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현실에 적용시키기란 쉽지 않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할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실현한다고들 하지만 무아의 개념은 여전히 막연하다. 불자들은 매일 같이 <금강경>을 독송하면서도 돌을 우물거려 삼키고 있지는 않는지  늘 자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6월 15일 한국전통불교문화박물관에서 조계종 종무원조합, 불교인재원, 대한불교청년회가 주최한 초청 특강에서 “무아로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주제로 강의했다.

한 교수는 “불교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불교의 핵심 하나만 알면 불교를 어렵지 않게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마추어 불교학자라 자칭한 한형조 교수는 이날 학자로서 점수(漸修)의 입장에서 불교의 핵심을 정리했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저서로는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무문관에서 혹은 너는 누구냐> <왜 동양철학인가> <조선유학의 거장들> <금강경 강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 허접한 꽃들의 축제>들이 있다.

 

▲ 한형주 교수가 '무아로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사진=박재완 기자
불교의 핵심은 하나로 통한다
불교를 알기 위해서 팔만대장경을 다 뒤집어 볼 필요 없습니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이 안에 핵심이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요령이 있습니다. 그 핵심에만 다가가면 됩니다. 모든 핵심이 <금강경> 사구게 안에 있습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범소유상 개시허망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는 뜻입니다. 결국 “네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그것들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그것들은 네 사적 의지와 관심의 투영, 다시 말해 너의 그림자일 뿐이다. 이 사태를 선명히 자각할 때, 그때 너는 붓다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불교 또한 ‘책’을 통해서 간다
잊지 마십시오. 책을 읽지 않고서는 불교를 알 수 없습니다.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에 다가가야 합니다. 고기를 잡았으면 그물을 버리고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야 하지만, 고기도 잡지 않고 강도 건너지 않았는데 그물을 버리고 강을 건너서는 되지 않습니다. 선(禪)조차도 언어를 통해 도달한 이후에야 언어를 버려야 함이 맞습니다. 교(敎)를 버리려면 교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교의 전통과 지식 없이 바로 선에 뛰어들면 불교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동시에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 효과를 얻기 힘듭니다. 우리가 아는 선사(禪師) 지눌, 경허, 경봉 스님 등은 거의는 교학의 대가들로 한시를 줄줄 읊으며 교학을 다 익힌 분들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경전을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보라
경전을 대할 때는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대하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고전이나 경전을 소설 읽듯 편하게 읽기를 원한지만 고전을 근대 소설 대하듯 하면 안 됩니다. 불교 경전이나 유교 경전은 물론 동서양의 위대한 고전은 모두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위대한 고전은 압축된 암호들이기 때문에 읽는다고 술술 풀리는 것이 아니라 읽으면서 동시에 해석이 돼야 합니다. 또한 해석을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중을 위한 경전이 필요합니다. <금강경>은 불경 중 가장 심오한 경전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수많은 불자들이 <금강경>을 독송하거나 암송하고 있지만 문자와 내용사이에 괴리감이 커 그 뜻을 구체적인 체험과 연계시켜서 생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금강경> 뿐만 아니라 초기불교, 선, 화엄 등 불교 전체가 난해한 언설로 깔려 있으니 그 위용 앞에서 어지러운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번안어와 고전언어의 혼재가 어려운 불교 만들었다
루스 이리가라이는 “우리가 같은 언어를 쓰게 된다면, 같은 이야기 역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다른 삶을 원하다면 다른 언어를 습득해야한다. 다른 말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국어의 문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유럽이나 미국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할 수 도 있습니다. 불교를 만나게 되는 것은 지금의 삶을 떠나 또 다른 삶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혀 다른 삶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염두 해야 할 점은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가 원효와 지눌이 쓰던 한자가 아니라 19세기 중반 일본이 만든 번안어들과 고전이 섞이면서 의미가 완전히 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산스크리트어를 통해서 불교를 접하던 것보다 더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완전한 외국어로 다가온다면 편할 것을 고전언어와 신번안어와 섞여있어 불교가 어렵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고전언어와 신번안어를 구분해주는 사전조차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시대와 상황에 맞는 새 언어를 개창해야 합니다.

 “사무치는 불교가 그립다”
만해 스님은 <님의 침묵>에서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 니라”라고 한 바 있습니다. 만해 스님은 이 한 구절 안에 팔만대장경을 압축시켜 놓았습니다. 불교는 이렇게 한 구절로 함축할 수 있습니다.
최근 불교학회를 보면 3인의 동상이몽이 생각납니다. 전문가들은 제례의 어법과 담론을 축으로 토론을 합니다. 전문가들이 너무 세부적으로 다루다 보니, 현실 생활과 지식사이에 괴리만 커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지식은 늘어나고 있지만 세상은 더욱 알 수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도 같은 정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가 윌 두란트(Will Duarant)는 “어떤 지식이 대화하고 소통하기에 너무 크고 비대해지면 완전한 학자적 전문가의 손에 들어가거나 그 권위를 알지도 못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스님들은 그것들이 최고의 깨달음인 화두, 간화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참석한 일반 대중들은 전문가의 이야기도 어렵고, 화두는 너무 험준하다는 생각을 하고 갑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를 내 삶에 어떻게 접목 시켜야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시대 새 불교는 지루하고 험준한 불교에서 벗어나 소통에의 갈망입니다. 친절한 불교가 그립습니다. 친절한 불교란 나의 삶과 체험의 지평에 절실하게 다가오는 불교 즉 사무치는 불교를 뜻합니다.

화두 접근법 달리 해야
화두는 의미의 집결체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화두를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불교의 돌파구는 스님, 학자, 일반 대중들을 위한 제3의 길이나 중도에서 해결책이 필요하다. 삶과 체험과 접맥돼야합니다. 화두를 언어로 표현하고,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쓰고 있는 담문을 다시보고 다시 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학자들은 논서에서 어떤 주장이 있다가 아니라 일련의 내용들이 지금 우리 삶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접목되는 언어를 살리되, 언어를 바꾸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학을 다시 불러와야 합니다. 책을 읽어야 하고, 다시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즉 고전에 속하는 경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고대 성인들은 고전을 읽을 때에 “삼키지 마라. 씹어라. 독서는 양파 까기와 같이 읽을 때 마다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회초리 등짝을 후려치듯, 한 번에 피 한줄기가 맺혀야 한다”고 합니다. 소설처럼 가볍게 읽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어 삶에 깊이 각인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옛 사람들의 말을 온통 긁어다가 자기 생각 속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때로는 책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설교하지 말고 책이 하는 이야기를 무조건 들어야 합니다. 고대 성인들은 “요즘 학인들은 읽은 것도 읽지 않은 것 같고, 읽지 않은 것도 다 읽은 것 같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야 한다. 책이 다가올 수 있도록 한발 물러서서 참고 기다릴 것, 사물로서 사물을 보아야지, 네 선입견과 투영으로 사물을 보지 말라”고 가르쳐왔습니다.
화두는 의미철학으로 해석돼야 합니다. 불교의 진실을 담고 있는 구절로 화두자체가 의미집적체가 돼 불교의 핵심코드가 돼야 합니다. 해독이 제대로 돼야 화두에 비로소 적정하게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하고 집중하는 것과 이해 없이 집중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사진=박재완 기자
다른 시각 그리고 자아라는 감옥
길주 청원유신 선사가 강단에 올랐습니다. (靑原惟信禪師上堂)
노승이 삼십년 참선에 이르기 전, 산을 보니 산이었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 見山是山見水是水) 나중에 선지식을 친견한 이후 불문에 들어서고 보니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니 물이 곧 아니었다. (及至後來親見 知識有箇入處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그런데 지금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보니, 여전히 산을 보니 그대로 산이었고(而今得箇休歇處 依然見山是山 見水是水) 산은 그대로 산이었다. 대중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大衆這三般見解是同是別) 선비나 스님 중에 나서는 자가 있다면 나의 실제와 깨달음과 마주하고 있다고 하겠다. (有人緇素得出 許汝親見老僧箇) <속전등록>

불교의 관건은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두 번째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근기는 두 번째를 거치지 않고서는 세 번째에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사태도 바라보는 화자에 따라서 다르게 봅니다. 당연히 나의 시선과도 다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자아의 감옥 즉 자아의 판단이 이룬 세상입니다. 모든 판단은 자기 중심적으로 이뤄집니다. 끝없이 자기 식으로 왜곡하고 정당화하기 때문에 객관화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미지 세계는 자기가 보는 세계에 갇혀있으니 우리는 실제 사물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나를 찬양 혹은 모욕했고, 내가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스타일에, 내가 존경하는 부와 권력. 혹은 경멸하는 찌질한 인생에 무엇보다 내게 득을 줄 사람, 혹은 손해를 끼치거나 끼칠 사람이라고 바라봅니다.

이런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물의 실재보다 자신의 의지와 관심 편견 수용으로 세상을 봅니다. 사물을 보기보다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충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등록금, 가정문제, 댓글로 인한 자살 모두 자기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다.
<금강경>은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의 자아를 투영하는 이미지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말합니다. 크리슈나 무르티는 “나는 분열과 갈등으로 추악하고 잔인해진 이 기괴한 사회의 일원으로 그것을 만드는데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 생각의 감옥에 갇혀 사는 삶은 도피의 일상이 되고 맙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 다른 사람과의 의미있는 만남을 놓치고, 자연과의 생생한 접촉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무의미가 생기고 타자를 도구화하는 정도가 넘어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기 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평생 자기라는 감옥에서 처형당하고 있으며 이 공허를 메우기 위해 도피와 자기이기만이 일상화 된 모습입니다. 존재망각, 소외, 술과 도박, 외도, 책과 텔레비전, 소셜네트워크, 엡, 게임, 신문이나 책이 그 반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만이 진리 아니다
죠셉 캠벨은 “이야기, 신화, 철학, 소설이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다른 표현 같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다”라고 말합니다.
불교의 다양한 유파 사상도 결국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불교의 다양한 이야기와 또 다른 깨달음이 수많은 주장과 의견들이 불교의 깊은 뜻입니다. 서로 다른 교설 같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른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주 다양해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적 지식, 서양철학, 소설 모두 불교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불교만의 진리라는 것은 없습니다. 불교만의 진리라고 배타적으로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는 오래된 것이고, 길은 다만 발견될 뿐입니다. 따라서 동서양의 철학과 전통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쇼펜하우어는 “붓다와 에크하르트, 그리고 나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에크하르트가 기독교 신화의 굴레를 쓰고 하는 반면, 불교에서는 동일한 사상이 그런 신화에 의해 위축되지 않고 나타난다. 그러나 불교의 단순성과 명료성은 종교가 가질 수 있는 명료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나의 철학에서는 그것이 전적으로 명료하게 나타난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경허 선사도 “그 뜻을 얻으면 거리의 잡담도 다 진리의 가르침이요, 말에서 헤매면 용궁의 보배곳간도 한바탕 잠꼬대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불교의 핵심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면 팔만사천법문도 다 헛된 것이 됩니다.

무아의 연습
자아로 인해서 점철된 왜곡된 견해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하는 것이 곧 무아의 훈련입니다. 자기 밖에서 세상을 보는 연습해야 합니다. 아내의 젖은 손을 보고도 집안 살림을 어떻게 늘려가고 있는지, 아이는 잘 가르치고 있는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고생하는 줄을 아는 것이 무아의 훈련입니다. 남편의 비듬을 보고 더럽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넌 왜 그렇게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라는 시각, 사물을 다른 관점에서 보고, 역지사지로 회향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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