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식 前 국가대표 야구감독 동국대 '프라이드 동국 지성콘서트' 특강

김인식 前 국가대표 야구감독이 12월 6일 동국대 중강당에서 열린 ‘프라이드 동국 지성콘서트’에 강사로 나서 ‘믿음과 소통의 리더십’을 주제로 강연했다. 김인식 감독은 “1982~1985년 동국대 야구감독으로도 활동한 이후, 동국대를 다시 방문하니 감회가 남다르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김 감독은 선수시절부터 야구감독까지 50년 간의 야구인생과 야구스타들과 얽힌 에피소드 등을 이야기했다.    
 
감독이던 내 섣부른 판단때문에

20여 스템, 모두 일자리 잃게 돼

리더는 항상 동료 살피는 결단을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선수생활을 거쳐 코치, 감독을 역임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동국대 감독시절 입니다. 저는 1982~1985년까지 동국대 감독으로 활동했습니다. 4년 동안 동국대 감독으로 있으면서 30여 졸업생을 배출시켰습니다. 이 시절을 내가 특별이 좋게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제자들이 모두 좋은 팀으로 영입됐고, 선수로서의 좋은 활동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1982년 감독 부임 당시, 첫 봄 춘계대학야구연맹전을 치렀습니다. 운이 좋게 동국대가 준우승에 올랐지만 결승에서 고려대에 안타깝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어 치러진 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동국대는 인하대에게 우승을 넘겨줘야 했습니다. 

한해에 두 번이나 큰 대회가 있었지만, 우승의 기회를 모두 놓치고 말았습니다. 당시 나는 득점에 너무 목매여 있었습니다. 결승까지 진출했는데 우승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한 점이라도 더 따기 위해 시합에 집착했습니다.

그때 저는 감독이 점수에만 매달리다 보면 선수들이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최고가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감독으로서 선수들에게 조급함을 보였던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당시 동국대에는 4번 타자였던 한대화(現 한화이글스 감독) 선수와 장호원이 간판 선수였습니다. 비록 아쉽게 우승은 놓쳤지만, 이 친구들의 활약 덕분에 동국대 야구가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1983년 춘계대학야구연맹전에서는 동국대가 27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2년 마다 한 번씩 일본 관서지방에서 대학야구선발대회가 치러졌습니다. 춘계대학야구연맹전에서 우승한 팀은 일본에서 원정경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당시 대한야구협회에서는 동국대 선수들 외에도 타학교 선수들을 선발해 함께 원정에 보내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다행히 동국대는 첫 일본원정경기에서 좋은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 이후 협회에서는 단일팀만 일본원정경기에 출전키로 결정했습니다.

 1984년 송진우 선수가 동국대에 입학했습니다. 고교시절 무리한 투구를 해서 어깨가 좋지 않았지만, 다행히 송 선수의 활약으로 1984년도에도 춘계야구연맹전에서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이후 1985년에 윤재호·박중태 선수 등이 들어오면서 동국대는 또 한 번 일본원정경기를 떠났고, 그 때 일본에서 우승을 하게 됐습니다.

좋은 결과 아니어도 좋은 평가는 있다
1985년도에 동국대를 떠나면서 나는 해태타이거스 수석 코치를 맡게 됐습니다. 당시 해태타이거스에는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투수에는 선동렬·강만식·이상용 등이 있었고, 공격에는 김성환·김봉연·김준하·한대화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덕분에 덤은 1986~1989년까지 우승을 했습니다.

이후 나는 1990년 쌍방울레이더스 창단감독을 맡으면서 프로야구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쌍방울레이더스는 처음 1년 동안은 2군에서 트레이너만 했고,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으로 나가 시합을 뛰기 시작했습니다.

쌍방울레이더스가 창단되면서 김기태·조규제 선수를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1991년에 김기태 선수는 홈런 28개를 쳐 홈런왕 2위를 차지했고, 조규제 선수는 그 해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쌍방울레이더스는 LG트윈스와 공동 6위를 차지했음에도 나는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 좋은 평가를 받았던 한 해였습니다.

1992년 조규제 선수의 몸 상태가 안 좋아 지기 시작했습니다. 7회까지 이기고 있던 시합이 7회 이후부터는 역전패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해태 타이거스에서 패배를 몰랐던 저는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을 맡으면서 실연을 맛보게 됐습니다.

7회 이후 시합이 역전이 되면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억울합니다. 특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1점차이로 역전을 당하면 맥이 빠져버립니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오면 자정이 가까웠는데, 새벽까지 자책을 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결국 1992년 시즌이 끝나고 감독직을 그만두게 됐습니다.

쌍방울레이더스를 나오고 나서 1993~1994년 스포츠신문사 객원기자로 활동했습니다. 매일 야구장에 들러 관전평도 하고, 1주일에 한 번 서울신문에 야구칼럼도 연재했습니다. 그렇게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쌍방울레이더스의 코치스텝들과 술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같이 일했던 20여 코치들이 모두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감독이 구단을 나가게 되면, 같이 일했던 스텝들도 함께 바뀌고 새로운 진용이 갖춰집니다. 내가 감독직을 버렸기 때문에 나와 함께 일하던 스텝 20여 명도 일터를 잃게 됐습니다. 당시 내 아이들은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코치스텝들의 아이는 내 아이들보다 더 어렸습니다. 한 순간에 그 아이들의 아버지 직장을 내가 뺏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내 삶에만 빠져 주위를 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때 나는 또 한 번 결심했습니다. 다시 구단으로 복귀하게 되면 성적을 떠나, 오랫동안 동료들과 함께 일하겠다고 말입니다.

아직도 야구를 몰라
1995년도에 OB 베어스 감독으로 복귀를 했습니다. 당시 OB 베어스에는 심정수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심정수 선수는 주로 3루수를 맡았습니다. 이 선수는 어깨가 굉장히 강했습니다. 어깨가 강하다보니 공을 잘못 던지면 관중석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때 나는 심정수를 외야수로 포지션을 바꿔 연습을 시켰습니다. 1995년 시즌이 시작될 무렵, 스윙 연습을 시켰습니다. 심정수는 변화구에 약했습니다. 직구에는 홈런을 쳤지만, 변화구는 항상 헛스윙을 했습니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되던 안 되던 시합에 심 선수를 출전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심정수 선수의 실력도 점차 안정을 찾아 갔습니다. 심 선수 스스로도 감독이 자신을 믿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 그 해 심정수 선수는 홈런 21개를 쳤고, OB 베어스 역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OB 베어스가 우승을 차지하고 안정화 되면서, 나는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함께 일했던 코치들을 다시 영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에 OB 베어스가 두산 베어스로 바뀌고, 저는 2003년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을 떠났습니다. 당시 두산그룹 박용호 회장이 감독이 아닌 구단 부사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했습니다. 내가 있을 곳은 야구장뿐이었기 때문입니다.

2004년에 한화 이글스에서 감독 요청이 들어와 다시 한화 이글스로 입단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계약한지2개월 만에 뇌경색을 앓게 됐습니다. 구단에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표했지만, 구단의 배려로 감독직을 계속 맡게 됐습니다. 이때가 내 인생에서 건강이 가장 안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수들의 도움으로 2007~2009년에는 5할 이상의 성적을 내, 구단은 나름대로 유지가 됐습니다. 

한국야구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005·2008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대회,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등을 비롯한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이때마다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 지난 10년 이라는 세월 동안 한국 야구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으로 발전했습니다.

나는 51년간 야구밖에 모르고 살았습니다. 아는 것은 야구뿐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야구를 잘 모르겠습니다. 야구를 하고 배울수록 야구가 힘이 든다는 걸 느꼈습니다. 많은 경기를 치르면서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들을 지켜봤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상황들이 경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야구감독은 300승 300패를 해야 진정한 야구감독이 될 수 있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닙니다.

감독은 눈과 머리와 가슴으로 경기를 판단해야 합니다. 눈으로 보고 머리로 판단을 내리지만, 마지막엔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야 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배려가 전제돼야 합니다. 선수가 실수했다고 해도 참고 기다려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아직도 야구가 좋습니다. 지금까지 1000승에서 20승이 모자란 980승을 했습니다. 지금도 할 수만 있다면 야구경기장에서 함께 호흡하고 싶습니다.  

김인식 감독은…
1965년 크라운 맥주 선수로 야구선수생활을 시작했다. 1982~1985년 동국대 감독, 1986~1989년 해태타이거스 수석코치로 활동했다. 1990~1992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을 맡으며, 프로야구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1995~2003년 두산 베어스 감독, 2004~2009년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활동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팀 코치,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 감독, 2005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 국가대표팀 감독, 2008년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 감독 등 세계국제대회 감독으로 활약하면서 한국야구의 위상을 드높였다. 현재 한화 이글스 고문, 한국야구위원회 기술위원회 위원장, 한국야구위원회 규칙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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