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백 숲에서 내려다 본 선운사 경내 / 사진 = 이승현 (시인ㆍ사진작가)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은 아직 일러 피지 않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단군기원 사천 삼백 칠년
선운사 동구에서
미당 서정주 지어 씀

“보살님, 올해가 단기로 몇 년이지?”“글쎄요. 내가 알기로 올해는 서기 2011년, 단기 4344년, 불기 2555년인데.”

새벽 댓바람에 차를 달려 온 선운사. 부부도 동백꽃을 보고 싶어서 왔다. 미당처럼. 그러나 아직 일러 동백은 피지 않았다. 미당의 시처럼. 그렇지만 미당의 시에 등장하는 막걸리 집 여자는 없었다. 매표소 앞에서 검표하는 아저씨가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
도솔교에서 시작한 휠체어 길은 극락교 앞에서 끝이 났다. 도솔교에서 극락교까지.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만 같다. 극락교는 쌍홍예교로 최근에 만들어졌다. 길이가 22미터인 극락교 앞에는 작은 돌 판에 ‘보왕삼매론’의 구절을 적어 두었다. 나팔수씨가 두 구절을 소리 내어 읽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살이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결핍이 약이 되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게 풍족하게 갖춰지면 타락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보왕삼매론’은 다소의 결핍을 약으로 삼아 잘사는 길을 제시하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극락교를 건너면 곧바로 천왕문. 선운사 중심공간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다. 왼쪽 벽에는 선운사의 역사가 오른쪽 벽에는 천왕문의 내력이 적혀 있다.

도솔산 선운사의 역사
백제 27대 위덕왕 24년(5477)에 검단(儉旦) 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한 뒤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효정 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였다. 1474년(성종5)에 행호극유(幸浩克乳) 스님이 성종의 숙부 덕원군(德源君)의 도움으로 이후 10여년에 결친 중창불사를 진행하여 선운사는 옛 모습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1597년의 정유재란 때 어실(御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어 버렸고 1613년(광해군 5년) 일관(一寬) 스님과 원준(元俊) 스님이 주축이 되어 불사가 진행된 이후로 중수와 중건이 계속되어 1713년에 이르러서는 외형적인 불사는 완성을 보게 되었다.
조선 후기 화엄학의 종주(宗主) 설파상언(雪坡尙彦) 스님과 선문(禪門)의 중흥조 백파긍선(白坡亘旋), 구한말의 청정율사 환응탄영(幻應坦渶), 근대 불교의 선구자 영호정호(暎湖鼎鎬, 박한영) 스님 등이 선운사에서 수행하시면서 당대의 불교를 이끌어 온 명문사찰이다. 선운사 경내 및 산내암자인 참당암, 도솔암에는 보물 5점 및 중요문화재 11여 점이 보존되어 있으며 경내의 동백나무 숲, 장사송, 송악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선운사 천왕문과 도솔암으로 가는 길/ 사진 = 이승현 (시인ㆍ사진작가)

천왕문은 1624년(인조2)에 처음 지어졌고 지금의 문은 1970년에 중수 한 것이다. 천왕문 안은 여느 사찰과 비슷하게 4천왕을 모셨다. 우락부락한 얼굴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짓궂은 것 같기도 했다. 특히 사천왕의 발아래 밟힌 악귀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익살스러워 두려움과 공포의 상징인 사천왕을 중생들과 친하게 하려한 의도가 엿보였다. 천왕문은 2층 구조인데 위층은 종각을 대신해 쓰다가 지금은 비워두었다.

천왕문을 지나면 최근에 세운 석등 뒤로 만세루가 버티고 서 있다. 누각의 아래를 통해 대웅보전 앞으로 이르는 것이 보통인데 선운사 만세루는 단층으로 지어져 좌우로 돌아서 대웅보전으로 가야 했다. 정갈한 탁자에 다구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 만세루 마루에는 아침 햇살이 비껴들어 맑은 운치를 더했다.
대웅보전 앞에 서 있는 6층 석탑(전북유형문화재 제29호). 원래 9층이었다. 3개 층이 유실되었지만 6층으로도 자연스러웠다. 부부는 대웅보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았다.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것이 존경과 귀의를 표하는 중요한 의식이었대. 고대인도의 의식인데 불교교단에서도 받아들인 것이지. 그런 의식이 탑돌이로 확대되었고 이렇게 불상이나 법당을 도는 의식으로 전해지고 있는 거야.”

보물 제290호인 대웅보전은 1613년(광해군 5)에 세워진 건물이다. 400년이 가까운 세월의 흔적은 군살을 털어 내 버린 목재와 빛바랜 단청이 말해주고 있다. 부부는 굵은 기둥의 나뭇결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오래된 목재의 나뭇결은 아스라한 추억 같은 파동으로 다가온다. 지붕을 떠받치고 묵묵히 견뎌온 시간들이 한 올 한 올 역사로 새겨져 있어 귀를 대면 무수한 이야기들이 메아리쳐 올 것만 같다.

앞쪽의 문들은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듯 닫혀 있었다. 왼쪽의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보살님 한 분이 불단을 청소하고 있었다. 높은 불벽(佛壁)을 세우고 불단이 조성되었는데, 세 분의 큼직한 부처님들이 세 칸으로 나눠진 후불탱화 앞에 허리를 꼿꼿하게 편 자세로 모셔져 있다. 

가운데 본존으로 모셔진 불상은 비로자나불, 왼쪽은 아미타불, 오른쪽은 약사여래다. 뒤의 불화도 가운데는 비로자나불회도이고 왼쪽은 아미타불회도 오른쪽은 약사불회도가 고색창연하게 펼쳐져 있다. 원래 대웅보전이라는 당호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하고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협시로 하는데, 선운사는 석가모니불상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상이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불이 본존으로 모셔질 경우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협시로 모시고 ‘대적광전’ 혹은 ‘대광명전’이라 부른다. 각 불회도 위에는 가로로 길쭉한 편액에 범자(梵字)가 쓰여 있다. 천정과 들보에는 빈틈이 없이 단청과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살짝 빛이 바래 무상감을 주었다. 이 또한 세월의 증표다.

▲ 잘 정비된 선운사 부도밭 / 사진 = 이승현 (시인ㆍ사진작가)

부부는 삼배를 하고 법당 안에서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았다. 출입구 쪽 벽에 고색의 신중탱화가 한 점 모셔져 있다. 1807년(순조 7)에 그린 불화로 선운사에 남아 있는 불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와, 여기도 멋진 벽화가 있네.”

불벽 뒤쪽의 커다란 관음보살도 앞에서 부부는 감탄사를 감출 수 없었다. 마치 누가 몰래 숨겨둔 보물을 찾은 듯 한 기쁨이었다. 일렁이는 파도에서 세 줄기의 연꽃이 솟아오르고 넓은 연잎 위에 관음보살이 팔을 늘어뜨리고 앉은 자세의 수월관음도가 주는 인상이 매우 자비스러웠다. 좌우에는 무기를 들고 역동적인 포즈를 취한 인왕상이 그려져 있다. 관음보살의 자비행을 옹호하는 의미일 것이다. 부부는 약속이라도 한 듯 수월관음도 앞에서 허리를 깊이 숙이고 합장반배를 했다.

대웅보전 뒤에 조성된 동백나무 숲은 아직 동백이 피지 않아 허전해 보였다. 그러나 지금 나무들은 꽃망울을 터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물을 뿜어 올리고 한낮의 온기를 몸통으로 끌어 들이며 가지 끝에 맺힌 망울들마다 온기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동백 숲에서는 뿌연 안개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부부는 대웅보전 옆의 영산전과 명부전, 조사전, 팔상전, 산신당, 관음전을 차례로 둘러보고 부도밭으로 향했다. 선운사 부도밭은 근래에 정비를 했다. 사방에 얕은 담을 두르고 중앙에 배알문을 세웠다. 부도밭에는 조선후기 이후 선운사에서 수행한 스님들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와, 이것 좀 봐. 추가 김정희 선생이 비문을 짓고 글씨도 썼네. 그러니까 이게 추사체라는 거잖아?”나팔수씨가 중앙에 있는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의 뒷면에서 ‘완당학사 김정희 찬병서’라는 글씨를 발견하고 감격스럽게 소리쳤다. 비석의 원형은 마모가 되어 성보박물관에 모셔져 있고 지금 부도밭에는 모조품을 세웠다는 안내판이 비 앞에 놓여 있다.

조선후기 한국불교를 뜨겁게 달궜던 논쟁이 있었다. 백파긍선(1767~1852) 스님과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草衣 1786~1866) 스님이 선사상에 대한 다른 견해로 격돌한 것이다. 그 논쟁에 추사 김정희도 뛰어들어 백파 스님에게 이견을 피력했고 백파 스님은 조목조목 편지를 보내 반박했다. 논쟁은 다시 제자들에게로 이어졌다. 선사상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던 추사가 백파 스님 입적 6년 뒤에 비문을 짓고 써서 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대가들의 큰 행보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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