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화의 선원총림을 가다43-선종의 건설자 백장회해(百丈懷海)

▲ 백장회해는 선불교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선종의 건설자’로 평가받고 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명구로 유명한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 선사는 성당(盛唐)과 중당(中唐) 때 선승으로 최초의 선원총림인 백장총림(百丈叢林)을 창설했다. 선(禪)의 초조 보리달마 이후 선종사(禪宗史) 1600년 동안 뛰어난 선승도 매우 많지만, 백장회해의 업적을 평한다면 총림 규약인 ‘백장청규’ 제정과 ‘선종의 독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장청규>의 제정과 선원의 독립은 중국 선불교 역사상 최대 사건이다. 보리달마가 처음으로 선을 전하고 육조혜능이 사상적 발전을 도모했다면, 백장회해의 역할은 총림의 법전(法典)격인 청규의 제정과 선원의 독립이었다.(백장 이전 선불교는 독립적 수행공간이 없었다. 선불교는 율종사원의 당우 한 채를 빌려서 수행하는 더부살이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선불교는 훗날 거대한 종파로 발전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또 당말 선종이 회창폐불의 법난(845년)과 오대(五代)의 혼란기를 지나 송대  중국 천하를 휩쓰는 것도 그 바탕에는 백장회해의 힘이 있다. 그를 칭해 ‘선종의 건설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의 선종사원(총림)에는 ‘조사당(祖師堂)’이라고 하는 당우가 있다. ‘조당(祖堂)’ ‘조전(祖殿)’ ‘조사전(殿)’이라고도 하는데, 선종 조사의 상(像)을 모신 곳이다. 당(堂) 중앙에는 선의 초조인 보리달마 상을 모시고, 우측에는 백장회해 상을 모신다. 그리고 좌측에는 해당 사찰 개산조사의 상을 모시는데, 그 속에는 유명한 육조혜능 선사나 임제의현은 없다.
원나라 지원(至元) 4년(1338년) 동양덕휘(東陽德輝; 생몰연대 미상) 선사가 칙명을 받아 편찬한 <칙수백장청규> ‘존조장(尊祖章: 조사를 받듬)’에는 조사당에 배향(配享)하는 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오조(吾祖: 우리 祖師) 달마가 오셔서 직지(直指)의 도(道)로써 가르치시니, 이에 사람들이 비로소 확연함을 보게 됐다. 자성(自性)의 묘는 문자에서 구하지 아니하며, 어묵(語?)에 의지하지 아니하며, 소리와 형색 밖에서 얻는다 했다. 이에 우리들에게 조사의 도(道)를 전하니, 조위(祖位)를 잇는 이는 불을 이어가듯 물을 담아가듯 고금을 통해 터럭만치도 오차가 없었다.(…) 후에는 백장대지선사가 청규를 만들어 우리들을 거(居)하게 했다. 그리하여 선림(총림)은 이에서 비롯됐다. 해회(海會)의 단공(端公: 白雲守端선사)은 말하기를, 모름지기 당(堂) 중앙에는 달마를 모시고, 오른 쪽에는 백장을 배향(配享)하고, 그리고 나서 각사의 개산조사를 배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해회(海會)의 단공(端公)’이란 임제종 양기파의 조(祖) 양기방회의 제자인 백운수단(白雲守端) 선사이다. 또 그는 오조법연의 스승이자 <벽암록>의 찬자 원오극근의 노사(老師)이기도 하다. 백운산 해회원(海會院)에서 법을 폈기 때문에 ‘해회(海會) 단공(端公)’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말이라면 믿을 만하다. 특히 끝머리에 “마땅하다”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옛부터 그렇게 해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총림에 따라서는 좌측에는 2조혜가, 우측에는 백장회해의 상을 모시고, 이어 좌우로 해당 사찰의 개산조사와 역대 주지의 상을 모시기도 한다. <칙수백장청규> ‘존조장’에는 보리달마의 기일(忌日)은 10월 5일, 백장회해의 기일은 1월 17일로서 총림에서는 이 두 기일을 불탄일 정도로 엄숙하게 거행한다. 
조사당에 봉안되는 기준은 유교의 사당(祠堂)이나 향교의 예를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고대의 예법을 규정한 <예기(禮記)>에는 “공이 있는 자는 ‘조(祖)’가 되고, 덕이 있는 자는 ‘종(宗)’이 된다”고 하여, 조종(祖宗)의 기준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조사당에 봉안되는 기준은 명성이 아니고, 선불교에 끼친 공로가 있어야 한다. 그가 아무리 명성이 훌륭해도 공적(公的)인 업적이 없다면 그것은 개인에 불과하다. 백장회해가 보리달마와 함께 조사당에 모셔진 것은 선종 건설에 지대한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장총림, 백장선사의 생활철학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농선(農禪)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것으로 여기에는 남녀, 노소(老少), 상하(上下) 구분이 없었다. 평등의 원칙 아래 모든 대중은 반드시 작무(作務) 즉 보청(普請: 울력, 노동)에 동참하도록 했다. 승당이나 요사를 지키는 직당(直堂: 당번)과 병승(病僧), 연로한 노승 외에는 보청 종소리를 들으면 모두가 울력에 참여해야 했다. 합당한 이유 없이 공동작업, 공동생산(=울력)에 불참할 경우 추방토록 했다.
백장선사는 복건성 장락(長樂) 출신이다. 법명은 회해(懷海), 백장은 주석했던 산 이름이자 법호이다. 속성은 왕(王)씨. 20세에 서산혜조(西山慧照) 선사에게 출가했다. 남악의 법조(法朝)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사천성 여강(廬江; 지금의 안휘)에서 여러 해 동안 대장경을 독파했다. 그 뒤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에게 참학해, 언하(言下)에 대오하고는 서당지장(735~814), 남전보원(748~834)과 함께 마조도일의 3대 걸출제자 가운데 하나가 됐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교초(翹楚,)’라고 불렀다. ‘교초(翹楚)’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 ‘출중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백장회해는 기질과 포부가 백장산의 기운처럼 웅대한 선승이다. ‘대지선사(大智禪師)’라는 시호(諡號)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지혜가 금강석 같은 선승이었다. 확신에 가득 찬 선승, 조사선의 정신과 사상으로 중무장한 선승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선불교가 율종사원의 더부살이로부터 독립하여 별도로 교단을 건설할 수 있었겠는가? 불상은 가상(假像)이고 ‘지혜가 곧 불(佛)’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활철학은 무위도식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의 호구(戶口)는 자신이 해결해야 하며, 진정한 수행이란 일상 속에서 실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만사를 제치고 오직 앉아 있기만 한다(좌선)고 깨닫거나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선수행이 오직 좌선을 통해서만 이뤄진다면 그것은 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부딪히면 깨어지고 마는 유리선(琉璃禪)인 것이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이것이 바로 마조-백장으로 이어지는 홍주종 계통의 생활선의 표어였다.
보청(普請)은 사원의 유지나 경영을 세력가나 신자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직접 생산을 통해 자력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즉 자급자족하겠다는 것으로 이는 율종, 정토, 화엄, 천태, 법상, 유식 등 기존의 교단과 확연히 차별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인도불교가 벌레나 곤충 등 살생을 이유로 농경(農耕)을 금지한 것과는 다른 것으로, 구(舊) 불교교단에 대한 비판이자 개혁이요, 한편으로는 선종교단의 자긍심이었다. 백장총림이 세력가나 권력자들의 유혹이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깊은 산악에서 고고하게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적극적인 노동인 보청으로 의식주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훗날 선불교가 회창폐불(845년)의 회오리 바람 속에서도 살아남는 모멘트가 되기도 했다.

그의 선사상의 특징은 일체를 모두 방하착해 버리라(一切諸法, 幷皆放却)는 것이다. 그는 백장대지선사어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생은 누구나 다 깨달을 수 있다. 다만 번뇌 망상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면 부처와 다름없게 된다. 먼저 모든 인연과 만사를 쉬고, 세간이니 출세간이니 등등 일체 모든 것을 방하착해 버려라(一切諸法, 幷皆放却). 그 무엇도 생각에 남겨 두지도 말고(莫記, 莫億), 대상에 끄달려 가지도 말고(莫緣), 망념을 일으키지도 말라(莫念). 몸과 마음을 모두 놓아 버리고 자유자재 하게 하라. 마음은 목석처럼 무심하게 하고 입으로는 일체 언어를 끊고, 분별심을 갖지 말라. 그렇게 하면 마음이 허공처럼 청정해 져서 저절로 지혜가 드러날 것이다.”
“부처를 찾으려 하지 말라. 지해(知解: 분별심)를 갖지 말라. 번뇌니 깨끗함이니 하는 생각도 모두 버려라. 지옥을 두려워하지 말고, 천당의 낙을 좋아하지도 말라. 모든 것에 구애되지 말라. 그것을 ‘무애해탈’이라고 이름 한다.”

그의 법어는 지옥과 극락, 번뇌와 깨끗함, 중생과 부처 등 문자나 그 개념에 구속되지 말라는 것(不拘文字)’이다. 개념에 구속되면 그는 한낮 그림자를 쫓는 사람, 메아리를 쫓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백장의 뛰어난 제자로는 5가7종 가운데 위앙종을 개창한 위산영우(771~853)와 황벽희운(?~850)이 있다. 위산영우는 유명한 선승이고, 5가에 속하지 않지만 황벽희운의 제자들도 훗날 스승의 선을 현양하기 위해 황벽산 만복사에 황벽종을 세웠다. 황벽의 제자로는 불세출의 선장(禪匠) 임제의현(?~866)이 나타나 임제종을 세웠는데, 임제종은 이후 중국, 한국 선불교의 주류가 된다.

마조도일-백장회해-황벽희운-임제의현으로 이어지는 직계의 4대 선승은 모두 천재적 인물들이다. 이 시기를 이른바 ‘선의 황금시대’라고 한다. 또 이들을 ‘4가(四家)’라고 하고 그들의 어록을 합해 <사가어록(四家語錄)>이라고 한다. 특히 <임제록>은 선어록의 백미이다. <임제록>을 보지 않고 선의 정안(正眼: 바른 안목)을 갖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백장회해는 마조도일에 이어 강서성 홍주 신오현 대웅산(大雄山), 곧 지금의 백장산에 총림인 수성선사(壽聖禪寺)를 세우고 법을 펴다가 814년 당 원화 9년 1월 17일에 만 9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사방에서 귀의하는 승속이 헤아릴 수 없었다”고 전한다. 시호는 대지선사(大智禪師). 그가 남긴 유명한 공안으로는 백장선사가 5백년이나 묵은 들여우를 제도했다는 ‘백장야호(百丈野狐)’와 깨달음의 정상을 대웅봉에 비유한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峰)’ 그리고 들오리를 주제로 스승 마조와 주고받은 백장야압(百丈野鴨) 등이 있다. 저서로는 <백장고청규(百丈古淸規)>(산실됨)와 <백장대지선사어록>이 있다.    

후세 역사가나 선승들은 그를 ‘총림(선원)을 개벽시켰다’고 하여 ‘총림개벽백장대지선사(叢林開闢百丈大智禪師)’라 칭한다. 최초로 청규를 제정하고 총림을 만들어서 선종이 하나의 종파로 서는 결정적인 바탕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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