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도솔암

▲ 도솔암 마애불은 민중들의 온갖 염원이 담긴 의지처다/ 사진 = 이승현(시인ㆍ사진작가)

선운사 앞을 흐르는 계곡은 안쪽으로 갈수록 더 맑고 정감이 가는 물길이다. 우리나라 3대 지장도량 가운데 하나인 도솔암. 워낙 유명한 기도도량이지만 사진으로만 보았던 마애불상을 꼭 친견하고 싶었던 나팔수씨. 맑은 계곡을 감상하며 아내와 함께 봄기운이 솟아오르는 산길을 걷는 것도 행복했다.

“여보님. 생각보다 계곡길이 편안하죠?”

“그러게. 가파른 산길이 나올까 걱정되지만 아직은 좋은데?”“걱정 안하셔도 돼. 계속 이렇게 좋은 길이니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걸이. 두 다리로 산길을 걷는 것도 따지고 보면 흔한 일이 아니다.

반시간 정도 걸었을까? 길 오른쪽 커다란 암벽에 입을 쩍 벌린 동굴 하나가 보였다. 신라의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 왕비와 중애 공주를 데리고 와서 수행을 했다는 동굴이다. 특별한 시설물을 설치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동굴이다. 안내판에 진흥굴은 길이 10m, 높이 4m라고 적혀 있다. 굴 안쪽 끝까지 들어간 나팔수씨가 ‘아!’ 하고 소리 지르니 ‘아’ 하고 목소리가 울렸다.

“진흥왕이 살았던 시대는 신라와 백제가 군사적으로 엄청 긴장 상태였을 텐데 진흥왕이 백제 땅 깊숙한 곳에 와서 수행을 하고 선운사를 세웠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네.”

“선운사는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전설도 있고 백제의 검단 선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어. 검단 선사 창건설은 달마산 미황사 창건설화처럼 바다에 이상한 배가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야.”

진흥굴 앞에 서 있는 장사송(長沙松; 천연기념물 제354호)은 높이가 23m에 이르며 나이는 600살 정도다. 지혜장은 우람한 소나무 아래에서 검단 선사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원래 선운사 터는 못이었는데 검단 선사가 못에 사는 용들을 몰아내고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양산 통도사 창건설화와 닮았고, 도둑들을 교화시킨 부분은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 이야기와 비슷하다. 검단 선사가 교화한 도둑들에게 소금 제조법을 가르쳐 주어 생계를 잇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인근 주민들이 선운사에 보은염(報恩鹽)을 바치는 풍습으로 지속돼 왔고 마을 이름이 검단리인 점도 설화의 사실성을 입증하고 있다“나는 도솔암이라는 이름 자체에도 뭔가 염원이 담긴 것 같아. 도솔천도 극락 같은 곳이야?”

 

▲ 도솔천내원궁.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위치해 신비한 영험을 느끼게 한다 / 사진= 이승현(시인ㆍ사진작가)

도솔천은 다소 복잡한 불교의 우주관과 함께 설명해야 한다. 우선 욕망이 들끓는 욕계(欲界), 욕망을 떠났지만 물질적 집착이 남아 있는 색계(色界), 물질의 지배를 벗어난 정신의 세계인 무색계(無色界)를 삼계라 한다. 삼계는 28개의 하늘(天)로 켜켜이 펼쳐져 있고 욕계의 맨 아래 지하에는 8개의 지옥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그 지옥 위에 놓인 4대주(四大洲) 가운데 하나인 남섬부주(南贍部洲)다.

사대주 위에 욕계에 딸린 6개의 하늘이 있는데 그 4번째가 도솔천이다. 맨 아래로부터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은 욕정에 잠겨 있고 4번째가 도솔천이다. 그 위의 화락천과 타화자재천은 들뜬 마음이 많은 곳이다. 도솔천은 5욕락에 만족한 마음을 내는 곳이므로 미륵 등의 보처보살이 머문다. 보처보살이란 다음 생에는 성불을 할 보살을 뜻한다.

 

“드디어 도착!”

한 시간 가량 걸었지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앞 산 봉우리가 그윽한 계곡을 따라 영원으로 이르는 듯 하고 오른쪽 암봉은 인간 세상과 하늘을 이어주는 계단처럼 느껴졌다. 도솔천에 대한 신비한 상념을 품고 올라온 탓인지 도솔암은 정말 사람의 세상이 아닌 것 같았다.

부부는 극락보전에 들어가 삼배를 올렸다. 땡그랑 땡그랑 풍경소리가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극락보전 뒤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나한전(전북문화재자료 제110호)이 있고 그 옆 깎아지른 암벽에 마래불좌상(보물 제1200호)이 있다.

나한전 뒤 불끈 솟구친 암벽 위에 있는 도솔암 내원궁(전북문화재자료 제125호)은 그야말로 도솔천의 내원궁인양 신비로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내원궁에는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보물 제280호로 지정돼 있다. 나팔수씨가 안내문을 읽었다.

 

선운사 지장보살좌상

고려후기의 불상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불상은 사후세계의 주존인 지장보살을 조각한 것이다. 크기나 형태는 대웅전에 모신 보살상과 비슷하지만 조각수법은 훨씬 사실적이다. 균형 잡힌 얼굴은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인상을 주며 어깨의 곡선도 부드럽게 처리돼 유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승형(僧形)으로 표현되는 일반적인 지장보살과는 달리 두건을 쓰고 있는 점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던 형식이다.

 

부부는 ‘도솔천내원궁’이라는 현판이 걸린 작은 문을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밟으면서 올라갔다. 좁고 가파른 계단은 정말 하늘로 올라가는 길인 듯했다. 이 길을 다 올라가면 인간의 탐욕과 고뇌가 없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인가?

계단의 끝은 정말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그마한 법당에도 ‘도솔천내원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는 단정한 지장보살상과 연등, 후불탱 등으로 장엄돼 있다. 몇 사람이 열심히 절을 하고 있어 부부는 뒤쪽의 산신각을 먼저 참배했다. 산신각 옆의 바위에 동전을 잔뜩 붙여 놓았다. 부부도 동전을 붙이며 소원을 빌고 싶었지만 주머니에 동전이 없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나요?”

내원궁 지장보살님께 조용히 절을 올리고 나와서 지혜장이 물었고 나팔수씨는 “잘 살다가 잘 죽게 해달라고 빌었지”라고 짧게 답했다. 지혜장은 피식 웃었지만 그거보다 더 큰 소원이 또 있을까 싶기도 했다. 올라갔던 계단을 다시 내려와 마애불 앞으로 가는 동안에도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고려시대에 조성된 내원궁의 지장보살상/ 사진= 이승현(시인ㆍ사진작가)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고려시대에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마애불 중의 하나로 미륵불로 추정된다. 지상 3.3m의 높이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불상의 높이는 15.6m, 폭이 8.48m가 되며, 연꽃무늬를 새긴 계단 모양의 받침돌까지 갖췄다. 머리 위의 구멍은 동불암이라는 누각의 기둥을 세웠던 곳이다. 명치끝에는 검단 선사가 쓴 비결록을 넣었다는 감실이 있다. 조선말에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이서구가 감실을 열자 갑자기 폭우와 뇌성이 일어 그대로 닫았는데, 책 첫머리에 “전라도 감사 이서구가 열어 본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고 전한다. 이 비결록은 19세기 말 동학의 접주 손화중이 가져갔다고 한다.

 

“검단 선사는 백제 시대의 스님이라고 했는데 이 불상은 고려시대 조성됐다고 하고, 또 감실에 비결록을 넣은 것이 검단 선사라고 하니 도대체 어느 말이 맞는 건지 모르겠네. 아무튼 그럼 저기 명치끝에 비결록은 안 들어 있겠네?”

나팔수씨가 사각형의 구멍을 때운 흔적이 역력한 불상의 명치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결이란 것은 그야말로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함부로 볼 수 없는 것이고 보여 지지도 않는 것이지. 그렇게 보여 지지 않을 때 비결이 진짜 비결이 되는 거야. 비결이 있고 없고의 문제보다는 그 비결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기를 바라는지 시대마다 간절한 염원이 있다는 것이지. 우리도 마음 비우고 욕심 다 버리면 행복의 비결을 읽을 수 잇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 비결은 누구에게나 있는 불성일 테니까.”

이서구가 꺼냈다가 얼른 다시 넣어 둔 비결을 보려는 시도는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 두려운 마음에 감히 실행하지 못했다. 손화중(1861~1895)이 1892년에 이 비결을 꺼냈는데, 당시 민간에는 그 비결이 공개되는 때 조선이 망한다는 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조선말기의 민중들이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이 비결에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불상의 머리위로 나 있는 세 개의 사각형 구멍은 옛날 기둥을 꽂았던 자리다. 지붕이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그 구멍 속에 다람쥐가 살고 산새가 산다. 부처님의 도량은 생명을 살리는 곳이다. 불보살님 그 자체가 무량한 생명력이기에 힘겨운 민초들은 그 힘에 의지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지금도 비결록이 있다면 거기 뭐가 적혀 있길 바라시나요?”

도솔암을 뒤로하고 내려가는 길에 지혜장이 물었다. 남편은 주저하지 않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어딜 파면 석유가 펑펑 솟아나는지, 그 포인트가 적혀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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