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장학생으로 다음 생에 더 좋은 공부 하렵니다

▲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다행히 이창숙 박사(72)는 그 사건 뒤로 일을 가려서 했기 때문에 사찰을 덜 받았기에 자료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옛날에는 회람을 등사판에다 밀었잖아요. 74년에 일어난 일이니까, 2005년엔 이미 30년이 넘었잖아요. 한꺼번에 묶어서 책장에 넣어뒀던 걸 꺼내니까, 종이가 바스락 바스락 하더라고요.”

그 때 마음은 지금 마음이 아니고
지금 마음은 그 때 마음이 아니다

2005년 한 해 동안 준비모임을 가지고 관계되었던 바깥사람들 회상에 노조 발기인들이야기와 사건일지를 모아 책을 엮었다. “쓰기가 어렵더라고.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간 일을 쓰면 되지.’ 하겠지만 그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때 마음으로 쓰면 지금 마음이 아니고, 지금 마음으로 쓰면 그 때 그 마음이 또 옅어져요. 서른 몇 살 때 일어난 일을 육십이 넘어서 30년도 지난 일을 쓰는데 무슨 열이 나겠어요. 지금 마음자리에서 보면 지난 느낌이 거짓말이 되고, 그때 심정을 살리면 지금이 너무 우습잖아요. 절충점을 찾는 일이 힘들더군요. 그래서 ‘정직하게 쓰자.’ 다른 분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들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태어난 <1974년 겨울-유신치하 한국일보 기자노조 투쟁사> (출판사 미디어집) 출판기념회를 12월 12일에 가졌다. 노조지부장을 맡았던 이 박사가 인사말을 했다. “…모순을 고쳐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설사 달걀로 바위 깨듯이 어리석은 시도일지라도, 하지 않을 수 없이 밀어내는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합니다. …저는 이미 그 시대 일과 화해를 했습니다. 다 소화되어서 찌꺼기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 화해가 어찌되었든 우리가 했던 일이 잊혀져서는 안 됩니다. 그 시대 언론 투쟁을 말하지 않고, 오늘날 언론을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놓는 이 책은 모자라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도, 책장에 그냥 꽂아놓지 마시고, 읽어주십시오.”

다음 생이란 꼭 몸 바꾸는
다음 생을 뜻하지 않는다

“불일암이 거의 마무리되어갈 때, 친구랑 같이 가서 청소를 해 드렸어요. 마루도 닦고 창도 닦고 그랬더니 구산스님이 올라와서 보시고는, 보살들이 청소를 한다고 애쓰는 모습이 참 갸륵하다면서 이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좋은 공부를 할 거라고 하셨어요. 그 말씀 끝에 법정스님이 그러셨어요. 다음 생이 반드시 몸을 바꾸는 다음 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진짜 그 공덕으로 불교공부를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법정스님이 불일암을 짓고 내려가면서 봉은사 다래헌은 성철스님 상좌 원정스님이 잠깐 살다 해인사로 떠나고, 돈연스님이 썼다. 이창숙 박사 일행은 법정스님이 안 계셔도 봉은사 다래헌을 고향처럼 찾다보니 자연스레 원정스님이나 돈연스님을 알게 되었다. 그 뒤 해인사에서 우연히 이창숙 박사를 만난 원정스님은 노장님을 뵈러가자고 했다. 노장님은 백년암에 계시는 성철스님을 가리키는 말씀. 그때 성철스님은 “여기 삼천배해야 들어오는데 니는 외상으로 왔다잉.”하며 말씀을 꺼냈다. 그 말씀에 이창숙 박사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네 알아요. 제가 외상 갚을 게요. 스님.”하고 말을 받았다. “성철스님이 ‘그래 갚아라.’ 그러시면서 ‘니는 절에 왜 다니노?’ 하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시더라고. ‘절하러 다니죠?’ 그러니까 ‘니는 아는구나.’ 그러더니 ‘몇 번 하노?’ 그러세요. ‘세 번 하죠.’ 그랬더니 또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와, 세 번 하노? 한 번이면 되제!’ 그러시는 거예요. ‘정말 그러네. 왜 세 번을 하지?’ 싶었어요. 거기서 딱 막히더라고. 한 방 맞았죠.” 1·2차 관문은 통과했는데 마지막 관문에서 막혀버렸다. 이창숙 박사, 백년암에서 내려오면서 절에 다닌다고 어물거리다가 세월 다보내고, 육칠십 되었을 때 한 방 맞았으면 어쩌겠나. 지금 서른 몇 살에 맞는 게 너무 다행이다 싶었다.

“법정스님은 제게 무슨 기도를 하라든가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없어요. 그러다보니 성철스님을 뵈면서 삼천 배하는 것을 알았어요. 그전에 법정스님이 간절함이 담기지 않은 절은 그저 ‘굴신운동’일 뿐이라는 글을, 아마 불교신문에 쓰셨을 거예요. 그 글을 보고 성철스님을 따르는 스님들이 법정스님 방으로 몰려가 스님이 아끼던 백제와당을 박살냈다고 하는 말씀을 전해 들었어요. 그런데 원정스님이 저를 법정스님한테 다니는 신도라고 소개시켰어요. 그러자 성철스님이 대뜸 ‘그래, 법정이가 직필直筆이제!’ 하셨어요.” 직필, 목에 칼이 들어와도 대쪽처럼 올곧은 글을 쓴다는 말씀이다.
이창숙 박사, 그 뒤에 인연 따라 석남사엘 가서 삼천 배를 했다. “그 다음에 성철스님을 뵈었는데 스님이, ‘얘기 들었다. 석남사 가서 절했담서?’ 그래서 ‘네, 스님 빚 갚았습니다.’ 그러면서 불경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니까 ‘니 공부 끝나고 마, 포교사해라.’ 그러셨어요. 그 자리에서 불명을 주셨어요. 일화선一化船이라고. 반야선般若船이라는 뜻이에요. 얼마나 세요. 그래서 누구한테 얘기도 안 하고 쓰지도 못했어요. 83년에 받았으니까 한 30년 되어 가는데, 그 불명을 쓴 지는 겨우 10년 밖에 안돼요. 정말 제대로 들어갔다는 느낌, 제대로 선생님들을 만났다는 생각이에요. 스님 다비식에 꼭 두 번 갔는데 한 번은 성철스님 다비 때고, 이번에 법정스님 다비 때 갔어요.” 무슨 인연이었을까? 시대를 아울렀던 두 어른을 한꺼번에 모시는 복이라니.

이창숙 박사는 마흔 두 살에 불교공부를 시작했다. 늦깎이. 한국불교사를 하는 김용태 선생이 지도교수였다. 김용태 교수는 신라 때 받아들인 승만경이 아직도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면서 여성 불자가 논문을 써서 널리 알려야 한다며 해보라고 권했다. “김용태 선생님이 참 많이 도와주셨어요. 제목이 <승만경의 思想과 그 新羅的 受容에 대한 硏究, 1983>이었어요. 그런데 쓰는 사람은 힘들고, 보는 사람은 시시한 게 석사 논문이에요.” 논문에서 “…신라왕실에 바쳐진 승만경勝?經 주인공 승만부인은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있다. 승만부인이 갖추고 있는 도덕성과 타고난 재주는 지도자가 갖춰야할 자질이기도 하다. 남성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여왕을 내세울 수 있을 만큼 앞선 의식수준은 이 경전을 수용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된다. 선덕여왕 재위 15년 동안 정법왕국사상과 보살다운 덕치德治, 불교신앙을 엿볼 수 있다. 정법왕국사상은 불교에 바탕을 둔 국가관으로 불도 불법 근본정신에 따른 치국치민治國治民 요소로 삼는 왕국, 곧 국가가 정법왕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법 실현은 승만경 중심 사상이다.” 석사학위를 받은 이창숙 박사는 이어 박사학위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법정스님께 드렸다. 다음은 법정스님 답장이다.

참 오랜만에 눈에 익은 글발 받아봅니다. 그동안 공부하느라 애많이 썼습니다. 박사과정 등록하셨다니 잘했습니다. 유강이가 벌써 고교이군요. 불일佛日에 와서 고추장 먹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가을이 오면 늘 그러듯이 바쁘게 돌아갑니다. 지난여름 땀 좀 흘렸더니 몸이 훨씬 가벼워졌어요. 요즘은 끓여먹기도 귀찮고 혼자 먹는 밥맛도 없어 자주 나돌아 다닙니다. 설렁설렁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어디론지 훌쩍 떠나고 싶어요. 내일來日은 또 길을 나서려고 합니다. 어제부터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감의 볼도 많이 붉어졌어요. 불일佛日에 온지 꼬박 아홉해가 됐습니다. 세월 참 잘도 지나갑니다. ……승만경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잘 읽히지 않은 경전인데 석사 논문으로 잘 다루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금광명경金光明經과 함께 널리 독송되는 경전인데요.
부디 건강하시고 하고 싶은 공부 실컷 하면서 즐겁게 사십시오.
시월 사일十月 四日 불일암佛日庵에서 합장合掌

▲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여자들이 공부해봐야 다음 생에
남자 몸 받는 일밖에 더 있어?

“이른바 가방 끈이 긴 스님들에게 여성신도들이 무엇을 여쭈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심지어 어떤 스님들은 망상피우지 말라고 해요. 알고 싶은 욕구가 망상이라는데 할 말이 뭐가 있어요? 또 여자들이 공부해봐야 다음 생에 남자 몸 받는 일밖에 더 있어? 이러는 스님도 있어요. 그럼 여자는 뭐야? 여성 불자는 돈이나 내는 존재야? 한국 불교가 여성신도 없으면 존재할 수 있어? 부처님이 그런 분이야? 부처님이 그런 사람이라면 난 부처님 안 믿어. 평등사상이 뭐야? 부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나. 연구를 제대로 한 번 해보자. 그래서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같은 중요한 경전에 나온 여성성불상 사상이 어떻게 나왔는가를 연구했어요. 박사 논문을 쓸 때 해주스님이 많이 챙겨주셨어요. 박사 논문을 쓴 다음에 동대에 ‘불교와 여성’이라는 교양과목이 생겨서 강의를 했어요.” 불교여성개발원 자문위원으로 여태 현역인 이창숙 박사 말씀이다. 박사 논문 제목은 <인도불교의 女性成佛思想에 대한 연구, 1989>이다. 누군가 첫발을 내딛어야 길이 열린다.

이 대목에서 귀에 너무 익숙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여성을 무시하는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속담이 여성 자율성에 대한 남성 불안에서 나온 말이고, 더 나아가 모성에 대한 한없는 의존심을 은폐하기 위해 여성을 애써 낮추고 남성권위를 세우려는 억지라면 어떨까? 우리 과거사에 그런 보기는 심심치 않게 있다. 조선 중기 대표학자 어숙권은 신사임당을 안견 다음가는 예술가라고 꼽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신사임당이 살아있을 때는 그림을 너무 잘 그리는 ‘화가 신씨’로 불리다가 죽은 뒤에 율곡 어머니로, 남편 이원수 부인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화가 신씨에 대한 첫 평가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소세양蘇世讓이란 사람에게서 나왔다. 소세양은 신사임당이 그린 산수화를 보고 ‘동양신씨화족’이란 시를 지었다. 사임당 나이 45세 때 쓰인 이 시는 신사임당이 그린 산수화가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라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17세기에 들어오면서 뒤집어진다. 그 동안 헌사는 다 어디가고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이 나서서 신사임당 산수화 작품이 율곡 어머니나 현숙한 현모양처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다면서, 어이없게도 그 산수화가 가짜라고 뒤집는다. 그리곤 조선 유학자들 사이에서 신사임당 산수화 평가가 사라진다. 그뿐만이 아니라 신사임당이 그린 산수화도 종적을 감추었다. 대신 난초, 매화, 포도, 풀벌레처럼 집에서 자녀를 기르고 살림을 하다가 가끔 그렸을 법한 그림들만을 모아 그림첩을 만들었다. 백세 스승 율곡 선생 어머니께서 규문을 벗어나 산천곳곳을 누볐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불교신문 김성우 기자는 2008년 9월 6일자 ‘깨달은 여인들의 수행법’에서 <법구경 주석서>에 나오는 수다원과 이상 도과道果를 얻은 성자 1만2,975명 가운데 신분이 확실한 5,787명만을 분석하면, 비구니와 우바이를 합친 여성 성자가 3,544명(61.2%)으로 비구와 우바새를 합친 남성 2,243명(38.8%)보다 1,300여명이나 많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여성불자 활동이 현재 한국 여성불자 활약보다 더 활발했음은 물론, 여성성불이 너무나 마땅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여성변성성불 같은 이론이 널리 퍼진 까닭은 수탉 콤플렉스 때문이 아닐까.

오랫동안 법정스님을 뵙다보니까 스님이 뭘 좋아하는지를 훤히 꿰고 있던 이창숙 박사는 일본 여행길 면세점에서 배터리로 쓰는 ‘레터오프너’를 사들고 돌아와 그 해 여름, 딸과 불일암을 찾았다. “봉투부리에 레터오프너를 넣어 살짝 밀면 찌∼익 갈라져요. ‘스님이 되게 좋아하시겠다.’ 싶어서 두 개를 샀어요. 하나는 제가 갖고 하난 스님께 드렸더니 ‘이런 게 있어?’ 그러시면서 한 번 쓰윽 해보시고는 무심히 받아 내려놓으셨어요. 불일암에 가면 잠은 아래 요사채에 가서 자는데 그날 밤은 다실에서 자라고 그러셨어요. 차를 들면서 한참 얘기하다가 스님은 큰 방으로 건너가시고, 자려고 누웠는데 옆방에서 치∼익, 치∼익 소리가 나요. 레터오프너가 지나갈 때마다 나는 소리에요. 그 소리가 계속 나는 거야. 우리끼리 낄낄대면서 ‘스님이 아까는 무심한 척 하시더니 너무 재미있어서 자꾸 하시는 거야. 우리가 다 듣고 웃는지도 모르시고.’ 그랬어요. 스님은 사람들한테 사랑을 많이 받고 가셨어요. 참, 사랑 많이 받고 가셨어. 아! 참, 그 말씀도 드려야지. 석사하고 박사과정 공부할 때 법정스님이 수업료를 한 차례씩 두 번 내주셨어요.” 법정 장학생 이창숙 박사와 만나고 돌아서는 나그네 발길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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