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생이든 저 인생이든, 선택한 만큼 맹렬히 살아야

▲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나는 어머니에게 자식으로서 효행을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들이 모이는 집회가 있을 때면 어머니를 대하는 심정으로 나간다. 길상회에 나로서는 파격일 만큼 4년 남짓 꾸준히 나간 것도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보상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오두막 편지> ‘마른 나뭇단처럼 가벼웠던 몸’에 나오는 법정 스님 말씀이다.

파리 길상사를 후원하는 일은
유럽에 한국문화를 펼치는 일

어머니는 우리 생명 언덕이자 뿌리라고 하셨던 법정 스님이 남다른 애정을 보인 어머니 모임 길상회 회장이자 맑고 향기롭게 이사였던 법장궁法藏宮, 강정옥 보살(77)과 인사동에 있는 조촐한 카페에서 향이 그윽한 대추차를 앞에 놓고 마주앉았다.
1993년, 파리 길상사 탱화를 그린 재불화가 방혜자 화백과 가까운 지인 한 분이 경복궁 앞에 있는 법련사로 강정옥 이사를 불렀다. 자리에 힘께 한 청학 스님은 파리 길상사 개원에 동참했던 분들을 중심으로 파리 길상사를 후원하며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문화에서 불교문화를 빼면 얼마나 남습니까? 파리 길상사를 도와 우리불교문화를 세계로 펼치는 부처님 일을 후원하자는 말씀에 선뜻 동참하겠다고 했어요.” 길상회 산파 청학 스님은 법정 스님께 길상회원을 위해 정기법회를 갖도록 말씀드렸다. 법정 스님은 “내가 어디 다니면서 법문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며 한마디로 자르셨다. 그러나 유럽에 불교를 전하려는 마음들을 갸륵히 여겨 달라는 간곡한 청학 스님 부탁에 끝내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는 분들한테 회비를 걷었는데 스님이 들어오시면서 ‘주머니 좀 털지 마라.’고 한 마디를 하세요. 그 말씀을 듣고는 속으로 ‘모임이 운영이 되려면 돈이 드는데 수입이 없으면 뭐가 되겠노.’ 하면서 투덜거렸어요.” 법정 스님은 길상사 법석에서도 보시함을 도둑놈 아가리로 알라고 막말(?)을 했던 어른이시니 어련하셨을까.

어머니들을 만나러 올 때
목욕재개를 하고 나옵니다

법정 스님은 “길상회 어머니들을 만나러올 때는 목욕재개를 하고 옵니다.”고 말씀했다. “당신은 온 정성을 기울여서 모임에 나오는데 저희들이 헛되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어요.” 오는 분들에게 그때그때 돈을 걷어 쓰곤 했는데, 흩어지면 그 뿐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 강정옥 이사는 “기금을 만들어 일할 터전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길상사가 파리에서 개원이 되어 제 기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준비가 미비했던 관계로 청학스님께서는 길상사 개원으로 인해 빚을 안고 계십니다. 길상사 후원회인 길상회로서 면목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 자리에 나설 처지는 아닙니다만, 길상회 입회비 겸 길상사 건립 시주금으로 회원 한 사람이 000만 원씩 내면 어떨까하는 생각입니다. 회원 여러분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고 했다. 정회원은 정해진 금액을 내고, 그 밖에 분들도 형편껏 입회비를 내어 정회원, 준회원으로 정리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강정옥 이사는 회장이 되었다. 그 돈으로 파리 길상사에 좌복(방석)도 만들어 보내고, 사월초파일에 등 값이나 그때그때 필요한 경비는 물론, 파리 길상사에 머무는 스님 생활비를 보냈다. 그러다가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하면서, 사무실 보증금과 월세도 내고 길상사가 창건을 할 때도 십시일반 동참해 적지 않은 후원을 했다.

길상회 이전에도 법정스님을 뵈었을까? “83년인가? 송광사에서 하룻밤을 자고 불일암을 올라갔어요. ‘스님 뵈러 왔습니다.’하고 절을 올리고 말씀을 나눴는데, 말씀 끝에 제가 영가천도이야기를 꺼냈어요. 그 때 스님이 딱 한 마디를 하셨어요. ‘보살님은 그런데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아차, 싶었죠.” 스님은 시퍼런 반야검을 바로 들이대셨다. 길상사에 관음상을 조성한 조각가 최종태 선생이 어느 날 법정 스님에게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스님은 “불가에서는 그럴 때 독화살 이야기를 합니다.”고 답을 했다. 최종태 선생은 이 말씀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처럼 스님은 귀가 열린 분에게 늘 단답형으로 짧게 말씀을 건넸다.

“그 뒤에 법련사에서 법문을 하신다고 해서 갔는데, 글은 유려하시잖아요. 그런데 말씀이 글하고 달라서 확 깼어요. 사투리도 섞이고… ‘어쩌면 글하고 저래 다를까’ 싶었어요. 저는 글 쓰는 분들은 원래 말을 잘 못하는 가보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수필은 간결하고 짧으니 쉬이 읽히지마는 법문은 법이 좀 갖춰있어야 알아듣잖아요. 제가 법문을 들을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던 거지요.” 누구나 처음은 서툴다. 그 뒤로 스님은 대중을 향한 쉬운 법문 준비에 철저하셔서 길상사에서 하신 스님 법문엔 누구라도 금세 빨려들었다. 길상사가 개원한 뒤 스님 법문이 시처럼 수려할 즈음, 강정옥 이사가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은 어떻게 그렇게 글도 잘 쓰시고 말씀도 잘하세요?” 이때도 스님은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고 짧게 답을 했다.

“한참 뒤에 제가 인도를 다녀와서 스님께 ‘제가 이번에 인도를 열흘 넘게 여행을 하면서 살이 쪄가지고 왔어요.’하고 무심코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스님이 ‘아니, 그 가난하고 굶주리는 나라에 가서 살이 쪄가지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시는 거예요. 듣고 보니까 고생하는 분들은 생각도 안 하고 철없는 소리를 했더라고요. 괜히 싱거운 소리했다가 아주 혼났어요.” 출가자들에게 집 떠날 때보다 몸무게가 더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이르던 단호한 어른이니 오죽했으랴.

“스님께선 섞이는 것이 싫어서 비빔밥을 잡숫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마다 맛이 다른데 그것을 왜 섞어서 먹는지 모르겠다고.” ‘난 나이고 싶다’며 누구나 저마다 타고난 성품을 잃지 않아야 한다던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 모습을 보더라도 스님은 단호한 분이셨어요. 질질 끄는 성격이 아니셔서 끝낼 일은 단칼에 탁 끝내시더라고요. 길상회에서 법문을 하시고 난 뒤에도 횡하고 가버리셔요. 길상회원 가운데 한 분이 법련사에서 나오는 회지에다가 ‘우리는 스님을 너무 흠모해 가지고 법문을 듣는 날을 눈 빠지게 기다려왔는데, 스님은 눈길도 한번 주지 않고 쌩쌩 가버리셨다’고 올린 글을 읽었는데 너무 공감했어요. 먼 산 쳐다보고 법문하고 나면 싹 가셔버리시거든….”

“맑고 향기롭게 첫 수련회는 비구니스님 강원이 있는 운문사에서 1박 2일을 했는데 장익 주교님이 오셔서 두 시간 동안 설법하셨어요. 또 강화도에서도 세미나를 한 적도 있어요. 유스호스텔에서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곳이 ‘강화군 길상면’이었어요.” 우연치고는 놀랍다. 송광사 옛 이름도 길상사였는데, 파리 길상사,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라고 이름을 지은 까닭도 온누리가 상서롭고 복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셨으리라. “그 때 윤청광 선생님하고 옛 멤버들과 젊은 청년회원들이 1박 2일을 했어요. 거기서 저마다 맑고 향기롭게 실천지침을 쭉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주부이니까 물이 오염되지 않도록 부엌에서부터 맑고 향기롭게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스님이 ‘주부가 보는 각도가 따로 있네.’ 그러시면서 맞장구를 치셨어요. 마침 환경을 크게 더럽히지 않는 소재가 있었어요. 하얀 고체 주방세제인데 그 세제로 설거지를 하면 물도 오염되지 않고, 그릇에 남아도 인체에 별로 해롭지 않았어요. 그래서 맑고 향기롭게 회원들이 공장에서 한꺼번에 사서 쓰게 되었어요.” 폐식용유를 재활용하고 계면활성제를 크게 줄인 주방세제를 이르는 말씀이다. 요즘 맑고 향기롭게 회원들은 미생물 EM으로 설거지를 한다.

길상사가 생기고 나서 한해가 지난 1999년 정월, 강정옥 이사는 길상회가 길상사에 흡수된다는 편지를 회원들에게 띄우고 활동을 접는다.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는 회주 법정스님께서 짝 수 달 셋째 일요일에 정기법회를 이끌고 계십니다. 그런 까닭에, 따로 길상회 법회를 챙겨 주십사 부탁드리기가 너무 송구스러워, 길상회는 새해부터 길상사 전체 신도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동안 길상회가 맡아왔던 파리 길상사와 맑고 향기롭게 모임 후원은 앞으로 길상사가 이어갈 것입니다.” 강이 바다가 되는 새 장을 여는 말씀이다.

“그 전까지는 길상회 살림 보고를 스님께 드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류시화 시인이 <산에는 꽃이 피네> 가제본을 제게 보여주면서 편집이 어떠냐고 물어요. 선생님처럼 잘하는 분이 했으니 어련하시겠느냐고 답을 했는데, 그 말씀 끝에 류시화 시인이 ‘스님이 법장궁보살님 말이라면 다 들어주시잖아요.’ 이러는 거예요. 듣고 보니 스님을 도와드리는 일이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도 있구나싶어서, 스님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뒤로 길상사에 가면 바로 법당으로 들어가고, 스님께 따로 인사를 드리지 않았어요. 맑고 향기롭게 이사회 때도 회의 시간에 꼭 맞춰서 올라가곤 했어요.” 조심조심, 어른을 모시는 사람은 늘 조심스럽다. 강정옥 이사는 스님에게 편지 한 장, 글씨 한 자 받은 적이 없다. 스님께 번거로움을 끼치는 일은 가려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우리는 옛길을 따라 걷지만
길은 언제나 새 길이다

살림을 하는 전업주부인지라 가정사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딸만 다섯이나 낳았는데 첫 애가 한 돌 조금 지나고 먼저 갔어요. 그 때 인생무상을 깨달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저희 남편이 외동이에요. 외며느리가 딸만 줄줄이 낳고는 한 번도 울어본 적도 없이 미역국만 맛있다고 먹었으니 곁에서 보기 참 딱했을 거예요. 우리는 관습에 따라 그냥 엉겁결에 결혼을 했잖아요. 결혼관도 서 있지도 않고,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아무런 준비 없이 결혼을 하다 보니까 갈등 때문에 사는 재미가 없었어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남편이 외동아들이었는데도 딸만 낳아도 별 문제없이 넘어가고, 아이들이 시집을 가지 않아도 큰 흠이 되지 않으니 시대를 잘 만났다싶어요. 그런데다 불교를 믿고 보니까 애면글면 할 일이 없더라고요.” 남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살아온 여정을 그려내는 강정옥 이사, 선선하다.

“큰 아이를 앞세웠으니 넷이 남았는데 막내만 시집을 가서 남매를 낳아 키우고, 위로 셋은 결혼을 하지 않았어요. 여느 사람들은 절에 가서 인연기도를 하면 배우자가 나타난다면서 열심히 빌러 다니던데, 저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우리 아무개 결혼을 하게 해주세요.’하며 빌 생각이 한 번도 나질 않았어요. 나이가 들어서 생각해보니까 걔들이 시집을 가면 또 식솔이 딸리겠죠. 그러면 인연이 더 복잡해지잖아요. 어쩌면 제 마음 깊은 곳에서 결혼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지 않았나싶어요. 결혼을 해도 인생이고 하지 않아도 인생인데, 이 인생이든 저 인생이든, 살아볼만 하잖아요. 선택한 만큼 맹렬히 살면 되지. 틀에 얽매여 전전긍긍하면 낙오자나 마찬가지잖아요. 남들 눈치나 보면서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되지요. 얼마나 소중한 삶인데 낭비하면 되겠습니까. 어서어서 닦아가지고 곁에 있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해주고, 내 할 일 하고 가면 된다는 생각이에요. 부처님 가르침을 만났다는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눈물이 날 만큼 고맙지요. 지난날 철없을 때 했던 일들을 돌아보면 어떤 일은 부끄럽고 후회가 들기도 해요. 그러나 철이 없어서 한 일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 때는 그 때고. 값지게 주어진 소중한 오늘 이 순간을 맹렬히 살아야지요.” 법장궁法藏宮, 진리를 품은 궁궐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피카소가 남긴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내가 데생을 5분 만에 그려낸다고 하지. 그러나 내 손목이 5분 만에 데생을 완성하기까지, 60년이 넘도록 맹렬히 그렸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어.”

우리는 옛길을 따라 걷지만 길은 늘 새 길이다. 만물은 더불어 자라면서 서로 다치지 않고, 저마다 길을 가면서 갈등이나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작은 힘들은 수많은 시냇물처럼 흐르고, 큰 힘은 조용하고도 확고하게 제 길을 가며 한데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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