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

▲ 대흥사 내경. 대흥사는 선과 교학 분야에서 많은 스님을 배출했다.

마음과 말씀은 둘이 아니다

새벽 5시.
부부는 해남 대흥사 일주문 옆에 도착했다.
최근에 새로 세운 듯 산뜻한 일주문 앞쪽에는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라는 현판이 걸렸고 뒤쪽에는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언제 들으니까 이 절 이름이 대둔사(大芚寺)라고 했던 것 같은데?”
“원래 이름이 대둔사였다가 대흥사로 바뀌었어. 근래 다시 대둔사란 옛 이름으로 부르다가 최근엔 다시 대흥사로 부르고 있어. 산 이름이 대둔산이었다가 두륜산으로 바뀐 것에 따라 그렇게 된 것 같아.”
“뒤의 현판은 무슨 뜻일까?”

선림교해만화도량. 대흥사는 선과 교학 분야에서 큰스님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선림은 참선도량이란 뜻이고 교해는 가르침의 바다 즉, 교학도량이란 뜻이니까, 선교가 함께 활짝 핀 도량이란 점을 일주문에 현판을 걸어 강하게 어필하는 것이다.

“아침부터 머리가 깨지겠군. 이렇게 날것을 채워 넣으려니….”

대흥사의 가치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은 부도밭 옆에서 바로 입증됐다. 부도밭 오른쪽에 길쭉한 돌기둥 하나가 서 있었고 ‘십삼대강사도량(十三大講師道場)’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13명의 대강사가 배출된 도량이란 표시가 있네요. 강사는 경전을 가르치는 스님이란 뜻이거든. 교수님 말이야.”

“그럼 대선사가 배출된 도량이라는 표시도 있어야지.”
“글쎄, 이 근처엔 없는 것 같은데 있으면 만나게 되겠지. 여보님, 부도밭에 들어가 볼까?”

장방형의 낮은 돌담 안은 정갈하게 도열한 부도와 탑비들로 가득했다. 중앙의 작은 문에는  ‘진화문(眞化門)’이란 현판이 달려 있다. 좌우에 안내판이 서 있는데, 오른쪽의 ‘대흥사 서산대사부도 보물 제1347호’라는 글자가 나팔수 씨의 눈을 확 잡아 당겼다.

“서산 대사! 그 유명한 서산 대사님의 부도가 여기 있다는 거야?”
“대흥사는 서산 대사의 유품과 정신이 간직돼 전해지는 곳이야. 대흥사 안에 서산 대사를 기리는 사당도 있고 박물관에는 여러 유품들도 있다고 하니까 오늘 다 볼 수 있을 거야.”

대흥사는 원래부터 이렇게 큰 절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 서산 대사가 이곳에 유품을 보관하라고 유언하면서 주목받았고, 후계자들이 오랜 세월 절을 확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이름이 그때부터 크게 흥하게 됐다는 의미로 대둔사에서 대흥사로 바뀐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럴 듯한 말이다.

“부도밭 정말 멋있다.”

대흥사 부도밭은 사찰 답사자들이나 사진작가들에게 손꼽히는 ‘명당’이다. 그윽한 숲속에 위치해 있고 고만고만한 키의 부도와 탑비들이 조밀하게 들어차 있을 뿐 아니라 서산 대사와 초의 선사 같은 유명한 스님의 부도와 탑비가 있기 때문이다. 부도들의 모양새도 화려하고 웅장하기보다는 단출하고 소박하다. 귀부라고 부르는 받침돌도 자연석을 아주 투박하게 다듬거나 그대로 사용해 무소유의 승가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부부는 부도밭을 지나 절로 향했다. 곧바로 다리가 나왔다. 반야교였다. 대흥사 초입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길은 굽이굽이 계곡을 건너게 돼있다. 아홉 굽이를 돌아 아홉 개의 다리를 건너 대웅전 앞에 이른다. 반야교는 여덟 번 째 다리다.

“저기 있다.”

반야교를 건너 20m쯤 가다가 나팔수씨가 오른쪽 바위 위에 우뚝 서 있는 돌기둥을 발견했다. ‘십삼대종사도량(十三大宗師道場)’이라고 적혀 있었다. 과연 대흥사는 서산 대사 이후 13명의 대강사와 대종사를 배출한 선교불이(禪敎不二)의 명문도량임을 두 개의 돌기둥이 당당하게 외치고 있었다.

서산 대사는 임진왜란을 맞아 승병을 이끄는 선봉장이었지만 사실 당대를 대표하는 고승이었다. 특히 선과 교를 둘로 나누는 선교양종을 통합해 단일불교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이미 고려시대 보조지눌 국사로부터 이어져왔다. 서산 대사가 자신이 지은 <선가귀감>에서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라고 한 것은 그의 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말씀이다. 그러한 고승이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면서 “나의 의발(衣鉢)을 두륜산에 두라”고 유언했다.

북쪽 끝의 절에서 남쪽 끝의 절을 지목한 이유는 두륜산의 자연조건과 지리적 여건을 볼 때 충분히 ‘종통(宗統)의 소귀처(所歸處)’가 될 것으로 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통의 소귀처란 불교의 법통이 의지할 수 있는 곳, 다시 말해 불교가 면면히 이어져 갈 곳이란 뜻이다.

서산 대사의 유언에 따라 제자들은 스승의 금란사가와 발우를 대흥사에 모셨고 그 뒤로 선과 교를 가리지 않고 훌륭한 법손들이 배출됐다. 그 대표적 강사와 선사가 각각 13명이다.

▲ 대흥사 부도밭

법의 공간에 흐르는 시간을 만지다

절 마당에 이정표가 있었다. 왼쪽은 대웅보전과 백설당, 응진전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동국선원 성보박물관 천불전 표충사로 가는 길이다. 부부는 왼쪽 길을 따라 대웅보전으로 향했다. 다시 계곡을 건넜는데 계곡의 이름이 금당천이다. 다리는 심진교(尋眞橋), 큰 다리는 아니지만 진리를 찾아가는 다리다. 다리 끝에 서 있는 누각, 침계루(枕溪樓)라는 현판글씨가 현란하다.

“계곡을 베고 잠든다는 뜻인가? 글씨가 비몽사몽간에 쓴 것 같아.”

대웅보전은 방금 일어나 세수를 하고 서 있는 것 같이 화사했다. 100여 년 전 장대석으로 쌓은 석축 위에 덩그러니 지어진 대웅전을 가운데 돌계단으로 올라갔다. 정면 중앙에 두 줄로 쓴 대웅보전이란 현판 좌우로 용두가 두 마리씩 튀어 나와 있었다.

현판 글씨는 조선 후기 영조 때 양명학자이자 서예가로 이름 높았던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솜씨다. 그의 글씨는 상당한 수준이었는데 당시에는 추사에게 밀려 그다지 빛을 못 봤다고 전한다.

대흥사는 시간을 초월한 서예전시장이다. 추사(秋史)의 무량수각(无量壽閣), 이광사(李匡師)의 침계류(枕溪樓)와 대웅보전(大雄寶殿), 이삼만(李三晩)의 가허루(駕虛樓),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두륜산대둔사(대흥사), 김돈희(金敦熙)의 용화당(龍華堂), 강암(剛菴) 송성용(宋成庸)의 일주문(-柱門)등의 현판(懸板) 또한 돋보인다. 거기에 정조의 어필인 표충사(表忠祠)와 추사의 제자 신관호(申觀浩)의 ‘어서각(御書閣)’까지.

▲ 초의선사 좌상

천불 속의 나, 나 속의 천불 찾기

가허루(駕虛樓).

허공을 가마 삼아 탄다는 말인가? 허공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니 허공을 탄다는 것은 타는 사람도 없다는 뜻일까? 가마도 허공도 사람도 없는 것, 누각의 이름이 공(空)의 실상을 말하려는 것이라면 누각은 무엇 하려고 지었단 말인가?

지혜장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팔수씨는 천불전 앞마당에 당도했다. 앞의 천불전, 뒤의 가허루 그리고 오른쪽의 용화당과 왼쪽의 봉향각. 그렇게 사방이 건물로 짜인 마당에 서서 천불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불전을 조성한 이유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천의 부처님이 계신다는 의미에서 출발해. 어느 때 어느 곳에나 부처님이 계신다는 거야. 1000이란 숫자는 많다는 것을 상징하는 거지. 그러니까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부처님이 두루 계시는 곳이 우리 중생계라는 믿음, 그 천불에 여보님도 나도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이 천분 가운데 나와 마눌님이 있다는 거야?”“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천불 속의 나와 나 속의 천불 찾기, 그것이 정진하는 삶이겠지요?”

천불전이나 삼천불전에 들어섰을 때 제일 처음 눈이 마주친 부처님이 자기의 부처님이라는 설이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는 순간 새벽하늘의 샛별과 눈을 맞춘 것처럼 그렇게 밝게 다가오는 부처님과의 눈 맞춤이라면 오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천불전을 나와 왼쪽으로 길을 잡으니 작은 연못이 나왔다. 무염지(無染池)다. 초의 스님이 조성했다는 연못에는 노랑어리연꽃이 만발해 있었다. 연못 앞의 동다실(東茶室)은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지만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무염지 뒤쪽이 서산 대사 유물전시관인데, 시멘트 건물을 허물고 새롭게 성보박물관을 건립 중이었다. 옆에는 초의 스님이 긴 지팡이를 어깨에 걸치고 앉아 있는 모습의 조형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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