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상)

▲ 금산사 미륵전과 방등계단/ 사진 = 이승현 (시인ㆍ사진작가)

“여보님. 이번 주말에 절집기행 갈까요?”
“절집? 그런 말도 있어?”“그럼요. 네이버에서 검색 해 봐요. 국어사전에 ‘절을 집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명사라고 정의하고 있어요. 절집이란 말이 들어간 책 제목도 여러 권 있더라고요.”
“그래도 그렇지. 절이면 절이고 집이면 집이지, 절집은 좀 속된 표현 아닐까?”
“속되다기보다는 좀 더 정감 있는 표현 같아요. 절, 사찰, 사원 같은 말엔 왠지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느낌이 묻어 있잖아요.”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어차피 언어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니까. 그래, 이번 주말엔 어디로 갈 건데?”

지혜장은 주말 절집 기행의 목적지를 금산사로 정하고 책과 인터넷을 뒤지며 나름대로 공부를 했다. 남편 나팔수씨는 언제나 그렇듯 “마눌님이 알아서 하셔”하는 태도. 그렇지만 부부는 주말을 기다리며 열심히 한 주를 살았다.

토요일 새벽 5시, 부부는 간단한 여장을 챙기고 시동을 걸었다. 모질던 겨울 추위는 한발 물러서고 며칠 포근했는데 부부의 여행을 시샘하듯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그렇다고 계획을 접을 부부는 아니지만.

“금산사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안전운전 하시면 세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래? 난폭운전으론 두 시간이면 되겠군. 하하하.”

지혜장의 생각대로 세 시간여 만에 금산사에 도착했다. 해가 뜨지는 않았지만 모악산 줄기 너머에서 환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개울물은 아직 얼어 있고 음지에는 눈이 쌓여 있지만 꼼지락거리는 봄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부부는 찻길 옆에 만들어진 도보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금산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륵도량이야. 미륵부처님, 들어 봤지?”
“당근이지. 미래의 부처님 아냐? 미래의 혼탁한 세상을 구제하러 오시는 부처님 말이야. 그래서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나 천지개벽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미륵신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지. 궁예만 해도 스스로 미륵불이라고 자칭하면서 민심을 얻어 나라를 세웠었지. 그 기반 위에서 왕건이 고려를 세울 수 있었고. 근현대에 생긴 어느 신흥종교도 모악산과 금산사 그리고 미륵신앙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군.”
“와, 우리 여보님. 오늘은 예습을 좀 하셨나?”“이거야. 기본이지.”

미륵신앙은 말세관(末世觀)을 토대로 형성됐다. 선사시대의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면서 “요즘 애들 하는 짓 보면 말세는 말세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듯, 어느 시대나 그 시대가 가장 어렵고 말기적 징후를 보인다고 느끼는 풍조가 있다. 그러한 생각은 개인의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상적 조류(潮流)를 형성하고 종교나 문화 예술을 통해 표현되기도 한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염원은 현재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영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륵신앙은 희망의 신앙이고 미륵불은 희망의 부처님이다. 불교는 미륵불을 통해 미래 세계의 중생들이 구제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주요 경전은 ‘미륵삼부경’에 해당하는 <하생경> <상생경> <성불경>이며 이에는 50여 종의 경전이 포함되어 미륵신앙을 설명하고 있다.  

▲ 금산사 천왕문 / 사진 = 이승현 (시인ㆍ사진작가)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이후 56억만년이 지난 뒤에 염부제(閻浮提-우리가 살고 있는 중생계)에 하생하는데 이때의 염부제는 말법시대가 되어있다. 이 오탁(五濁)의 시대에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정법으로 민중을 다스려 세상을 평화롭고 온화하게 변화시킨다. 이 때 미륵불이 도솔천에서 하생하여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나 출가 수행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대표적인 도량이 된 이유는 뭐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된 ‘견훤성문’을 지나 ‘모악산 금산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 앞에 이르러 나팔수씨가 물었다.

“금산사는 8세기 중엽에 진표율사에 의해 크게 중건되었는데, 진표율사는 출가 후 철저한 참회 수행을 하여 지장보살과 미륵불에게 계를 받았어. 미륵불에게 계와 법을 이어 받은 진표율사의 영향으로 이곳이 미륵도량이 된 것이지. 미륵신앙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널리 퍼진 상태였고 신라하대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동안의 혼란기에는 더욱 많은 민중들이 숭앙하지 않았겠어?”

“아, 저기 안내판이 있네. 절의 역사는 한 번 읽고 들어가야지?” 

일주문 50미터 쯤 위에 절의 약도와 연혁이 적힌 안내각이 서 있었다.

금산사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어 신라 혜공왕 2년 진표율사가 금당에 미륵장육상을 모시고 도량을 중창하여 법상종을 열어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하여 유폐되었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문종 33년(1079) 혜덕왕사가 대사구, 봉천원, 광교원 등을 설치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조선 선조 25년 (1592) 임진왜란 당시에는 처영뇌묵 대사 등 일천여 승병들의 훈련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 후 정유재란 시 80여 동의 전각과 산내 암자가 왜군의 손에 의해 전소되는 비운을 격기도 하였다.

선조 34년(1601) 수문대사가 10여명의 도반들과 함께 35년간에 걸쳐 복원불사를 추진하여 대사구 지역만 일부 재건하였다. 이조 말엽에는 환성지안대사가 수많은 스님들이 운집한 가운데 화엄산림법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으며 용명 스님의 순교 등 수 많은 고승대덕 스님들이 주석하던 절이다.

한국불교의 정화와 중흥을 위해 진력하던 월주 화상이 1961년 주지로 부임한 후 도영 도법 등 도제들과 사부대중의 원력을 모아 대적광전, 미륵전, 대장전, 하서전, 방등계단, 삼성각, 적멸보궁 등을 중건 중수하고 보제루, 일주문, 상서전, 서래선원, 범종각, 종무소, 향적당, 보현당, 설법전, 만월당, 성보박물관, 적묵당, 나한전, 조사전 등을 새로 건립하여 대사구를 완전 복원하고 확장하였다.

1986년 원인 모를 화재로 대적광전이 소실되었으나 월주 화상의 원력으로 도제들과 사부대중의 협력을 받아 복원하였고 전주 시내에 전북불교회관을 건립하여 전북지역의 포교를 맡고 있는 호남 제일의 수도와 교화중심 도량으로 그 면모를 갖추어 미륵십선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연혁이 잘 정리 됐네요. 여보님 이제 금산사에 대한 이해가 좀 되셨나요?”
“글쎄올시다. 워낙 유석 깊은 절이라 하루 둘러보는 것으로는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 것 같네.”
“그래도 수박을 구경도 못하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금산사의 봄 풍경은 ‘호남4경’ 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거든.”

예로부터 손꼽아 온 호남4경이란 금산사의 봄 경치, 변산반도의 여름경치, 내장사의 가을단풍, 백양사의 겨울 설경을 말하는 것이다. 나팔수 씨는 봄 경치를 제대로 보려면 좀 더 있다가 왔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 보물 제 28호인 금산사 당간지주 /사진 = 이승현 (시인ㆍ사진작가)
부부는 개울을 따라 올라가다가 오른쪽의 돌다리를 건넜다. 이제 절의 중심인 대사구 안쪽으로 들어선 것이다. 가장 먼저 통과하는 문은 금강문(金剛門). 금강문 안의 왼쪽에는 코끼리 100마리보다 힘이 세다는 나라연금강이 칼을 치켜들고 입을 벌린 채 눈을 부라리고 있다. 한 손은 앞에 선 사람을 가리키고 있어 “너 까불지 마.” 하는 듯하다. 그 옆에는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절 안쪽을 향하고 있다.

오른쪽은 밀적금강이 오른손에 든 칼을 머리위로 들고 눈을 크게 뜨고 입은 굳게 다문 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옆에는 문수동자가 사자를 타고 앉아 있는데 매우 단정한 모습이다.

어느 절에서건 나라연금강은 공격 자세이고 밀적금강은 방어 자세다. 입을 벌리고 다문 것도 같다. 그것은 나라연이 처음을 밀적이 끝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 역사에 의해 발심과 회향이 함께 상징 되는 것이다.

천왕문과 당간지주(보물 제28호)를 살펴 본 부부는 보제루 아래를 통해 절의 중심인 대적광전과 미륵전의 앞마당에 올라섰다. ‘개산천사백주년기념관’이라는 커다란 현판이 걸린 보제루 앞에 올라선 부부는 자신들도 모르게 합장을 하고 정면의 대적광전을 행해 세 번 절을 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미륵전을 향해 세 번 절했다. 미륵전 뒤쪽 모악산 능선에서 찬란한 해살이 부챗살 모양으로 도량을 비추고 있다. 꿈결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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