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불법의 대의가 무엇입니까?
스님, 불법의 대의가 무엇입니까?
  • 윤창화 민족사 대표
  • 승인 2011.06.17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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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화의 선원총림을 가다 35 - 선문답의 방법과 방식
▲ 2002년 부산 해운정사에서 열린 한중일 무차선법회에서 법거량하는 진제 스님과 묵산 스님

당대(唐代) 조사선의 선승들은 상당법어와 선문답 등 각종 법어를 통해 고준한 선어록을 남겼다. 마조도일, 백장회해, 조주종심, 운문문언, 임제의현 등 선승들의 법어는 정법의 눈(正法眼)을 열어주는 청량한 말씀으로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선의 바다를 만들었다. 당대(唐代)의 선, 조사선은 곧 ‘공안 형성의 시대’ ‘선문답의 시대’였다.

반면 송대의 선은 당대 선승들이 남긴 선어록이나 선문답ㆍ공안을 가지고 공부하는 시대, 해석, 주석하는 시대, 우려먹는 시대였다. 송대에는 유명한 공안이 별로 없다. 있어도 깨달음의 문을 여는 공안이 되지 못했다. 간화선의 시대에서도 전해지는 선문답은 모두 당대의 것이다.

선(禪)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 선승과 선승, 또는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는 격외의 대화, 방외(方外)의 대화를 ‘선문답(禪問答)’이라고 한다. ‘선을 주제로 나누는 문답’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법거량(法去量, 法擧揚)’이라고 하는데, ‘법(法)을 재어본다’ ‘법을 제시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는 ‘법담(法談)’이라 한다.

선이 중국으로 건너온 이후 최초의 선문답은 달마와 제자 혜가 사이에 오고간 ‘안심법문(安心法門)’이다.
“그대의 그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오면 편안하게 해 주겠다”는 달마의 말에 혜가는 온 사방을 뒤져도 괴로운 마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고심(苦心)의 실체가 없음[空함]’을 통해서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달마의 안심법문 이후 새로운 많은 선문답이 탄생했다. 그 때마다 한 명의 깨달은 선승이 탄생했는데, 유명한 선의 역사서인 <전등록>에는 무려 1700가지나 되는 공안(선문답)이 수록돼 있다. 여기에 수록된 선문답은 참선자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지남(指南) 혹은 방편이 됐다. 수행자는 세속적인 틀을 벗어난 격외(格外)의 문답(대화)을 통해 관념의 지옥으로부터 탈출해 진리의 당체를 직시한다.

선문답은 중국 선불교가 낳은 독특한 형태의 대화방식이다. 중국 한당(漢唐) 시문학의 고수(高手)들은 만나자마자 싯구 두세 수(首)를 주고받으며 상대의 실력을 가늠했다. 여기서 꺾이면 하수(下手)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은 또한 중국 장수들이 전장에서 상대 장수를 맞닥뜨려서 기(氣)로, 혹은 비수(匕首) 같은 언어로 상대를 제압한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선문답의 형태는 독자들도 익히 알겠지만, 여기서 한두 가지 선문답의 예를 보도록 하겠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영운(靈雲志勤, ?~866) 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선사, 불법의 대의는 무엇입니까(如何是 佛法大義)?”라고 묻자 영운 선사는 직답을 회피하고 빙 둘러서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당나귀의 일도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다가왔다)”라고 답했다.

‘불법의 대의(大義)’에 대해 물었는데, 영운 선사는 엉뚱하게도 ‘여사미거 마사도래’라고 답했으니, 이야말로 상식이나 사유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어지간한 질문자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자고로 길이 있으면 흔적이 있게 마련이고 언어가 있으면 뜻이 있게 마련이다. 선사의 답어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지만 하수는 그것을 포착하지 못할 뿐이다. 여기서 그 누구든 정곡을 찌르는 답을 한다면, 아니면 저절로 “하하”하고 너털웃음을 친다면, 그는 영운 선사의 경지에 이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결국 그의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화두가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선문답을 보자.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 ?~949)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진리)입니까?” 운문 선사는 “간시궐(乾屎?, 마른 똥 막대기)”하고 대답했다. ‘간시궐(마른 똥 막대기)=부처(진리)?’ 이야말로 중국 선종사상(史上) 천하의 고수들의 입을 틀어막는(坐斷天下人舌頭) 공안이다. 운문 선사의 말뜻을 안다면 그 자리에서 깨닫는 것이고, 모르다면 간시궐은 역시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이상과 같은 방식의 대화를 ‘선문답(법거량)’이라고 하는데, 선문답이나 법거량에는 어떤 정해진 형식이나 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형식이나 방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무형식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선문답은 매우 짧다. 문답은 보통 두세 번 정도에서 끝난다. 길어도 4~5번을 넘지 않는다. 전개 방식도 방외(方外)ㆍ격외(格外)이다. 이것을 활구(活句)라고 한다. ‘생명을 주는 말’,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살아 있는 말’이라는 뜻이다. 4~5회 이상을 넘으면 깨달음을 열어 주는 선문답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분별적인 사고로 몰아넣는 사구(死句, 죽어 버린 말, 무의미한 말)가 되어 버린다. 

선문답은 대부분 1:1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간혹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때도 있다. 예컨대 하안거나 동안거가 시작되는 결제일이나 끝나는 해제일 법어, 또는 기타 상당법어가 이에 해당된다. 이 때는 방장이나 조실 스님이 많은 대중 앞에서 법문을 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 

선문답은 즉문즉답(卽問卽答)으로 진행된다. 양자가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안 된다. 머뭇거리면 그것은 벌써 분석적 사고, 사량분별, 즉 알음알이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 체화, 생활화됐다면 선의 대화는 아무런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와야 하고 말끝마다 진리의 당체를 가리키는 언어가 돼야 한다. 분별의식, 알음알이에서 나온 말은 깨달은 자의 언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활구문답이 아닌 사구문답이다. 

그렇다고 ‘여사미거 마사도래’, ‘간시궐’, ‘마삼근’ 등 선문답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괴변이나 또는 즉흥적인 만용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언뜻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만, 선문답에는 일정한 기준과 치밀한 선의 논리가 바탕하고 있다.

선문답의 기준, 선의 논리는 바로 공(空)사상ㆍ무아(無我)ㆍ불이(不二)ㆍ중도(中道)ㆍ무집착(無執着)ㆍ무분별(無分別)ㆍ몰종적(沒?迹)ㆍ무심(無心)ㆍ일체유심조ㆍ불립문자ㆍ언어도단ㆍ부사의(不思議) 등에 바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선사상에 바탕한 언어, 선의 세계를 드러낸 언어가 아니라면 그것은 선문답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깨달음을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없다. 선시(禪詩)와 오도송도 여기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선시도 오도송도 아니다.

선문답은 두세 가지 정도 역할을 한다.

첫째, 선승과 선승 사이에 주고받는 선문답은 상대방의 경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물론 여기서 하수는 고수에게 한 수를 배운다. 하수는 고수들과의 많은 실전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가 더욱 단단해 진다. 무른 쇠를 불에 달구었다가 물에 넣기를 반복하면 강철이 되는 것과 같다. 중국 선종사에서 수천 명의 선승이 나타났지만, 산문(山門)을 개창한 이는 30명 정도에 불과하다. 쇠를 녹여 쟁기를 만드는 기술은 대종장(大宗匠)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처럼 수백 명을 지도해 부처로 만드는 기술은 정법안장을 갖춘 노련한 선승이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제자와 나누는 선문답은 제자로 하여금 그 즉시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만일 제자가 그 자리에서 깨닫지 못하면 돌아가서 참구해야 한다. 이 경우 그 말은 참구해야할 화두가 된다.

셋째, 깨달음의 여부를 점검하는 역할을 한다. 깨달음을 검증하는데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선사만이 알 수 있다. 그 검증 방법이 바로 선문답 또는 오도송이다. 선문답이나 오도송 등을 통해 그의 경지를 가늠한다. 선문답은 오늘날 일반적인 상식이나 논리로 전개되는 대화(토론)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그 이유는 선의 기준과 논리, 가치관은 세속적 논리, 세속의 가치관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세속의 가치관은 지식과 물질적인 소유를 추구하지만 선은 지식을 부정하고 무소유를 추구한다. 세속에서는 부모·자식·부부간 등 모든 면에서 애착이 바탕이 되지만 선은 무집착을 추구한다. 근본적으로 선이 추구하는 바와 세속이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주제도 대화 방식도 다른 것이다.

선은 공안, 화두를 참구해서 깨달음을 이루는 수행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깨달음 여부를 가릴 수 있는 공식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저 수행자가 깨달은 것인지’ ‘화두를 타파했는지’ 그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은 아무 것도 없다. 몇 년을 참선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고, 대학입시처럼 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니다. 방법은 오직 선문답을 통해  또는 그가 지은 싯구를 통해 깨달음 여부를 가늠한다.

선문답(법거량)을 통해 상대방을 가늠하려면 선사의 안목이 탁월해야 한다. 뛰어난 안목과 식견, 혜안과 통찰력을 가진 유능한 선사는 상대방의 한 두 마디 말만 들어보면 곧바로 그 경지를 간파할 수 있다. 언어와 행동에 드러난 그 사람의 면면은 아무리 가식을 부려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세 마디에 파악 못하면 그는 탁월한 선사, 법안을 가진 조실이 아니다.

선문답을 통해 깨달은 것이 확인되면 스승은 제자에게 인가 증명을 내린다. 이때 스승은 그 징표로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발우(鉢盂)나 가사(袈裟)를 하사한다. 물론 제자로서는 일생일대의 기쁜 날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는 조용히 그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더욱 치열한 수행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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