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禪畵)와 총림의 정원(庭園)

선화(禪畵), 선미술

‘선화(禪畵)’는 선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술적 기법을 통해 진리의 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선미술(禪美術, Zen Art)’ ‘선종(禪宗) 미술’이라고도 한다.

선화는 선(禪)이 모태가 된다. 선화에는 몇 가지가 있다. 선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 선문답의 내용을 담은 공안화(公案畵), 보리달마 등 선승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깨달음의 경지를 묘사한 것 등이 있다.

한편으로는 그 영역과 장르가 애매모호한 것이 또한 선화의 세계이다. 단정적으로 어떤 것을 ‘선화’라고 말 할 수 없지만, 넓은 의미에서 선(禪)과 관련된 것이라면 다 선화라고 할 수 있다. 화단에도 선화가 있지만 딱히 한 장르로 정착돼 있지는 않은 듯하다. 특히 요즘에는 그냥 묵(墨)으로 객기(客氣)처럼 휘둘러 놓고서, 그것을 ‘선화(禪畵)’라고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선이 대중에게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아무 곳에나 갖다 붙인다고 해서 그것이 선문화나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선화의 종류는 선의 초조인 보리달마의 모습을 그린 ‘달마상’, 이조(二祖) 혜가(慧可)의 구도심을 담은 ‘설중단비도(雪中斷臂圖)’, 한산(寒山)과 습득(習得)의 기행을 그린 ‘한산습득도’,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 달마가 갈대를 타고서 중국으로 건너왔다는 ‘달마절로도강도(折蘆渡江圖)’, 여산 혜원의 ‘호계삼소(虎溪三笑)’, ‘포대화상도’ 그리고 육조혜능이 행자 때 8개월 동안 디딜방아를 찧었다는 그림 등이 있다.

선미술은 균제(均齊)의 미(美)를 깨뜨린 불균제의 미(美)를 특질로 한다. ‘졸(拙)의 미(美)’라고도 할 수 있다. 굵은 선(線)으로 한 번에 그려버린 듯한 보리달마의 모습이나 기이한 모습의 ‘한산습득도’ , ‘호계삼소(虎溪三笑)’ 같은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균제’란 미완의 뜻이 아니고, 정형성을 깨뜨린 그러나 군더더기 없는 ‘완전의 미(美)’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선화의 핵심은 탈속(脫俗)에 있다. 탈속한 맛이 없다면 선화, 선미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마음 내키는 대로 휘두른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높은 미술적 기법을 가진 작가가 그 미술적 기법에 구애됨 없이 언어문자로 표현된 선의 세계, 선의 경지를 그렸을 때 비로소 선화가 된다. 번뇌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해탈의 경지를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화가 자신이 선심(禪心)이 되지 않고서는 어렵다.

선미술의 색채는 단순 소박해야 한다. 화려함을 절제하고 수묵(水墨) 하나로 그려야 한다. 수묵은 그 성질 자체가 마음을 청정하게 하지만 농염(濃艶)은 번뇌를 점점 증식시킨다. 선화에는 공간의 여백이 많아야 한다. 꽉 채우는 것은 욕망으로서 세속의 그림이다. 그것은 공(空)이 아니며, 무소유, 무집착이 아니다. 단순함은 심신(心身)이 탈각된 상태, 그것이 곧 선이 추구하는 목표이다. 선화는 단순하지만 힘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화의 생명이기도 하다.

<벽암록>에 등장하는 달마의 확연무성(廓然無聖), 마조도일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평상심이 바로 진리), 운문의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 조주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 앞의 잣나무), 방 거사의 호설편편(好雪片片; 내리는 눈, 조각조각 아름답구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구지화상의 한 손가락[俱地一指], 경청우적(鏡淸雨滴; 경청화상, 창밖의 빗소리를 듣다) 등 이런 공안을 선화로 표현한다면 선미술의 세계는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선화의 시조는 왕유(王維; 701~761)이다. 왕유는 성당(盛唐)의 시인으로서 ‘시불(詩佛)’이라고 불렸다. 북송(北宋)의 시인 소동파(蘇東坡)는 왕유의 시를 일컬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표현했다. 지금은 없어져 전하지 않지만 왕유가 그린 설중파초(雪中芭蕉; 눈 속의 파초)는 선화의 문을 연 명작이라고 한다. 파초는 비가 오는 여름이 돼야 잎이 무성하게 피는데, 한 겨울 ‘눈 속의 파초[雪中芭蕉]’란 논리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는데, 불가사의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고, 언설(言說)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곧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 선의 경지를 말한다. 17세기의 화가이자 문인인 동기창(董基昌)은 그의 화론(畵論)에서 왕유를 남종화(南宗畵)의 시조로 규정했다.

 

선종사원의 정원

 

우리나라 선원이나 사찰의 정원 가운데는 딱히 ‘사원 정원(庭園)’이라 부를만한 것은 없다. 봉암사 등 이름 있는 선원도 마찬가지지만,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등 총림도 정원이라고는 도량에 불두화(佛頭花) 등 꽃나무 몇 그루 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주변의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서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서 정원이 가장 잘 조성돼 있는 곳을 들라면 주저할 것도 없이 황악산 직지사일 것이다. 직지사 정원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서도 보기 드문 정원이다. 특색은 산지가람(山地伽藍)인데도 도량 한 가운데로 비스듬하게 물길을 만들어 물을 끌어 들인 점이다. 물은 제법 맑은 소리를 내면서 대웅전 마당 앞을 지나 그 아래 절 입구까지 이어진다. 가히 일품으로 소동파(蘇東坡; 1036~1101)의 시(詩)를 연상케 한다.

 

계곡의 물소리는 드넓은 부처님의 말씀(溪聲便是廣場舌)

산색(山色)은 그대로 청정한 법신(山色豈非淸淨身).

 

직지사 도량은 전체가 하나의 자연스러운 정원이다. 초창기에는 인위가 가해졌겠지만, 지금은 오래돼 인위적인 자취는 사라지고 나무 한 그루, 돌 하나도 그대로 주위의 자연과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 있다. 특히 세속적이지 않아서 산사(山寺) 정원으로서는 모델이 될 만도 하다. 직지사 주승(住僧)의 마음이 선심(禪心)과 같아서가 아닐까?

선종사원의 정원이 유명하기로는 단연 일본이다.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임제종 대본산 톈류지(天龍寺)와 료안지(竜安寺), 킨가쿠지(金閣寺), 다이토쿠지(大德寺) 등 선종사원의 정원은 말 그대로 지상에서 선계(禪界)를 드러내고 있다. 한번 들어가면 영영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을 듯하다. 특히 ‘카레산스이(枯山水; 마른 산수)’라고 하여, 돌과 모래로만 산수(山水)를 표현한 석정(石庭)은 일본 선종사원에서만 볼 수 있는 특색이다. ‘석정’이란 ‘돌 정원’이라는 뜻으로 써래로 모래를 손질해 흐르는 물결을 표현하고 수목이나 바위로 섬이나 산을 표현해 고요와 자연을 나타낸다.

그 가운데서도 톈류지(天龍寺)의 방장(方丈) 정원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료안지(竜安寺) 석정(石庭), 고야산 고곤부지(金剛峰寺) 석정 그리고 다이토쿠지(大德寺) 석정은 모래와 돌로 산수를 표현한 카레산스이(枯山水) 석정(石庭)의 최고봉이다. 석정은 적적(寂寂)을 목적으로 하는 선(禪)과도 일치한다. 비록 극락은 아니지만 선승이 머물기에 이보다 아름다운 곳이 다시 또 있을까?

중국 선종사원 가운데 정원이 뛰어 나기로는 항주 영은사(靈隱寺)가 있다. 영은사 정원은 남송 때부터 이름이 나 있는데, 범위가 넓고 서호(西湖)를 끼고 있어서 지금도 항주 사람들의 안식처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동양 3국의 사찰정원을 비교한다면 중국과 한국은 자연적이고, 일본은 인위적이다. 그러나 인위적이라고 해서 격하시킬 것은 아니다. 일본 사람들은 인위적으로라도 정원을 만들어 선의 세계를 표현하고 감상하는 것을 선호했고, 중국과 한국 사람들은 자연적인 것을 더 선호했을 뿐이다.

선종사원의 정원은 중국이나 한국보다는 일본에서 크게 발달했다. 그러나 그 원류는 중국 선종사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국은 이미 고대부터 드넓은 천자의 궁(宮)에 정원을 만들어 산수(山水)를 향유했는데, 송대에 이르러 선불교가 크게 발전하면서 선종사원에서도 경내(境內)에 정원을 조영(造營)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은 아니다. “전국의 명승지는 모두 명찰이 차지하고 있다”는 중국의 옛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원은 주로 명승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항주 서호 주변에 있는 영은사와 정자사 경관이 이름 있고, 영파에 있는 천동사 경관도 손가락에 꼽힌다. 천동사는 ‘천동10경(天童十景)’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남송시대 5산 10찰을 포함한 선원총림의 정원은 매우 아름다워서 문인(文人), 명사(名士)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들이 선종사원을 찾은 것은 정원 속에 선(禪)과 시(詩)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예로 남송의 첫 황제였던 고종(高宗)은 1127~1161년까지 무려 34년 동안 재위했는데, 퇴위 후에는 5산 가운데 하나인 항주 영은사(靈隱寺) 경내의 냉천정(冷泉亭)에서 여생을 보냈다.

“문을 열고 나가면 산수가 다가오고[出門見山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불전이 보였으니[入門見佛殿]” 선원총림은 그 자체가 그대로 극락세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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