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에 옷 젖듯이 어느 순간 불교가 내 안에

▲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저는 법정스님을 뵙기 전까지는 절을 잘 몰랐어요. 절에 가 본 적이 없고 스님하고 얘기를 해 본 적이 없어요. 법정스님은 제가 가장 처음 만난 스님이에요. 금생에. 그런 말이 있더라고요. 미국에 이민을 가면 인연 있는 사람들이 마중 나오잖아요. 나중에 일을 할 때 대개 마중 나온 사람과 비슷한 일을 고른대요. 그러니까 맨 처음 누굴 만났느냐가 매우 중요하죠.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제가 행운아에요. 럭키해요. 럭키!”
 

생애 가장 처음 만난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법정

두텁고 딱딱한 겉껍질을 죽을힘을 다해 밀어 올리며 파르라이 새순들이 돋는 사월 중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난 불교 여성학 1호 박사 일화선一化船 이창숙 박사(72) 일성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민주항쟁 문을 여는 4·19이어서, 1974년 한국일보 노조 지부장을 맡아 부당하게 해고된 해직기자 이창숙 박사와 만남은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70년 대 초 이창숙 박사는 숙명여고 선배로 글을 잘 써서 인기가 많고, 남달리 손재주도 좋았던 소설가 정연희 작가가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아 가끔 놀러가곤 했다. 어느 날 정 작가가 앉은뱅이 재봉틀 앞에 앉아 회색옷감을 잘라서 한복 같은 옷을 만들고 있었다. 법복이었다. 어디서 입는 옷이냐고 물었다. “절에 가서 입으려고 만든다고 해요. 어느 절에 가느냐고 물었더니, 봉은사엘 간대요.” 여름에 가서 한 석 달쯤 있을 거라고 했다. 놀러가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했다. 그래도 그뿐이었는데.

이창숙 박사가 한국일보기자였을 때 한국일보와 조선일보는 조간신문이었다. 조간은 오전 12시까지 기사를 넘기면 오후 7시에 지방으로 가는 초판이 나왔다. 기자들은 초판을 보고 퇴근한다. 초판을 기다리던 1973년 초여름. 날씨가 눈부시게 좋아 말간 하늘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정연희 작가가 봉은사에 놀러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같이 근무하는 선배한테 정연희 작가를 만나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때 정연희씨 인기가 좋았거든요. 예쁘지 글 잘 쓰지.” 입이 벙글어지며 좋아하는 선배 화답에 오후 7시까지만 돌아오면 되니까, 회사 앞에서 택시를 타고 뚝섬으로 달려가 배를 갈아타고 봉은사를 찾았다. 빼곡히 들어선 배 밭을 지나자, 절 앞에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지도 못하고 풀을 베고 있던 정연희 작가를 만났다. “자기가 절에 있으면서 놀러오겠다고 이야기한 사람 가운데 진짜 놀러 온 사람은 저 밖에 없었대요.”

조금 있으면 언덕 저 쪽에서
황야의 포장마차가 넘어옵니다

반가워하며 손을 잡아 이끈 곳이 다래헌이다. “앉아 있는데 스님 한 분이 저 쪽에 계속 보시더라고요.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했죠. 법정스님이셨어요.” 40대 초반 법정스님 첫인상은 한여름에 풀 먹여 다려 놓은 삼베처럼 칼칼했다. 앉아있으려니 안에서 클래식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때 이창숙 박사는 ‘스님도 클래식음악을 들으시는구나.’ 싶어 놀랐다. 그때 봉은사 둘레가 허허벌판이었기 때문에, 다래헌 툇마루에 앉아있으면 지금 삼성역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가는 언덕길이 훤히 눈에 들어왔다. “보니까 황토 언덕이어서 ‘어우, 저기는 황토언덕이네요.’ 그랬더니 스님이 ‘조금 있으면 언덕 저쪽에서 황야의 포장마차가 넘어옵니다. 자알 보세요.’ 그러시는 거예요. 진짜 그럴듯하다며 깔깔깔 웃었어요.” 말씀을 전해 듣는 나그네 귓가에 존 웨인이 주연한 영화 <역마차> 주제가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스님하면 모두 근엄하고 말씀도 쉽게 하지 않을 것 같고 목소리 쫘악 내려 깔고 ‘아 그렇습니까? 보살님.’하고 점잖게 말씀하시는 줄로 알았던 이창숙 박사에게 이제껏 가졌던 스님들에 대한 이미지가 한순간에 씻겨 내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중 얘긴데 함께 다래헌에 다니던 도반들끼리 낄낄거리면서 ‘그런데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법정스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는지 모를 거다.’ 그랬지.”

그 뒤로도 불교를 잘 알지 못했던 이창숙 박사, 다섯 살 된 큰 아이와 세 살 난 작은 아이를 가리키면서 정연희 작가에게 얘기를 건넸다. “쟤네들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그런 생각을 하면 참 슬프다.”고. 정 작가는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지 뭣 때문에 슬픈 생각을 하느냐고 타일렀다. 그 말끝에 이창숙 박사는 “그 스님은 또 가서 뵈어도 되요?” 물었다. “그럼. 가서 뵙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봐도 되지. 기억하실 테니까 찾아봬.”라고 했다. “스님과 그렇게 인연이 됐는데…, 지내놓고 생각해 보니까 스님께 불교라는 낱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던 느낌이에요. 그랬는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어느 순간 불교가 내 안에 들어와 있더라고요.” 이창숙 박사에게 법정스님은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었던 셈이다.

더욱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은 이창숙 박사가 법정스님을 처음 뵀던 때가 1973년 여름으로 신문기자생활 10년째였다. 그즈음 한국일보 젊은 기자들은 기자 신분보장이 되어야 언론자유를 외칠 수 있지. 신분보장이 안 된 상태에서 자유를 부르짖다가는 핍박을 받아 결국 무너지지 않겠느냐는 각성이 일었다. 그래서 74년 12월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74년 12월 10일인데, 이끈 이들은 저보다 6∼7년 아래 젊은 기자들이었어요.” 젊은 기자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입에 거품을 물고 노조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을 펴던 경력기자들이 막상 노조 이끌어 달라고 하면 다들 손사래를 쳤다면서 지부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목을 내놓아야 하는 자리다보니, 식사대사가 생사대사인 만큼 피붙이 생계를 신경 써야하는 가장으로써는 어쩔 수 없이 옹색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적임자를 찾던 젊은 기자들은, 여자이면서 결혼하고 부군직장이 확실해서 직장을 잃더라도 생계를 이을 수 있다 싶은 이창숙 박사에게 손을 내밀게 되었다. “젊은 기자들이 뭔가 뜻 깊은 일을 하려는데 맡지 않겠다고 하면 평생 이 사람들한테 마음 빚을 지고 살게 되겠구나. 싶었어요. 빚지고 살 바에는 차라리 목을 내놓자. 딱 그 한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지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지부장 활동을 할 수도 없었다.

12월 10일, 한국일보노조를 만들어 이창숙 박사가 지부장을 맡고 서른 남짓한 사람이 발기인 대회를 열어 서울시에 설립신고를 마친 날. 회사 측은 이창숙 박사만 해고했다. “주동자들을 다 자르면 일이 커지지만, 여자하나 자르면 간단하잖아요. 수를 쓴 거지.” 12월 11일 0시 40분 인사부장이 광화문우체국으로 급히 달려가 12월 9일자로 이창숙을 이미 해고했다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지부장은 지부결성한 날 이미 한국일보 사원이 아니기 때문에 12월 10일 만들어진 노조는 원천무효임을 주장하려는 꼼수였다.

해고 사유는, 유엔이 정한 ‘세계여성의 해’ 1975년을 앞두고 여성을 위한 가족법 개정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운동을 주관하는 ‘범여성가족법개정촉진회의’ 회장이자 유정회 국회의원이었던 이숙종이 촉진회의가 만든 개정안을 회원들과 상의도 없이 자기 혼자 고쳐 국회에 제출한 사건이 일어났다. 뒤늦게 이를 안 회원들이 회장에게 항의하는 소동을 벌였는데 이를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이창숙 박사가 특종보도를 했다. 그러나 특종상은커녕 도리어 ‘주간여성’으로 좌천한 이창숙 박사는 신문사 오랜 관행대로 며칠간 항의성 결근을 했다. 그런데 며칠 뒤 한국일보 노조가 태어나자 결근을 핑계 삼아 이미 해고했다고 억지를 썼다.

한국일보 노조가 결성되고 꼭 닷새 뒤 동아일보 광고탄압이 이어지고, 한국일보 노조 재판이 시작될 무렵인 이듬해 3월 18일 회사에서 농성투쟁을 하던 동아방송 프로듀서를 비롯한 130여 명이 구사대를 자칭한 괴한들에게 쫓겨나는 사건이 터졌다. 이렇게 한국에서 맨 먼저 태어난 언론사 노조는 제대로 활동도 해보지 못한 채 한국일보 노조는 ‘재판소 노조’로, 동아일보 노조는 ‘거리 노조’로 짧은 삶을 마쳤다.

▲ 사진: 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코드가 딱 맞는 동지의식
스님은 100% 내 편

빚진 마음으로 살지 않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목을 내어놓았다. 그 뿐이었는데… 회사는 그 목을 붙들고 늘어졌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여러 혐의를 조작했다. 특종은 회사 명예를 떨어뜨린 일로 뒤집었고, 직속상사는 무단결근, 무능, 좋지 않은 동료관계를 지닌 기자라고 몰아붙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취재원을 찾아가 삿대질한 저질 기자라면서 마구 끌어내렸다. 당시 동양방송 라디오 제작부장이었던 부군 정인섭 선생에게도 끝없는 압력이 들어왔다. 동양방송 회장, 사장 그리고 직속상사가 수시로 불렀다. “도대체 자넨, 마누라한테 어디까지 양보하려고 그러나?” 수없는 핀잔을 들었던 정인섭 선생. 속으로 ‘사장님, 회사와는 평생 살 수 없지 않습니까, 마누라하고 살아야지요.’하고 부르짖으며 견뎠다. “맨 주먹뿐인 우리들은 법에 호소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 안 가본 곳이 없어요. 재판소서부터 중앙노동위원회다, 어디어디, 호소할 만한 데는 다 쫓아다니면서 호소를 했어요.” 그렇지만 사방은 온통 벽뿐이었다. 길고 긴 법정 싸움. 그 가운데 힘이 되어준 이들이 있었다. 동료기자 반대증언, 또 범여성가족법개정촉진회 실무 간부 증언, 그리고 무료변론을 맡아준 변호인이 있었다. 이창숙 박사는 세상 정의가 다 사라지지 않았음에 고마워했다.

“제가 스님을 처음 뵌 때가 73년 여름인데 74년 12월에 쫓겨났거든요. 그러니까 스님 알고 난 뒤에 한 1년쯤 지나서 일이 벌어졌어요. 그 때 스님은 운동권인사셨다고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함석헌 선생이나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 선생과 많은 활동을 하셨지요. 특히 스님께선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굉장히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렇다고 제가 스님 영향으로 노조를 한 건 아니에요. 제 삶 현장에서 제 가치관에 따라 벌인 일이었어요. 그렇지만 해직되고 나니까 그때 분위기로 제가 찾아갈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스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죠. 스님도 민주화운동을 하시던 참이라, 누구보다도 먼저 공감을 해주시고 감싸주셨어요. 그렇게 스님하고 저하고는 코드가 너무나 딱 맞았어요. 정말. 그냥 여성신도와 스님 관계를 넘어서는 동지의식이 있잖아요.”

지루하고 긴 법정싸움은 7년을 끌었다. 법정공방이 길어지자 노조원들 관심은 점차 식어만 갔다. 점점 외롭고 버거운 싸움이 되어갔다. 외톨이가 된 이창숙 박사는 결국 이 정권 아래서는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81년 7월 법원에 행정소송절차중단신청서를 냈다. 그렇게 7년을 넘게 끌던 싸움은 소득 없이 마무리됐다. “서른네 살 먹은 여자가 7년을 싸우고 나니 마흔 줄에 접어들었더라고요. 74년에 시작한 싸움이 81년에…, 해볼 수 있는 방법이란 방법을 다 쏟아 부었지만 결국 멈췄어요. 우리 바람은 법으로 보장받는 노조였어요. 그런데 실패했죠. 7년 세월. 그동안 제가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까? 돌이켜보니 버팀목은 결국 식구들하고 법정스님이었어요. 스님은 100% 제 편이었어요. 정치,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스님 판단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어요.” 그렇게 재판소 노조였던 한국일보 노조는 1981년, 걸리지도 않았던 간판을 내려지고. 그로부터 6년 뒤인 1987년, 6·29를 맞고서야 간판이 다시 올라간다.

그러나 언론사 최초 노조 결성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기록조차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던 이창숙 박사를 비롯한 관계자 몇 사람이 모였다. 사건이 있은 지 서른 해를 훌쩍 넘긴 2005년. 비록 실패한 기록이지만 어차피 역사란 시행착오를 벌이면서 진화하는 게 아닌가. 관계자들은 그냥 묻어둬서는 안되겠다고 의견을 모으고 자료를 찾았다. 그런데 자료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전두환 장권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다들 자료를 모두 없애버렸어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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