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기행 8 해남 미황사

▲ 산 가득 녹음이 어우러져 더욱 멋드러진 해남 미황사 전경/사진=이승현(시인 사진작가)

소가 쓰러진 곳에 절을 세우다
해남 땅끝마을 앞바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멀리서 배 한척이 다가 오는데 천상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졌다. 가만 보니 배는 돌로 만들어진 것인데 포구로 왔다가는 사람들이 다가가면 다시 바다 쪽으로 멀어지길 반복했다. 기이하게 여긴 사람들은 의조(義照) 화상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화상은 장운(張雲)과 장선(張善)이라는 두 사미승과 마을 사람 100명을 선발했다.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렸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 안에는 금으로 만든 사람(金人)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등 40성중, 16나한상, 탱화 등이 금 상자 안에 들어 있었고 검은 돌도 있었다. 검은 돌을 깨뜨렸더니 안에서 검은 소가 나와 저절로 커졌다. 그날 밤, 의조 화상의 꿈에 배에 있던 금인이 나타나 당부했다.

“나는 우전국(優塡國 인도)의 왕인데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불경과 불상을 모실 자리를 찾다가 금강산까지 가게 되었으나 거긴 이미 많은 절이 있어 돌아가다가 이곳에서 산을 보니 1만 불(佛)이 나타났다. 소에 경전을 싣고 가다가 소가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이 경과 상을 모시기 바란다.”

다음날 소에 경과 상을 싣고 가는데 달마산 중턱에서 한 번 넘어지더니 일어났다. 다시 산골짜기에 이르러 “미~”하고 크게 울며 눕더니 일어서지 못했다. 의조 화상은 소가 처음 넘어졌던 곳에 절을 짓고 통교사(通敎寺)라 하고 두 번째 넘어진 곳에 절을 지어 미황사라고 했다. 미황사라는 이름은 소의 울음소리가 “미~”하고 아름답게 났고 금인의 누런 금빛을 상징하여 지은 이름이다. 신라 경덕왕 8년(749) 8월의 일이다.

이 이야기는 조선 숙종 때 세워진 ‘미황사사적기’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사적기를 쓸 때까지만 해도 미황사에 <화엄경>과 <법화경> 등 경전과 탱화 등이 그대로 있었다는 내용도 들어 있고. 그러니까 미황사는 인도의 왕이 가지고 온 신령스런 물건들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제법 번창하다가 빚을 갚지 못해 피폐했다는 것이다.

부부는 미황사로 향했다. 푸르게 자라는 벼들이 마음을 넉넉하게 하고 아름다운 남도의 산자락들이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게 했다. 남도라고 하지만 너른 들판이 있는 지역은 아니었다. 지혜장은 “바쁜 일도 없는데 지방도에서 과속하는 것은 좀 무식한 짓”이라며 풍경을 감상했다. 그러다가 미황사 창건설화를 꺼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설화가 상징하는 중요한 내용이 있어.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루트가 공식적으로는 중국의 통해 고구려로 들어 왔다는 것(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이지. 그러나 그보다 300년 쯤 더 빠른 시기에 인도에서 직접 남쪽바다를 통해 가야국에 들어 왔다는 불교남방전래설도 있거든. 이 설화는 인도의 왕이 직접 경전과 불상 등을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니까 남방전래설에 대한 이 지역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사료가 되는 셈이지.”

“그래, 중요한 것은 절에서 보고 듣는 것은 무엇이든 깊은 뜻이 있고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는 거야.”

세월의 바람결에 육탈한 법의 집

“와, 산 능선이 정말 멋지다. 사진에서 보던 미황사 뒷산이 바로 저거구만.”
“응, 달마산이지. 산 이름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잖아, 달마산.”
높이는 해발 489m, 백두대간의 정기를 한라산으로 연결하는 산맥이다. 이름에 대한 유래는 특별히 전하는 것이 없지만, 설화의 내용에 비춰 본다면 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이 직접 온 곳이니 진리를 뜻하는 달마(다르마 Dharma)가 머무는 곳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근래의 불사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진행 됐는지 막돌을 정교하게 쌓은 석축과 누각의 단청, 멋들어진 글씨를 담은 현판 등이 잘 말해주고 있었다. 앞에는 ‘자하루(紫霞樓)’ 뒤에는 ‘만세루(萬歲樓)’라는 현판이 달린 누각은 아래층은 숙소로 위층은 강당으로 사용되는 듯 했다. 그 옆의 범종루에는 새로 조성한 범종이 덩그렇게 매달려 있는데 뎅~ 하고 종을 치면 그 소리가 저 멀리 바다까지 갈 것 같았다. 
“아~ 마치 완벽하게 육탈된 형해(形骸) 같다.”
“저렇게 거룩한 법당을 그렇게 비유하다니, 여보님의 안목이 초월적인걸.”

▲ 미황사 법당/사진=이승현(시인 사진작가)

미황사 대웅보전(보물 제947호)은 단청의 흔적이라곤 한 점도 찾을 수 없을 만치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말끔한 마당을 앞에 두고 짙푸른 녹음 뒤 삐죽삐죽한 기암괴석을 병풍처럼 두르고 선 대웅보전은 그 외관(外觀)만으로도 세월의 무상함을 충분히 설법하고 있었다. 정면 3칸의 팔작지붕은 겹겹이 쌓아올린 공포를 드러내고 있는데, 기둥과 공포가 백골을 연상시킬 정도로 완전하게 탈색되어 있었다.

법당 안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중앙 불단에는 잎이 삐죽삐죽한 연화좌대 위에 삼세불이 모셔져 있고 그 위의 닫집은 단순하지만 찬연했다. 천정 우물반자의 ‘옴마니반메훔’이란 주문을 도형화한 문양은 빛을 바랬어도 그 기운을 역력하게 살려내고 있다. 기둥과 보에 칠해진 단청과 포벽의 달마도 등의 옅은 색감이 새삼스럽게 무상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천정벽과 들보의 여백을 가득채운 부처님들은 인간세상의 모든 고통을 가져가려는 듯 진지했다.

“저렇게 무더기로 부처님을 그려 놓은 법당은 처음보네.”

미황사에 머물던 고승 가운데 연담유일 스님이 있었다. 그는 저서 <임하록>에 미황사는 1천불이 출현할 곳이라고 썼다. 그리고 1천불의 출현을 염원하며 벽화에 1천불을 그렸다고 한다. 법당이란 법의 집, 가르침이 표현되고 형상화 되는 절대적인 공간이다. 보다 많은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자 하는 염원이 보다 많은 부처님을 그려 모시게 했을 것이다. 천불은 천명의 중생을 제도하고 만불은 만 명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순박한 염원 말이다.

삼배를 올리고 밖으로 나와 배흘림기둥을 어루만져보니 거기서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1754년에 중수된 기록이 전하니까 적어도 250년이 넘은 건물을 스치고 지나간 바람들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뭇결에 채워 주었을까? 주춧돌에 새겨진 거북과 꽃게의 문양은 육지도 언젠가는 바다였고 또 언젠가 다시 비다가 될 것이란 법문을 들려주는 것 아닐까?

“왜 단청을 안 하지? 나무가 너무 많이 갈라져서 못하는 건가?”
지혜장도 궁금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새롭게 불사를 하여 정갈하기 그지없는 절의 중심법당이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무량한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굳이 할 필요가 있겠어? 이대로가 살아 있는 법문인 걸.”
“그래도 못하는 건지 안하는 건지 궁금하잖아.”
지혜장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아, 그렇구나. 고마워.”

전화를 끊은 지혜장은 환희심이 솟구치는 표정으로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내가 아는 동생인데, 최문정이라고. 단청기능보유자이면서 불화작가야. 기술적으로 못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대로 복원할 수 없을 땐 그대로 놔두는 것이 현행법이래. 이 대웅보전 단청은 그 원형을 알 수 없어서 복원할 수 없다는 얘기지.”
“거 봐, 무슨 사정이 있다니깐…. 화재로 사라져버린 낙산사 종과 숭례문도 정밀조사를 통한 실측 자료가 있어서 복원이 가능하다고 들었던 것 같아.”

먼 바다풍경 속 삶의 번뇌여!
부부는 응진당(보물 1183호)으로 향했다. 대웅보전 왼쪽 석축위에 아담하게 따로 담을 두르고 있었다.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 모셔져 있었다.

▲ 미황사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사진=이승현(시인 사진작가)

“미황사 홈피에는 좌우에 아난과 가섭 존자가 모셔져 있고 16나한상과 인왕상 등이 모셔져 있다고 나왔던데... 수리 중이신가? 아무튼 여기 벽화 보여? 선으로 그려진 그림들 말이야. 원래는 수묵화였는데 선만 두드러지게 보이는 거야.”
응진당 앞에 서니 멀리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눈이 시원했다. 저 아래로 펼쳐진 들과 바다 풍경을 보는 지금의 행복감은 얼마나 오래 가슴에 남을 수 있을까? 이 감정이 남아 있는 동안은 행복하겠지만 뭔가 다른 상황이 닥쳐오면 그 행복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행복과 불행, 좋고 나쁜 것들과 그 기억, 희망과 좌절 그 모든 것이 잠시 바라보는 저 바다풍경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미황사 응진당 앞에서 보는 일몰이 일품이라고 한다. 지혜장은 멀리 진도와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일몰에 잠기는 풍광을 그려보았다.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있는 명부전과 삼성각을 차례로 들렀다. 지장보살님 한 분이 지키고 있는 명부전의 외벽 벽화 가운데 죄인을 펄펄 끓는 솥에 삶는 장면과 톱으로 썰고 있는 지옥의 장면이 소름 돋게 했다.
요사로 쓰이는 세심당과 일심관을 지나 등산로에서 ‘부도전 가는 길’이란 팻말이 가리키는 쪽으로 갔다. 부부는 아무 말 없이 20분 쯤 걸었다. 검은 소가 처음 누웠다가 일어섰다는 곳, 옛 통교사터에 부도암과 남부도밭이 있고 길 아래쪽 숲에 서부도밭이 있었다. 부도암 마당에는 우물처럼 움푹 파인 구덩이에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미황사비명’이란 전서(篆書)가 뚜렷하게 보였다.

부도밭은 고요했다. 멀리 바다와 섬들이 굽어보이는 양지바른 이 공간은 적멸의 즐거움이 가득한 또 하나의 법당이다. 서산대사에 의해 대흥사가 사세를 확장하는 세월은 그 법손들이 이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하는 세월이었다. 그들의 높은 덕행은 민초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지식인들에게는 삶의 바른 길을 깨우쳤을 것이다. 미황사가 그 대표적인 도량이었음을 남부도밭에 모셔진 21기의 부도와 서부도밭의 부도 6기가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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