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기행 10 백련사

 

▲ 백련사 대웅보전 현판은 두 쪽으로 나눠져 있다/사진=이승현(시인 사진작가)

동백숲 빼어난 백련사는
원묘요세의 백련결사 터
50년간 산문출입 삼가고
날마다 ‘아미타불’ 1만번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백련사 지척에 있어
연못의 석가산 남아
옛 주인의 정취 일러줘


동백 숲에 꽃 없어도 절이 있어 아름답다

동백 숲의 짙푸른 잎들이 비에 젖고 있었다. 지혜장은 무심한 빗줄기너머 동백 숲을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다. 우산을 든 부부는 어느새 요사채 앞마당에 도착했고 비에 젖은 배롱나무가 가지를 흔들며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동백 숲에 꽃은 없어도 이렇게 절이 있어 아름다움은 더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진리의 아름다움은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니까.

백련사 만경루. 그 앞에서 구강포 쪽을 바라보니 경치가 일품이었다. 커다란 느티나무와 축대 모서리에 홀로 선 큰 키의 부도 하나, 그 너머로 동백 숲을 지나 희뿌연 운무가 오르는 곳이 바다일 터. 다시 그 너머에는 고려청자 생산지 사당리가 있을 것이다.

종무소와 찻집으로 나눠진 누각 아래를 거쳐 법당 앞에 서니 찌뿌드드하던 몸이 가벼워졌다. 알맞게 빛바랜 단청이 팔작지붕의 공포를 찬연하게 장식하는데 중앙에는 두 개로 나눠진 현판에 ‘대웅’ ‘보전’이 써져 있었다. 앞으로 튀어나 온 익공(翼工)을 피해 걸려 있는 현판의 글씨는 인근 신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서체. 뒤 돌아 보니 누각의 중앙에 걸린 ‘만경루(萬景樓)’도 같은 솜씨다.

현판 옆의 기둥 윗부분에 조각된 황룡과 청룡은 목을 S자로 움츠리고 있어 여차하면 앞으로 돌진 할 것 같은 포즈다. 많은 절집 건물에서 어간 기둥에 용머리를 조각한 것을 볼 수 있다. 전통목조건물에는 기둥사괘에서 보 방향으로 나오게 한 부재가 끼워져 있는데 이를 안초공(按草?)이라고 한다. 안초공은 기둥머리에서 밖으로 빠져 나와 평방과 주두 등을 일체화 시키는 역할도 하는데 일반 건축에서는 꽃잎 끝이 말려들어 간 파련화(波蓮花) 모양을 쓰고 절집 건물에서는 용을 조각한다. 용을 조각하는 이유는 그 전각이 바로 극락세계 서방정토로 중생들을 인도하는 반야용선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네 귀퉁이에 곧은 기둥(活柱)을 받친 대웅보전으로 들어가는 오른쪽 문아래 댓돌이 유난히 널찍했다. 대웅전 내부는 그윽했다. 중앙 수미단에는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여래가 오른쪽에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닫집은 생략되었고 지붕까지 커다란 불화가 모셔져 있는데 근래에 모신 듯 했다. 안쪽의 공포와 들보 기둥의 단청 역시 빛이 바래긴 했지만 선명도는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어 신비감과 고색을 더해 주었다. 수미단의 양 기둥 위쪽에 눈에 띄는 동물 형상이 있는데, 바라보기에 오른쪽에는 사자같이 생긴 놈이 기둥 밖으로 툭 튀어나와 허공에서 흘낏 쳐다보고 있다. 반대쪽에는 토끼처럼 생긴 놈이 날개를 달고 기둥 밖으로 점프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정면의 탱화 위와 좌우의 보에서는 크고 작은 용들이 머리를 내놓고 참배객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 중 하나는 뭘 입에 가득 물고 머리를 위로 쳐드는 중이다.  

▲ 대웅보전 내부/사진=이승현(시인 사진작가)

‘결사’로 시간을 초월해 지키는 한마음

“이것도 두 쪽으로 나눠진 현판이네.”
나팔수씨가 가리킨 두 쪽의 현판에는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라고 쓰여 있었다.
“어, 그런데 절 사(寺)자가 아니고 회사 할 때 사(社)자네. 이 사자는 단체란 뜻을 갖고 있는데.”
“맞아. 단체라는 뜻이야. 불교에는 결사(結社)라는 전통이 있는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수행 모임을 운영했다는 뜻이지.”

백련결사는 원묘국사 요세(1163~1245) 스님이 결성한 수행과 신행 운동이었다. 원묘 국사가 결성한 백련결사는 법화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참회의 생활화를 통해 문수보살의 지혜를 닦고 보현보살의 실천행을 본받자는 취지였다. 원묘 국사는 당초 고려의 흐트러져가는 불교계를 수행을 통해 일신하고자 했던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국사의 정혜결사(定慧結社)에 동참했었다.

그러나 자신이 배운 천태교의에 입각한 참회와 염불 수행으로 돌아와 백련사를 결성한 것이다. 이 결사에는 관료와 서민 할 것 없이 두루 동참해 당시 정혜결사와 양대 맥을 이루었다. 원묘국사는 철저한 수행 실천가였다. 50년 동안 산문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서 매일 <법화경>을 읽고 아미타불을 1만 번씩 염불 했으며 53불에 예배하며 참회하기를 12번씩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결사의 대표적인 예는 만일염불결사야. 만일동안 끊이지 않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집단 수행 체제라 할 수 있어.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만일염불결사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 이런 결사는 직접 수행을 하는 스님이나 신자가 있고 그를 지원하는 일을 맡는 사람이 따로 있지. 조직을 꾸리고 기도와 수행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드니까 비용을 마련하는 팀도 따로 가동됐대. 상당히 조직적인 신행운동인 셈이지.”

“아, 불교 역사에 그런 튼튼한 전통이 있는 줄은 몰랐네. 시간을 초월해 대를 이어 그렇게 한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숭고한 일이 아닐 수 없지.”

“자, 이만 나가요. 동백 숲을 거쳐 다산초당까지 다녀와야 하니까 시간이 빠듯하겠네.”

부부는 대웅보전 옆 현판이 없는 건물(삼성각)과 강당을 살펴본 뒤 동백 숲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장전은 해체복원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안에 모셨던 지장보살님과 시왕들은 녹사 판관과 역사들을 데리고 만경루로 잠시 이사를 와 있었다. 백련사 서쪽 마당의 비각 안에는 사적비가 웅장하게 서 있었다.

조선 숙종 7년(1681)에 세워진 이 사적비는 옛 고려시대의 귀부와 이수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의 귀부와 이수는 다름 아닌 백련결사의 창설자 원묘 국사의 비였을 것이란 말과 함께. 그 옆에는 최근에 세운 우람한 비가 서 있는데 나팔수씨가 첫 줄을 읽었다.  

“전불심인 부종수교 조계종 정화주도 말세법등 동산당 혜일대종사비명”

▲ 백련사 전경/이승현(시인 사진작가)

 
동백숲 지나 다산(茶山) 만나러 가는 길

동백 숲은 과연 깊은 그늘을 안으로 감추고 빗물을 말리고 있었다. 어둑한 숲에 깊은 침묵으로 앉아 있는 부도의 형체는 분명하지 않은데 숲 너머 빛을 배경으로 근엄한 실루엣을 연출하고 있었다. 어느 것도 주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백련사의 부도들은 축대 위와 법당 앞, 동백 숲에 흩어져 있지만, 그 모두가 그 자리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지식의 자태를 오롯이 연출해내고 있다.
숲길은 좁았다. 토끼길 같은 숲길을 따라 다산초당까지는 800m. 다녀오려면 최소한 한 시간은 걸릴 듯했다.

“다산 정약용의 저서가 몇 권쯤 될 것 같아?”
“글쎄, 엄청난 저서를 남겼다는 것은 아는데,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같은 몇 가지 밖에 아는 게 없어서 말이야. 한 300여권 되려나?”
“노우, 틀렸습니다. 1930년대에 사후 100주기를 맞아 다산의 저서 500여 권을 묶은 <여유당전서> 76책이 발행됐다고 하는데, 시(詩)만해도 2500수에 이른대. 다산의 학문은 철학 정치 법률 경제 문학 등에 두루 통했고 심지어 의학과 농학에도 깊은 조예를 보였대. 만물박사였다는 얘기지. 진짜 만물박사.”

그렇지만 정조와 콤비를 이루며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너무 잘난 게 죄가 되고 너무 자애로운 게 탈이 되어 모함과 탄핵의 중심에 서기 바빴던 게 다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늘이 내린 사람은 세상의 어지러운 인연을 초월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법이다. 유배지에서 승화된 그의 사상과 정신은 정치판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유배라는 형벌은 그것을 형벌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문이고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삶의 문이다.

길은 외길, 부부 외에 어떤 인기척도 없는 좁은 산길이 조금씩 어두워지는데 다산초당은 언제 나오려는지. 백련사 혜장 선사와 교류하던 그 길이 바로 이 길일까 생각하는데, 길 아래로 언뜻 기왓골이 보였다. ‘드디어 집이 한 채 나오는 군’ 하고 생각하는 동안 왼쪽에 멋진 정자 하나가 나타났다.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이 정자는 다산이 바람을 쏘이며 돌아가신 정조 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생활 하는 형 정약전을 그리워했던 곳이라 하여 근래에 세운 것이다. 

천일각에 잠시 올라서보니 과연 경치는 그만이었지만 멀리 저물어 가는 마을이 보여 마음이 급해졌다. 부부는 동암과 서암 연못 그리고 다산초당과 다산이 유배를 마치며 새겨 놓았다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씨까지 둘러보았다. 초당 앞마당에 있는 밥상 같은 편편한 돌이 다산이 차를 달여 마신 곳인데 ‘차 부뚜막’이란 뜻의 ‘차조’라고 부른다는 안내판이 놓여 있다.

물소리기 졸졸 들리는 연못은 어둑어둑해 깊이를 알 수 없었지만, 그곳에서 물을 길어 차를 달이고 밥을 지었을 청빈한 선비를 생각하니 한 끼 밥도 한 잔 커피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연못 중간에 막돌을 모아 만든 석가산(石假山)은 옛 주인의 정취를 일러주는 듯 했다. 이렇게 정석, 다조, 연못의 석가산에 초당 뒤의 샘물(藥泉)을 합해 다산사경(茶山四景)이라고 한다. 맑고 향기로운 선비, 그러나 시대의 불운을 피할 수 없었던 다산의 유배지는 한국인의 정신 속에서 더 이상 유배당해서는 안 될 성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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