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는 반만 필 때 운치가 있고, 벚꽃은 활짝 피어야

▲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매화는 반만 필 때 운치가 있고, 벚꽃은 활짝 피어나야 여한이 없다

봄볕이 완연하고 벚꽃잎이 눈발처럼 날리는 4월 중순 은평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신춘은평휘호전시장에서 법정스님 길상사 법회 때마다 10년 넘도록 스님을 외호했던 벽파碧坡 홍기은 거사(71)를 만났다. “처음모실 때는 굉장히 깐깐하셨어요. 부처님오신날 극락전 앞에 처마 좌우에 큰 연등을 걸잖아요. 그 연등에다가 ‘법정 대화상’이란 꼬리표를 달아놓은 적이 있었어요. 스님께서 보시고는 ‘저거 왜 달았어?’ 그러세요. ‘모르겠습니다.’고 말씀드리니 ‘떼어요.’ 이러시는 거라. 난처해서 ‘스님들이 붙이신 걸 제가 어찌 뗍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손수 떼어버리셨어요.” 세상에 큰 스님 작은 스님이 어디있냐시던 어른이니 마음이 편치 않으셨으리라. 풀 먹인 모시적삼처럼 손을 스치면 베일 것처럼 자신에게 엄격한 어른이셨다.

웃어, 웃어! 동네어르신처럼
부드럽고 도타운 어른스님

“처음에는 주차장에서 행지실로 모시고 갈 때 그냥 별 말씀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시거나 ‘여기는 벌써 꽃이 피네?’ 하면서 한 두 마디 겨우 입을 떼던 어른이 날이 가고 해가 바뀌면서 그 날카롭던 성격이 많이 누그러지셨어요. 시간이 갈수록 얘기도 하고, 웃기도 하시면서 살가워지셨어요. 2008년도인가? 행지실 문 앞에 있으니까 외호하던 사람들 몇몇이 함께 들어오라고 부르셨어요. 나보고 당신 왼쪽에 앉으라고 하시면서 사진을 찍자고 하시는 거야. 몸이 편찮으셔서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오셨지만, 내색을 안 하셨어요. 뭐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까. 우리도 감히 어떠신가 여쭤볼 수도 없고 그러던 차에 부르셔서…, 어렵고 조심스런 어른이 사진을 찍을 때 ‘웃어, 웃어!’ 그러시면서 부드러운 동네 어르신처럼 말씀하시더라고.” 스님은 늘 상대 처지를 헤아리셨다. 이런 걸 불편해 하는구나. 이러면 좋아하는구나 싶으면 바로 당신을 맞추셨다.

늦어도 강원도로 떠난 뜻은
절에 주지가 둘이면 안 돼

“어지간하면 길상사를 빨리 떠나시려고 하셨어요. 빠를 때는 점심공양 끝나고 바로 가시기도 하고, 언젠가? 사월초파일 길상음악회를 하던 날. 늦게 끝났어요. 그 바람에 밤 열한 시 넘어서가셨어요. 그런 날은 주무시고 가실 만도 한데 그냥 가시더라고요. 그래서 ‘아휴 늦어서 너무 피곤하실 텐데 운전이라도 제가 해드릴까요?’하고 말씀드렸더니 ‘안 돼!’ 그러시더라고. 밤 열한 시가 넘어서 가셨는데 몇 시나 돼서 도착하시겠어요? 연세도 있으신데. 그 모습을 뵈면서 참 너무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길상사를 빨리 떠나시려고 하는 까닭을 급한 성정 때문이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작 까닭을 알고 보니 깊은 생각 끝에 나온 결단이었다. “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이해가 가더군요. ‘한 절에는 주지가 둘이 있으면 안돼요. 아니 할 말로 나 보러오지, 주지 보러오겠어요?’ 그러시면서 그러면 주지가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고. 당신이 있으면 질서가 서지 않는다는 말씀이셨어요. ‘마음은 닦는 게 아니라 쓰는 것’이라던 당신 말씀처럼 마음씀이 남다르셨지요.” 결국 법정스님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어쩔 수 없이 길상사에서 하루를 묵으셨다.

“강원도에서 손수 차를 몰고 오시니 얼마나 힘이 드시겠어요. 남이 모는 차를 타도 힘이 드실 연치에. 어떤 때는 청향당에 모셔서 한두 시간 쉬게 해드렸어요. 행지실에는 손님이 자꾸 찾아오니까. 차를 몰고 먼 길 가실 생각을 하면 손님이 찾아왔다고 차마 말씀드리기 어렵더군요. 그래서 스님께서 잠깐 바깥나들이를 나가셨다고 둘러대곤 했어요. 그렇게 쉬고 나시면 한결 몸이 가뿐하신가 봐요.” 나이 들어가는 스님을 곁에서 뫼시면서 느끼던 안타까움이 깊이 배어나는 벽파거사 눈매가 그윽하다.

“한 번은 행지실 올라가시다가 길섶에 핀 야트막한 꽃을 보고 ‘벽파거사 이게 무슨 꽃인지 알아?’ 물으셔요. 조그맣고 땅바닥에 붙어있어서 ‘잘 모르겠습니다.’고 말씀드리니, ‘볼품없지? 가까이 들여다봐야 보이니까. 가장 순수하면서 끈질긴 들꽃이라고…’ 그러셨어요. 뭔가 이름도 알려주셨는데 기억이 나진 않아요. 그 다음부터는 길섶에 핀, 작아서 눈에 띄지도 않던 꽃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참 곱더라고.”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싯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보면 스크린 도어에 가끔 시를 하나씩 써놨잖아요. 어느 날 ‘들꽃’이라는 시가 번쩍 눈에 띄었어요. 제목이 들꽃이라, 어른스님한테 자주 들었던 얘기가 있었으니까. 문효치란 시인이 쓴 시인데 간단해요. ‘누가 보거나 말거나 피네. / 누가 보거나 말거나 지네. / 한마디 말없이 피네. 지내.’ 아무튼 참 이 시인이 대단하다 생각했어.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 살뿐이라는 말이잖아요. 진리에요. 불법佛法을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야! 나한테 이런 시를 만나는 행운이 찾아오다니 그것도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서…’ 필기도구가 없어 가, 핸드폰카메라로 찍어가지고 집에 와서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정리해 함께 서예공부를 하는 사람들한테 프린트해서 돌렸어요. 인생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다보니 모두 감탄을 하는 기라. ‘아! 좋다고.’ 그런데 체육관에 같이 다니는 젊은 사람들한테 주니까 반응이 별로야. 삶이 무르익어야 비로소 와 닿는 이야기를 철부지들이 어찌 알겠나 싶더구먼.” 피카소는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그리기까지 50년이나 걸렸다.

“스님은 우리 나무나 꽃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봄이 되니까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고, 꽃이 피니까 봄이 온다.’고 하셨던 말씀이 떠오르네요. 스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다 법문이고 시에요. ‘매화는 반만 피었을 때 운치가 있고, 벚꽃은 남김없이 활짝 피어나야 여한이 없다. 복사꽃은 멀리서 봐야 제대로 누릴 수 있고, 배꽃은 가까이서 볼 때 그 맑음과 뚜렷함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걸 어떻게 아셨느냐 말이에요. 스님 말고도 오천만 국민이 다 봤는데, 몰랐잖아요. 스님 눈엔 어떻게 그런 게 다 보이시는지 참.” 무엇하나 허투로 보는 법이 없으셨던 법정스님은 늘 알아차림 가운데 계셨다.

법정스님과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할머니, 어머니가 모두 독실한 불교신자였어요. 그러니 모태신앙이라고 봐도 될 거야. 자연히 우리 집 사람도 따라다녔어요. 고부가 완전히 불교에 홀딱 빠졌어요. 그렇지만 나는 분위기만 젖어있었지 절에 잘 다니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집사람이 어느 날 <무소유>를 비롯한 스님 책을 몇 권 가져다 줬어요. ‘보니까 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길상사엘 가게 됐어요. 어느 날인가 법당에서 나오니까 집사람이 거사림 입회신청을 떡 해놓은 거라. 그 뒤로 일요일엔 어지간한 일은 미루고는 길상사로 가는 일을 1순위로 삼았어요. 거사림 회원이 되고 처음 돌아온 사월초파일 날 거사림 회장이 나보고 어른스님 외호를 맡아달라고 해서 스님과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오시는 시간부터 가실 때까지, 행지실에서 면회객들도 통제를 하고, 나중에는 아예 종무소에서 주차장 키도 나한테 맡겨놓고 그랬어요.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행사 때 김수환 추기경님이 오시면 안내해 드리고, 원불교 교무님이나 수녀님들이 오시면 또 그 카고, 그러다보니까 어른스님 둘레 분들은 대강 알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3박4일 여름 선 수련회를 두 번 동참했어요.” 처음 수련회 때 ‘벽파碧坡’라는 법명을 받았다. ‘푸른 언덕’, 법정스님 출가에 앞서 쓰던 호가 ‘청산靑山’이었던 걸 떠올려보면, 각별하다. 그 각별한 푸름 때문일까? 벽파거사가 늘푸른 군인들을 위해 군포교에 나선 지 12년이 넘는다. “우리 막내가 공군 출신 아니요? 그 애가 군에 있을 때 일요일이면 어디 갈 때가 없으니까 군법당엘 가서 천수경하고 반야심경을 다 외운 거라. 군법회가 군인들을 오리지널 불자들을 만들더구먼. 막내 때문에 군포교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어요. ‘우리가 군법당 다니는 일은 진짜 잘 하는 일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벽파거사는 지금도 둘째 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국군벽제병원에 있는 군법당, 자견사自見寺를 찾는다.

법정스님을 만난 행운아
스님! 그리워서 그립니다

입적하신 날이 3월11일 목요일 벽파거사가 서예공부를 하고 있는데 거사 한 분이 어른스님이 삼성병원에서 길상사로 출발하신다고 전화가 왔다. 단걸음에 길상사로 달려갔다. 그 때가 오전12시 반. “2시 다 되서 길상사 범종이 울렸어요. 한없이 울었죠. 다비식 끝날 때까지 집엘 들어가지 못했어요. 며칠 전에 TV를 보는데 장사익씨 노래 ‘봄날은 간다.’가 나오데요. 그 노래를 들으면서 또 어른스님 생각도 나서 눈물을 흘렸어요. 이거 어떻게 좀 깨어나야 하는데, 스님 생각만 하면 눈물 바람을 해요. 스님이 내가 이렇게 집착하는 거 좋아하지 않으실 낀데. 스님이 ‘벽파 너무 집착하지 마. 나, 별나라 어린왕자하고 같이 잘 있는데 너무 그러지 마라.’시면서 보고 계실 것 같아요.” 부처님열반도를 보면 제자들은 물론 사천왕들도 이젠 외호할 부처님이 안 계시다는 슬픔에 땅을 치고 통곡한다. 보고 싶고 그리워서 그린 게 그림이고, 그림 솜씨가 없는 사람이 궁리 끝에 만든 부호가 글씨라는데 떠난 분을 그리워함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벽파거사는 제8회 신춘은평휘호대회에서 일반부 한글부문 대상을 탔다. 서예공부 3년 만에 이룬 쾌거로 가르친 선생을 비롯해 둘레 분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다는데…. “저하고 같이 서예를 시작한 사람들은 모두 한문서예를 했어요. 그런데 저만 유독 한글서예를 했어요. 스님 글 ‘미리 쓰는 유서’를 보면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고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어른스님을 떠올리면서 한글서예를 했어요. 스님은 말씀도 참 쉽게 하세요. 아름다운 우리말 표현, 우리 식구는 ‘텅 빈 충만’ 이 말에 반했대요. 어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느냐. 너무 말이 멋지다 이거야. 텅 빈 건데 ‘충만’이라니. 그래서 내가 ‘이 사람아 그게 공空이다 공.’이라고 했어요. 참 대단하시지 않아요? 스님이 한글을 아름답게 빛내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셨어요. 세종대왕께서도 반가우셨을 거야.” ‘만남은 눈뜸이다. 친구는 내 부름에 대한 응답.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사회적 메아리를 뜻한다.’처럼 스님께서 풀어내신 주옥같은 표현들이 셀 수 없다.

“우리 집 보살이 가끔 ‘당신은 법정스님을 만난 게 참 행운이에요.’ 그래요. 그러면 내가 ‘아암. 행운아지 당신 때문에 다 그리됐으니 당신이 내 생애 최고 행운이자 선물이지. 당신이 스님과 엮어주지 않았으면 내가 무슨 복에 스님을 뵈었겠어?’ 그러지요.” 은근히 당신 복밭을 자랑하는 팔불출 벽파 거사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해진다.

“법정스님쯤 되시면 대단히, 우리하고 다른 큰 뭔가가 있지 않겠나? 여기는데 격 없이 소탈하고 누구한테든지 편안하게 대하시곤 했어요. 뭐랄까? 아주 평범한 농부처럼 꾸밈이 없으세요. 이 시대 큰 어른이셨지요. 꼭 어떤 뭘 배우지 않더라도. 스님이 세상에 계시는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고 울림이었잖아요. 현장스님 말마따나 한국사람으로 태어나서, 티벳스님처럼 사시다가 인도스님처럼 가셨어요. 스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죠.” 법정스님 입적 뒤에 더 열심히 길상사에 나가고 맑고 향기롭게 회원 만남의 날에도 빠지지 않는다는 벽파거사. “스님께서 길상사를 10년 동안 받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치시다가 ‘그럼 맑고 향기롭게 활동을 하지 않을 작정이냐?’는 맑고 향기롭게 회원들 얘기를 받아들여 길상사가 생겨났잖아요.” 법정어른스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깊어, 우짜든지 ‘맑고 향기롭게’와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스님 뜻을 잘 받들어 맑고 향기롭게 거듭나는데 힘을 보태는 게 당신 몫이라고 여긴다는 벽파거사, “새는 머리나 날개로만 날지 않고 온몸으로 난다.”며 말씀을 거둔다. 이 말씀 끝에 조계종군종특별교구장을 지내셨던 일면스님 말씀이 떠올랐다. “느그는 주불主佛해라! 난 후불탱화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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