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소음이나 다름없다

▲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법정 스님은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소음이나 다름없다’고 그러셨어요. 누에가 거친 뽕잎을 먹고 비단실을 뽑아내듯이, 스님은 대장경이라는 커다란 숲에서 해말간 잎들을 모아 유려하고 감성어린 우리말로 불교를 풀어내셨어요. 이웃 종교와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종교 정서로 말씀을 나누셨지요. 천주교 신자들은 법정 스님 말씀을 눈 감고 들으면 마치 수사님 말씀 같다고 했어요. 스님은 봉은사 다래헌과 불일암에 사실 때, 서가 한편에 성모상을 모시고 촛불 공양을 올리곤 하셨어요.” 인터뷰 요청에 조심스럽다며 여러 차례 손사래를 치다가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이 아닌 자연인 자격이라면 하겠다며 취재에 응한 속가인연으로 법정 스님 조카 현장 스님(56). 역사를 훑는 안목과 유머감각이 남다르다는 말을 듣는다.

세속 학문을 익혀 자신과 사회에
눈뜸이 있은 다음에 출가를 해야

전남상대에 다니던 법정 스님은 한 해 남짓 목포에 있는 절 정혜원 총무를 보면서 학교를 다녔다. 때마침 정혜원에서 산림법회가 열렸는데, 법석에서 설법을 한 효봉 스님과 인연을 맺어 출가한다. 현장 스님 역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정혜원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나와 사회생활을 하기보다는 출가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제가 출가를 한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봉은사 다래헌으로 법정 스님을 찾아갔어요. 스님은 ‘우리 집안에서 중이 또 나오겠구나.’하면서 편지를 보내왔어요. 제 출가소식을 듣고는 당신 출가 때 심정을 떠올렸다면서 ‘먼저 학문을 익혀 자신과 사회에 대해 눈떠야 한다. 그런 다음에 출가를 하겠다면 돕겠다. 종교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데, 자기 존재와 사회에 대한 눈을 뜨지 못하면 거꾸로 종교 자체가 부정되는 역기능이 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 때 스님 뜻에 따라 공부를 더하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그 편지를 늘 되풀이해 읽으면서 스스로 경책하는 지표로 삼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바로 다래헌으로 법정 스님을 찾아뵈었어요. 그랬더니 스님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송광사 뒤에 암자를 지으려니까 송광사로 내려가라고 하면서, 구산 스님께 소개장을 써주셨어요. 스님은 출가하신 뒤로는 세속 인연을 애써 밀쳐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반기지 않으셨기에 저 또한 세속 인연을 애써 드러내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꽃망울이 벙그는 매화를 보고는
“이곳이 내가 살만한 곳이구나.”

현장 스님이 입산한 75년 4월에 불일암을 짓기 시작했다. 불일암 자리에 있던 암자 이름은 자정암慈靜庵이었다. 법정 스님은 서울을 떠나 쓰실 암자를 전국을 다니며 보시다가 자정암에 올라 때마침 꽃망울이 벙그는 매화를 보고는 “이곳이 내가 살만한 곳이구나.”고 생각하셨단다. “자정암을 헐어 나온 재목과 기와로 부엌 채를 지었어요. 불일암 건물을 지은 기와나 목재는 모두 인부들이 등짐을 져 날랐어요. 그때 불일암에 솥을 걸어놓고 밥을 하고 찬을 해서 일꾼들을 먹였으면 될 텐데, 어쩐 일인지 큰절에서 해서 날랐어요. 제가 밥과 찬을 들고 하루 두 차례씩 오르내리며 백일 남짓 뒷바라지를 했어요. 행자 때 지은 복으로 평생을 산다고 스님이 늘 말씀하셨는데, 그 덕분에 이제껏 큰 탈 없이 살고 있나 봅니다. 암자 이름은 한 번 크게 쉰다는 뜻을 가진 일휴암一休庵과 불일암佛日庵, 둘을 놓고 저울질하다가 불일암으로 지었어요.” 그 뒤로 얼마 동안 현장 스님은 불일암에 들어가 법정 스님을 모셨다. 법정 스님은 그곳에서 17년을 살았다.

“제가 출가하는 봄에 불일암을 짓기 시작해서 계를 받는 날 낙성식을 했으니, 불일암과 제 출가 나이가 똑같아요. 그때 촛대처럼 가는 후박나무 묘목을 심었어요. 불일암에 갈 때마다 후박나무를 만지며 숨결도 느껴보는데, 그 가냘팠던 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서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요. 나무는 그렇게 컸는데 저는 별로 크지 못해서 그 나무 앞에서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후박나무는 그동안 불일에 오간 사람들, 그곳에 살던 사람들, 꽃이 피고 지던 소식, 헌식대獻食臺를 스쳐간 동물들을 비롯한 불일 숨결을 낱낱이 기억을 하고 있을 테죠.” 현장 스님에게 불일암은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어머니 품 같은 곳이다. 법정 스님 사상이 깃든 불일암과 현장 스님 역사는 나란히 간다.

“지금은 계단이 한 쪽으로 나 있지만 처음엔 계단이 정면으로 나있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이 똑바로 올라오는 모습을 맞닥뜨리는 게 거북해서 계단을 옮겼어요. 샤워실도 하나 만들었는데 처음 목욕을 한 분이 천주교 수사였어요. 그래서 천주교 목욕탕이라고 불렀지요. 그때도 스님은 다른 종교와 교류가 활발하셨어요. 불교라는 틀, 수행자라는 상相이 없이 사셨잖아요. 불자들 못지않게 스님 책을 읽고 감동한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스님은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시고 그이들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법정 스님은 그이들을 천주 보살이라 부르셨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이들은 스스로를 천불교 신자로 부르곤 했다.

“스님은 유럽 여행을 하면서 장익 주교님 도움으로 베네딕도 성인 수행처인 수비아코를 참배하며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맑고 향기롭게> 소식지에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스님이 존경하던 프란체스코 성인이 계셨던 아씨시를 둘러보면서 인도 불교성지를 참배할 때 못지않게, 아주 크나큰 성스러움과 성인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왔다고 고백하셨을 만큼 벽이 없으셨어요.” 그런 까닭일까. 법정 스님을 천불교 교주쯤 된다고 농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기업하는 사람들이 오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알맞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곤 하셨어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내려오셨기 때문에 형사들 몇이 따라 붙어 늘 감시를 했습니다. 불일암 건너편이 감로암 뒷산이거든요. 거기서 망원경으로 불일암에 어떤 사람이 오가는지 동정을 살폈어요. 그리고 스님에게 오는 편지도 모두 검열했어요. 계속 불쾌하게 여기시더니만 한 번은 광주 나가서 당신한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부쳤어요. 보내는 사람 이름은 김일성을 거꾸로 해서 김성일이라고 써서. 그 편지를 읽어주셨는데, ‘검열관들 보아라.’ 이렇게 시작을 해요.” 지금 우리는 스님이 고즈넉한 산사 암자에서 조용히 지내셨으리라 여기지만, 어수선한 시국은 스님을 고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스님이 당신 글만 많이 쓰신 줄 알지만, 금세기 불교관련 문헌들 가운데 스님 손을 거치지 않은 문헌이 거의 없습니다. 먼저 불교사전, 운허 스님을 도와서 불교사전을 만드셨잖아요. <불교사전>을 펴내면서 불교용어 개념정리가 확실해졌어요. 그 다음에 동국역경원에서 역경 일을 하실 때 팔만대장경에서 에센스를 뽑아서 <불교성전>을 책임편찬하고, 서문을 스님이 쓰셨어요. 사람들이 그 일을 법정 스님이 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어요. 백년암에서 며칠씩 묵으면서 성철스님 법어집 <선문정로>라던가 <본지풍광>을 모두 윤문하고 교정을 해 드렸어요. 광덕 스님 같은 분도 <법보단경>을 낼 때 스님께 봐달라고 당신 상좌 지오 스님을 보내셨대요. 구산 스님은 아예 문집이나 책을 펴낼 때마다 법정 스님에게 교정 봐 달라 그러셨고. 그 다음에 종립학교에서 나오는 교본들이 있습니다. 제가 불일암에 살 때인데 권기정교수가 직접 원고를 가지고 불일암을 찾아왔어요. 그 불교 교본을 모두 스님이 윤문을 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스님 저술 뿐 아니라, 웬만한 불교 문헌들이 스님 손길을 거쳐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현장 스님은 송광사를 떠나 해인사 강원으로 공부하러 가면서 법정 스님과 거리를 두게 된다. 해인사에서 다섯 해를 살면서 불교학생회를 이끌며 학생들과 함께 탁마했다. 서른 해 가까이 전국 불자들 사랑을 받고 있는 불교잡지 <해인>지 출발은 ‘학생회보’였다. “해인사 강원에 있을 때 포교부를 맡아 불교학생회를 이끌면서 학생회보 <해인>지를 펴냈어요. 백련암 큰 스님 법문과 해인사 대웅전 벽화 이야기를 담아서.”
지묵 스님은 그때를 이렇게 돌아본다. “<해인>지 창간 당시, 현장 스님이 거처로 뛰어들면서 ‘이번에는 <해인>지가 칼라로 나와요. 경비는 한 80만 원쯤 들고요.’라고 한다. ‘아니 10만원 남짓한 사중 보조로 학생회를 이끌어가는 형편인데 80만원이라니!’ 기가 막혀 하는데, 현장 스님은 여유만만하게 ‘다 수가 있지요. 장경각에서 한 부에 100원씩 보급하면 돼요. 참배객들이 좋아라고 할 것이니 두고 보시오.’ 큰소리쳤다. 예상은 적중했다. <해인>지는 날개 돋친 듯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누가 이렇게 잘 내냐?’ 백련암에 원고를 받으러 올라갔을 때 성철 스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면서 칭찬해주셨다. 큰스님 법문이 한글로 일반인에게 널리 보급되는 길이 <해인>지를 통해서 열렸다고 봐도 큰 무리는 아니다.” 글은 말보다 전파도 빠르고 힘이 셌다. <해인>지는 불교 포교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뒤에 현장 스님은 서울로 올라가 ‘불일출판사’를 만들어 불교서적들을 찍어냈다. 책 한 권이 작은 우주다.

한 겨울에 피는 매화를
‘석가모니 눈’이라 한다

“비구, 비구니 스님 가운데 법정 스님 영향을 받아 출가하게 된 사람들이 퍽 많아요. 한 사람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신 거죠. 더욱이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마지막 가는 스님 모습이 사람들에게 ‘삶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숙제를 던져주셨어요. 스님이 입적하신 뒤, 몇몇 스님들 입적 때 ‘우리도 꽃 받지 말고 부조금 받지 마라.’며 스님을 따라가고, 사람들이 자기 짐을 좀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죠.” 소리 없는 소리, 우레 같은 침묵이었다.

달맞이꽃이 있듯이 봄맞이꽃이 있는데 가장 봄을 먼저 맞는 꽃이 매화다. 한 겨울 매화를 보고 머지않아 모든 꽃들이 피어남을 알 수 있듯이, 석가모니 부처님 깨달음이 만 중생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예고편이다. 그래서 한 겨울에 피는 매화를 ‘석가모니 눈’이라 한다. “법정 스님 삶도 한 겨울 매화처럼, 중생 마음에 깃든 탐욕과 무지라는 번뇌 짐을 녹이는 약이었어요.”

“‘한마음 뿌리로 돌아가 이웃을 이롭게 한다. 베풂, 회향’한다는 말씀을 원효대사는 ‘귀일심원歸一心源 요익중생鏡益衆生’ 여덟 자로 표현했거든요. 그것을 스님은 여섯 자로 줄여서 ‘맑고 향기롭게’라고 정리해 내셨지요. 본디 우리 성품 안에 자리한 ‘청정과 자비’라는 두 날개 가운데, 청정심을 ‘맑고’로, 자비심을 ‘향기로움’으로 나타내셨어요.” 법정 스님은 ‘맑음’은 저마다 청정을 나타내고, ‘향기로움’은 그 청정이 사회로 여울지는 메아리라 했다.

거듭 인터뷰를 사양한 이답지 않게 스님을 향한 사사곡思師曲은 멈출 줄 모른다. “스님은 나이나 종교를 떠나 다양한 계층과 끈끈한 동지애를 나누며 깊이 교류하셨어요. 특히 민주화운동도 아주 열정을 가지고 하셨지요. 강원룡 목사님은 스님이 당신보다 한참 어리지만, 크리스천 아카데미 운영위원을 모셔서 함께 활동했습니다. 함석헌선생님도 스님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모셔서 운영주체로서 함께 하셨고요.” 현장 스님은 법정 스님을 선 수행자이자 명상가, 경전 번역가, 문필가, 민주운동가, 불교개혁가, 자연주의자이며 생태철학가, 절대미감을 지닌 미학가, 차(tea)를 사랑한 다인, 종교교류 모범을 보인 어른이라고 말씀한다. 스님 사상을 놓치지 않고 이처럼 낱낱이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현장 스님은 절이 산 속에 호젓하게 있는 모습은 그대로 좋지만, 한편으론 절이 세상과 함께 뒹굴면서 아파하고 울고 웃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문화 가정 돌보기, 새터민에게 터전 만들어주기를 비롯한 소외된 이웃과 늘 함께 하고, 법정 스님 못지않게 다른 종교인들과 교류가 활발하다. 그리고 대원사에 ‘티벳박물관’을 세우고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추앙받는 김교각 스님을 기념하는 ‘김지장기념관’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법정 스님 선묵전을 열고 선묵집을 펴내 역사를 짚어 정신을 잇는 일에 열중인 현장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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