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화의 선원총림을 가다 36- 공안(公案)과 화두(話頭)

▲ 2004년 동안거 입제 때 금오선원 스님들의 참선 모습

수행자로 하여금 번뇌 망상과 분별적인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진리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수단 혹은 교육용 방편을 ‘공안(公案)’ 또는 ‘화두(話頭)’라고 한다. 공안과 화두는 조실이나 방장 혹은 선사(禪師)가 수행자에게 던지는 ‘과제’ ‘관문’ ‘숙제’ 같은 것으로, 이 한마디에 심안(心眼)이 열린다면 불(佛)과 동격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참구해야할 과제가 된다. 그것이 곧 공안, 화두이다.

‘공안(公案)’이란 ‘공부(公府, 관청)의 안독(案牘, 공문서)’에서 ‘공(公)’과 ‘안(案)’만 따온 말로서, ‘헌법’ ‘법령’ ‘공문’ 등을 뜻하는 중국 당시의 행정 용어이다. 공무원들에게 국가에서 제정한 헌법이나 법령 또는 상부기관의 공문은 공무(公務) 수행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준칙(準則)·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 수행자도 옛 조사들의 기연어구(機緣語句)나 선문답 혹은 법칙이 되는 말씀을 반드시 참구해야만 깨달음을 이룰 수 있어 ‘공안’이라고 한 것이다. 즉 ‘공적(公的)으로 따라야할 안내(案內)’로서 따른다면 깨닫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화두(話頭)의 어의(語義)는 ‘말’ 혹은 ‘대화’를 뜻한다. ‘두(頭)’는 문어에서는 ‘머리’ ‘처음’ 등을 뜻하지만, 구어체에서는 앞의 단어를 명사화시키는 어조사 역할을 한다. 어떤 책에서는 글자 그대로 ‘말머리(話頭)’라고 해석한 곳도 있지만, 그것은 한어(漢語)의 특성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한 예로 선원의 소임 가운데 조석으로 종을 치는 소임을 종두(鐘頭), 목욕탕 담당자를 욕두(浴頭), 채마 밭 담당자를 원두(園頭)라고 하여, 소임명에 두(頭)자가 많이 들어가는데, 글자 그대로 ‘종머리’, ‘목욕머리’, ‘밭머리’라고 해석한다면 웃음이 나올 일이다. 현대 한어에서도 마찬가지로 화두는 ‘말’ ‘대화’를 뜻한다. 즉 선문답, 법담(法談) 등을 가리키는데, 뜻 자체는 공안과 별 차이가 없다.

이와 같이 공안과 화두는 크게는 같으나 용도는 조금 다르다. 공안은 선문답 전체를 가리키고, 화두는 그 가운데 선사(禪師)의 답어나 핵심어를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유명한 화두인 ‘무(無)’ ‘간시궐(乾屎橛, 마른 똥막대기)’ ‘마삼근(麻三斤, 삼베 세근)’ 등도 모두 선문답 가운데 핵심어나 선사(禪師)의 답어다. 무자화두를 예로 들어 보자.

어느 날 한 수행승이 조주(趙州; 778~897) 선사에게 여쭈었다.

“선사, 개에게도 부처가 될 성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狗子還有佛性也無)?”

“무(無, 없다).”

“일체중생에게는 다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없습니까?” “개에게 업식(業識=분별의식, 중생심)이 있기 때문이니라.”

이상의 선문답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 단락은 공안이 되고, 조주선사의 답어 중 핵심어인 ‘무(無)’ 한 글자는 ‘화두’라고 할 수 있다. 공안과 화두의 쓰임새를 보면 공안은 선문답 전체를 가리키고 있지만 화두는 그 가운데 핵이 되는 한 구(句)를 뜻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아직 공안과 화두를 구분하고 있지 않으나, 중국 선학자들은 구분하는 편이다. 쓰임새가 다르므로 구분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공안 속에서 선사의 답어나 핵심어를 뽑아서 화두로 만든 이는 간화선을 제창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이다. 그는 화두참구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인 간화선을 개발했는데, 종래 공안 전체를 사유하던 방법에서 더 간추려서 공안(선문답) 가운데 선사의 답어를 참구하도록 한 것이다. 더 편리한 방법을 개발한 것인데 이것이 이른바 화두이다.

공안도 그러하지만 화두 역시 분석적인 사고나 사량 분별심(알음알이=머리를 굴림)으로는 접근할 수 없어야 한다. 언어적인 해석이나 학문적으로 쉽게 천착할 수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스스로 잘난 척 괴로움을 겪고 있는 중생의 마음을 열어 줄 수 있고, 똑똑한 척, 이분화(二分化)시키려는 분별적인 사고를 정지시켜서 무분별의 진여의 세계로 들어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은 모든 생각을 총동원해 화두 하나에 집중, 올인(All in)해야 한다. 화두와 내가 하나(不二) 곧 동체(同體)가 돼야 한다. 이것을 선에서는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고 한다. ‘모든 생각을 몽땅 뭉쳐서 한 조각’ 곧 ‘화두 일념(話頭一念)으로 만들라’는 뜻이다. 관건은 얼마나 화두에 집중, 몰입하는가이다. 흔히 선어 가운데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올인),’ ‘닭이 알을 품듯이(일심)’ ‘오매일여’ ‘몽중일여’ ‘일념 만년(萬年)’이라는 말도 모두 집중(올인)해 화두를 참구하라는 뜻이다. 여객기가 이륙할 수 있는 속도는 시속 300㎞ 이상 돼야 하고, 물이 끓는 온도는 100℃ 이상이다. 화력이 집중되지 않으면 끓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화두삼매, 곧 화두에 몰입하려면 평이한 상식적인 언어, 논리적 접근이 가능한 언어, 조금만 파고들면 곧 알 수 있는 언어로서는 어렵다. 그런 언어로는 꽉 막힌 관념을 타파 할 수 없다. 도무지 질문(무엇이 부처입니까?)과는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언어, 곧 ‘무(無)’ ‘마삼근’ ‘간시궐’ 등 언외(言外)의 언어, 파격적인 언어만이 기름때로 찌든 혈관을 뚫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선사의 모든 말과 제스처는 곧 진리의 당체를 가리키는 언어라야 한다. 참선자는 이것을 포착할 줄 알아야 한다.

공안이나 화두는 뜻이 없다고 해도 되고 있다고 해도 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뜻(=메세지)이 없는 것이 아니고, 있지만 좀처럼 알 수 없을 뿐이다. 공안, 선문답에는 당시의 유행어나 고사성어, 격언, 은어, 방언, 속어 등이 많이 나오는데, 이런 말을 사용해 고정된 생각이나 집착, 주의(主義)에 갇혀 있는 참선자의 마음을 각성하게 한다. 다만 1000년 전 중국 속어의 진의(眞意), 뉘앙스를 천년이 지난 오늘날 100% 파악할 수 없을 뿐이다. 예컨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당연하다’는 표현 대신 ‘당근이지’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한번 생각해 보라, 천년 뒤에 ‘당근이지’가 ‘당연하다’임을 알아차릴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홍당무인 당근이 왜 등장할까?”하고 갖가지 사전을 찾아댈 것이다.

참선(간화선)에서 화두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화두가 어떤 역할을 하기에 참선자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는 것일까? 그것도 모르고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마치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겠다고 팔을 걷어 부치고 씩씩대는 것과 같고, 지도도 나침판도 없이 목적지를 찾아가려는 것과 같은 무지선(無知禪)이다. 일평생 참구해도 오도(悟道)는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다.

화두의 1차적인 역할은 화두삼매를 통해 번뇌망상과 사량분별심을 타파(물리침)하는 것이다. 화두 몰입은 불안, 번민, 고뇌 등 정신적 갈등과 번뇌 망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차단하게 된다. 번뇌 망상이 사라지면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해지며, 마음이 고요해지면 본래 청정한 마음 상태로 돌아간다.

화두를 계발한 대혜(大慧; 1089~1163)선사는 <서장(書狀)>에서 “이 무(無)라고 하는 한 글자야말로 번뇌 망념의 생사심을 부숴버리는 칼이다(無. 遮一字者, 便是箇破生死疑心底刀子也).” “무(無)라고 하는 이 한 글자야말로 곧 악지(惡知, 잘못된 앎), 악각(惡覺, 잘못 깨달은 것)을 물리치는 무기(武器)이다(此一字者, 乃是摧許多惡知惡覺底器仗也)”라고 말하고 있듯이, 화두의 1차적인 역할은 괴로움의 원천인 번뇌 망상을 물리치는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은 <간화결의론>에서 “화두는 전제(全提)와 파병(破病)의 두 가지 역할을 한다”고 했다. 전제는 화두삼매를 통해 근심 걱정과 불안 등 번뇌 망상을 억제시켜서 본래 청정한 마음을 밝히는 것이고, 파병은 모든 사량분별심과 환영·환청·환시 등 갖가지 선병과 마장(魔障)을 물리치는 것을 뜻한다.

2차적 역할은 일사일지(一事一知, 한 일에서 하나를 안다), 일기일회(一機一會)와 같이 여러 가지 사례(事例) 즉 다양한 공안참구를 통해 지혜의 깊이와 폭을 넓히는 것이다. 선의 목적은 번뇌 망념을 제거하고 반야지혜를 터득하는데 있는 것이지, 좌불(坐佛)이 되는 것이 아니다. 좌불은 바보나 백치가 하는 짓이다.

공안이나 화두가 100% 제 기능을 발휘하자면 무엇보다도 권위와 절대성이 확보돼야 한다. 즉 ‘이 화두를 참구하면 반드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주어져야 한다. 권위와 절대성이 확보될 때 비로소 화두는 깨달음을 체득하는 방편으로 핵탄두 같은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것이 무너지면 수행자에게 화두는 효력을 상실하고, 더 이상 화두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화두는 진리가 아니다. 깨달음을 성취하게 하기 위한 도구, 방편이며, 진리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우주선일 뿐이다. 그러나 이 우주선이 없으면 우주를 여행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화두는 진리는 아니지만 깨달을 때까지 신주단지 모시듯 해야 한다. 절대성 즉 대신근(大信根, 큰 믿음)이 바탕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선을 할 때는 대부분 ‘화두를 든다(擧話)’고 말하는데, ‘든다(擧)는 것’은 곧 ‘화두를 참구한다’는 뜻이다. ‘참구(參究)한다’는 말은 ‘탐구한다’는 말인데 다만 차이점은 학문적, 분석적, 언어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고, 직관적인 사유를 통해 탐구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화두를 해석하면 ‘사구(死句, 죽어 버린 말),’ 해석하지 않으면 ‘활구(活句, 살아 있는 말)’라고 한다. 문제는 해석해 버리면 더 이상 참구해야 할 가치나 필요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인데, 그것은 학문적인 이해일 뿐 자신의 인생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지능적으로 천착해서 안 것은 진정한 앎(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안이나 화두를 깨달으면 결국 무엇을 안다는 것일까? ‘깨달음’이라는 것을 신출귀몰하는 것쯤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망상이다. 그것은 간화선이 아니고 사기선(詐欺禪)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공, 무상, 무아의 이치, 중도, 무집착, 일체유심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고, 청정한 마음인 불성이 자기 자신에게도 있음을 확고하게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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