않을 게. 나는 식구가 많으니까. 이 어미 힘이 들어’ 그러지요. 나눠먹어야지요. 벌갱이가 먹지 않으면 사람도 먹어선 안 돼요.” 가꾼다는 말은 본디 몸을 매만지거나 꾸민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채소나 곡식도 가꾼다. 땅을 걸구는 데부터 정성을 쏟아 마치 아이를 쓰다듬고 어르듯 한다. 개화기 기독교 선교사 게일은 우리 밭농사를 가리켜 ‘농사가 아니라 원예園藝’라고 했다.

“요새 웰빙이니 친환경농법이니 그런 말을 많이 하는데, 옛날 우리조상님들이 짓던 농사나 음식이 가장 좋아요. 길은 새로 난 고속도로가 좋지만, 농사를 짓든 먹든 거꾸로 가라. 먹던 대로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전쟁에서 2등하면 나라가 없는데, 농사라도 왜 2등을 할 것이냐! 그러니까 땅 살리고 풀 살리고 사람 살리는, ‘밥상을 약상’으로 만들 것인가, 땅 죽이고 풀 죽이고 사람 죽이는, 환자 상을 만들 것인가. 많이 아프다보니까 그게 화두였어요.” 선생은 29살 때 자궁내막염으로 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 또, 류머티즘으로 밥을 떠먹지 못하고 머리도 감지 못했고 목욕도 할 수 없었다. 팔과 다리 허리를 구부릴 수 없어서. 견디다 못해 자연농법 효시로 <짚 한오라기의 혁명>를 펴낸 후쿠오카 마사노부를 찾아가 ‘흙이 밥이고 매실이 뱃속 청소기’란 걸 깨우쳤다. 온전히 우리조상님들이 짓는 농사법대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선생은, 3만 평에 예순 종이 넘는 야생화를 모두 먹을거리로만 심었다. 산에서 일하다 내려오면서 이것저것 뜯어 그냥 나물도 해먹고, 데쳐도 먹고, 겉절이도 해먹고, 매실된장에 쌈도 싸먹곤 했다.

▲ 생전의 법정 스님은 홍쌍리 선생으로 하여금 지금의 청매실농원을 이루기까지 많은 조언을 했다. 스님은 홍쌍리 선생을 "내가 한마디하면 둘, 셋을 하는 보살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류머티즘은 낫지 않는다고들 해요. 그런데 쑥뜸하고 매실 농축액으로 싹 나았어요. 맵고ㆍ짜고ㆍ시고ㆍ떫고ㆍ쓴 오미오색이 다 담긴, 산에 난 풀이란 풀이파리들을 다 뜯어다가 채로 쓸고, 10가지가 넘는 곡식 가루 세 숟가락, 매실원액 세 숟가락을 10년 묵은 간장으로 간을 하고 참깨는 볶아서 빻은 걸 뿌려서 김에다 싸먹었어요. 국을 먹어야할 때는 다시마, 무, 표고버섯, 두부나 콩나물을 넣고 된장에 멸치는 넣지 않고 끓여 먹었어요. 쑥뜸을 뜰 때 멸치를 먹고 뜨니까 가려워서 끊임없이 긁어대니 피도 나고 못 견디겠더군요. 그때 멸치도 단백질이 많다는 걸 알았어요. 가장 좋은 게 미역이에요. 미역은 10년 묵은 간장에 참기름 조금 넣고 자글자글 볶아놓으면 기름이 안 뜨고 뽀얗게 돼요.” 석 달 열흘씩, 세 해 동안 다섯 번 단식을 하고 나니 73kg이 나가던 몸무게가 53kg이 되었다. 그전엔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사람 얼굴이 둘 셋으로 겹쳐 어른어른해서 잘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 뒤로 칠순을 앞둔 이제까지 안경 쓰지 않고도 저녁에 신문도 잘 본다.

홍쌍리는 한 마디 하면
둘, 셋을 이루는 보살이다

스님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강원도로 제주도로 반찬을 해서 보내고, 허파에 좋다고 하는 것은 무조건 다 해서 보내드렸다. “폐에 좋다는 뿌리, 잎, 꽃잎, 열매를 두루 고아 조청을 만들고 반찬은 일고여덟 가지를 했어요. 폐에 수수가 좋거든요. 그래서 수수조청도 만들어서 함께 보냈어요. 그걸 받으시고는 하루는 스님이 전화를 하셨어요. 날이 따뜻해지면 초가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불일암으로 가마. 누가 이렇게 늘 정성스레 만든 반찬을 꾸준히 보내겠나. 보살 편지를 받아들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하시며 고맙다고.”

법정 스님은 치료를 받으러 미국 병원에 다녀오시고 나서, 선생에게 길상사에 한번 다녀가라고 했다. “딸내미하고 같이 갔는데, 행지실 문을 여니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어앉아서 들어갈 틈도 없더라고요. 열고 들어가니까. 스님이 그 먼데서 왔네. 그러시면서 사람들 뒤로 돌아가려고 하니까. 자꾸 가운데로 오라케요. 옆에 가서 앉으니까 스님이 차를 따라 주면서 ‘보살, 이 떡 맛있어’ 그러시곤 내 손을 덥석 쥐고 치켜드는 거라. 그 많은 이들 앞에서. 이 보살님 손 한번 보라고. ‘내가 한 마디 하면 둘, 셋을 하는 보살님이다 내가 뭐라고도 많이 했지만, 그 말을 믿고 이제까지 신통하게 잘 해왔다. 다른데 가서 똑같이 시켜도 잘 따르지 않더라. 이 손 좀 보라’고. ‘여기 앉아 있는 분들이 한 번 씩 다 가봐라. 어찌 해놓고 사는지를.’ 민망해서 혼났어요. 너무 사람들 앞에서 내세우니까. 사람들이 모두 어떤 부모가 저렇게 말해주겠느냐고 그러더군요. 비행기 시간이 다되어서 가겠다고 일어나니까. 스님이 사리 문밖까지 나오셔서 조심히 가라면서 손을 꼬옥 잡으셨어요.”

그런 선생도 스님 말씀대로 하지 못한 게 있다고 아쉬워한다. 스님이 오시면 늘 앉아 섬진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곳이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은 여기에 자그마한 암자를 하나 지어서 기도를 하면 보살님 몸과 마음이 편안할 것이라고 말씀했다. “내가 ‘너무 좁아서요.’ 그러니까 ‘혼자 들어가서 기도할 건데 좁으면 어떤데.’ 그러셨어요. 벌써 한 20년 됐어요. 터만 다듬어 놓은 채로 아직 그대 있어요.”

법정 스님은
병풍 같은 산에 매화나무를 심어
꽃천지를 만들라고 했고
홍쌍리 선생은 그 꿈을 실현했다

2008년 제주도로 요양을 가시기 전, 법정 스님은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느닷없이 광양시장을 모셔 놓으라고 했다. 스님은 시장보다 한 시간 앞에 오셔서 산을 다 둘러보고는 곱게 핀 꽃을 보면서, 매화나무 몇 그루를 길상사로 옮겨 심어달라고 했다. 농원을 한 바퀴 쭉 둘러본 스님은 예전과는 달리 숨이 가빠하셨다. “그때는 왜 나는 멍청이 같이 힘들어서 그러시는 걸 몰랐을까요.” 스님은 20년씩 넘은 동백이 있는 동백산에 좀 가보자고 했다. 그곳에서도 당신 마음에 드는 동백나무를 골라 끈으로 묶고는 길상사에 심어달라고 했다. 선생은 스님 뜻에 따라 동백나무 다섯 그루, 매화나무 다섯 그루를 길상사에 옮겨 심었다.
“스님은 하얀 땅콩죽에 백김치를 좋아하셨어요. 하얀 땅콩죽에 하얀 김치를 놓고 스님이 하얀 티셔츠를 입고 드시면 마치 외로운 학 한 마리가 앉아서 밥을 먹는 모습이에요.” 밥을 드시고 난 법정 스님은 “보살님이 그동안 고생을 너무했으니 시장님이 많이 도와주세요”하고 광양시장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너무 놀랐어요. 그런 말씀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코미디언 백남봉 씨는 “청매실농원아, 번개춤 춰라! 하동이 돈 벌꾸마?” 그랬단다. 3월 매화 축제를 하게 되면 청매실농원에 와서 꽃을 보고 즐기지만, 먹고 자는 일은 하동에서 다 한다는 얘기를 빗대서 한 말이다. 하동뿐 아니라 청매실농원이 있는 다압면은 물론이고, 머지않은 구례까지 매화 덕을 톡톡히 본다. “다른 축제는 10일이나 길어야 14일쯤 하는데 여기는 30일이거든요. 꽃이 낮은데서 피기 시작해서 꼭대기로 올라가면서 피니까요. 하동 사람들 한 해 소득이 매화꽃 축제 때가 으뜸이라니까, 자고 일어나면 청매실농원 쪽으로 절 한 자리하고 아침밥을 짓는 사람들도 있대요. 우리 다압면 사람들은 온갖 잡곡이나 말려놓은 채소들을 우리 집 앞에 와서 다 팔아요. 논 천 평 농사짓는 것보다 여기 와서 한 달 파는 소득이 더 많다고 해요. 다 같이 살아야 하니까, 다른 곳에서 온 잡상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경호원들을 삼교대를 시켜요. 잡상인이 밤중에 들어올지 새벽에 들어올지 모르니까.”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청매실농원은 농원이 아니라 공원이라고. 법정 스님은 병풍 같은 산에 매화나무를 심어 마을 사람들은 살림이 넉넉해지고, 메마른 도시 사람들에게 안식을 찾게 하는 ‘꽃천지 마스터플랜’을 세우시고 홍쌍리 선생은 그 꿈을 실현했다.

스님! 하필이면 이 봄날에 가셨습니까? 매화가 피는. 매화꽃이 스님을 뵙고 싶어 어찌 살라고. 봄이 오면 매화꽃이 스님을 얼마나 기다리는데예. … 하얀 매화꽃 저고리, 스님이 앉아 계시던 파란 보리치마… 지금도 보릿잎이 스님 온기를 기다리고 있네요. …스님, 부디 저 세상에서는 아프지 마시고 건강히 글 많이 쓰십시오.                                               아름다운 농사꾼이 올립니다.

엄마 품처럼 푸근히 보듬어 주는 고향 같은 농민이고 싶다는 홍쌍리 선생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도종환 시인이 쓴 ‘꽃잎 인연’이 떠올랐다. 법정 스님과 홍쌍리 선생, 두 어른이 일군 천국을 누리는 모든 이들이 꽃잎 인연이기에.

몸끝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
가지 끝에 모여와 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도
때가 되면 비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글: 법정 스님 자취를 더듬는 변택주
사진: 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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