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전하려던 메세지는 깨달음이 아니다

▲ 훨훨 벗어 버렸듯 법정 스님에 대한 회고도 그랬다. 아쉬움, 미련 이런 것들은 없었다.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범종은 하루 세 번 울린다. 아침 예불, 점심 마지, 저녁 예불 때. 예외가 있다. 수행자가 입적했을 때 108번을 울린다. 열반 종소리다. 삶을 깊이 되돌아보는 삶과 죽음을 벗어난 소리다. 한 생을 마감하는 장중한 느낌이 담겨 있어 순식간에 산중을 섭섭하고 엄숙하게 이끈다. 출가한 이는 너나들이 이 종소리를 들으며 시공간을 버리고 떠난다. 2010년 3월 11일 오후 1시 51분. 때 아니게 길상사 범종이 울렸다. ‘수행은 겸허와 청빈 그리고 엄숙함과 청정을 주춧돌로 삼는다.’는 법정 스님이 생전에 사신 모습 그대로를 소리에 담아.

“집이 워낙 가난해 가지고 초등학교 때부터 나무를 해서 학비를 벌었으니까. ‘쟤는 나무를 해야 학교를 다닐 수 있다.’고 선생님들이 인정을 해줬어요. 그래서 결석을 터놓고 한 해에 석 달은 했어요.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나무꾼이었어요. 십대까지는 그 별명이 참 싫었어요. 창피했는데. 이십대 지나면서부터는 그게 내 문화 재산 가운데 하나로 등록되더라고. 아이 셋을 낳았어요. 나무꾼이 아이를 둘을 낳으면 선녀가 날아가 버리는데, 셋을 낳아서 도망치지 못했어요.” ‘메주와 첼리스트’로 널리 알려진 돈연 스님(66)을 강원도에서 만나야 제격일 텐데 서울에 있는 도완녀 신당에서 마주 앉았다. 25년 동안 수행한 학승 돈연 스님은 첼리스트 도완녀(58)와 93년 결혼한 뒤 두타산기슭에 메주공장을 차리고 신접살림을 시작해 대처승이 되어 세 아이를 얻었다. 두 딸은 여래와 문수, 아들은 보현. 모두 부처와 보살 이름이다.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데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 고민을 많이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사는 일도 재미있겠다. 여자하고 산다든가 애를 낳는 일이 불결한 일은 아니지 않느냐.’ 제 생각엔 이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일단 산중을 떠나는 일은 불교수행자로서는 타락으로 봐요. ‘네가 나가서 뭘 하든지 상관이 없이 여기 나가면 끝이야!’ 맞지 않는 말이죠.”

돈연 스님과 법정 스님 인연은 40년 가까이 된다. 처음엔 그저 먼발치서 종단 어른으로 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1973년도에 돈연 스님이 역경원 연수생으로 들어가면서 법정 스님을 뫼시고 살게 되었다. “그때 연수생을 강사급 가운데서 뽑았어요. 한 열 명쯤 뽑으려고 했는데, 국어점수가 된 사람이 다섯 명 뿐이 안됐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국어점수가 저만 60점이 넘고 나머지는 다 낙제였답니다. 운허스님이 생각해 보니까 큰일 났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점수가 좀 괜찮은 스님들을 가려서 법정 스님한테 부탁을 했답니다. 과락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법정 스님이 국어를 담당하시고 운허 스님이 경전, 운기 스님이 화엄경, 그리고 각성 스님, 월운 스님, 홍정식 교수 그밖에 동대 교수들이 강의를 맡았어요. 학생이 다섯 사람이었는데 선생이 여덟 분이었습니다. 이년 과정이었어요. 법정 스님은 역경원 간사를 하셨어요. 교무처장 비슷한 직책이죠.” 스승 여덟에 학생이 다섯, 일대일도 넘으니 숨소리까지 놓치지 않을 목숨을 주고받는 탄탄한 도제 교육이다. 돈연 스님은 그 뒤로 79년도까지 법정 스님을 모시고 살았다.

▲ 승복을 벗어던지고 만난 수많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천착이 스님을 더 자유롭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법정 스님은 71년에 <영혼의 모음>을 76년에 <무소유>를 냈다. “사실 70년 대 후반까지만 해도 베스트셀러라도 돈이 별로 되지 않았어요. <영혼의 모음>을 처음 낸 출판사에서 인세를 주지 않았어요. 책은 팔렸다는데 우리가 변두리 서점들 가서 책을 보면 인지가 붙어있지 않았어요. 그러면 그걸 걷어다가 항의를 하곤 했죠. 제가 그 심부름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출판사를 여러 번 옮겼어요. 그리고 꽤 얼마 있다가 와다나베 쇼코가 지은 <불타 석가모니>를 스님이 번역을 하셨어요. 그때는 세 권으로 나왔는데, 그때 받은 원고료가 백팔십 만원인가 그랬습니다. 그 돈으로 불일암을 지었지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지난 번 만났던 사촌동생 박성직 선생이 72년 사업체를 내고 나서 몹시 어려워 스님께 어렵사리 돈 부탁을 드렸을 때 ‘출가수행자가 무슨 돈이 있겠느냐?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한 말씀이 떠올랐다.

수행은 닦음과 행동 결합
닦으면 저절로 행동으로

역경원 생활이 바탕이 되어 한 평생을 티벳 장경, 한문 장경, 빠알리어 장경을 두루 읽고 번역하는데 바치고 있는 돈연 스님. “역경원에서 이제까지 책이 한 사백 권쯤 나왔잖아요? 1950년대부터 시작을 했는데 책을 제대로 내기 시작한 때가 60년대부터였어요. 종단에서 돈이 없으니까 봉은사를 내 드렸죠. 그때 봉은사는 끼니가 어려웠습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데가 봉은사였어요. 운허 스님께서 1950년대부터 박정희대통령과 그 전 대통령들한테 꾸준히 탄원서를 올렸어요. 정부도 돈이 없어서 돈을 주지 못하다가 육십 몇 년도든가? 하도 스님이 정성스럽게 꾸준히 편지를 보내니까 이후락 비서실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어요. 그 뒤로 해마다 칠백만 원씩 보조를 받았어요. 그때 서른 평짜리 AID아파트가 삼백오십만 원 할 때니까. 제법 큰돈이었죠. 그 돈을 받아서 번역해서 책을 냈는데 처음 계약했던 출판사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겠는데, 원고를 가져다주면 책을 팔고 나서는 돈을 주지 않아요. 그렇게 한 삼년 동안 돈만 날리고. 그 뒤로부터는 판매부를 직접 둬 가지고 역경원을 만들 때 사무실은 동대 꺼 쓰고. 돈은 칠백만 원씩 받으니까 돈이 좀 모였어요. 동국역경원이 동대소속처럼 되어있는데 그게 아니에요.” 우리나라 역경 사업 기초는 발이 닳도록 애를 쓰신 운허 스님과 법정 스님, 그리고 돈연 스님을 비롯한 역경위원들이 모두 함께 흘린 땀이 모여 이룬 역사이다. 돈이 들어오니까 관리가 쉽지 않았다. 생각 끝에 운허 스님께서 법정 스님한테 실무를 좀 보라고 했다. 그런데 법정 스님이 돈연 수좌는 경영을 좀 할 줄 아니까 맡으라고 했다. “당신은 맡지 않고 나보고 맡으라는데 맡을 수 있나요? 저도 거의 25년 동안 살면서 주지 한 번하지 않고 돈 만지는 소임을 하지 않았어요. 그 스승에 그 제자지. 그래서 ‘스님이 하시면 따르는 게 마땅하지만, 스님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제가 왜 합니까?’ 그랬어요. 그렇게 싫은 일, 궂은일은 하지 않으려는 지식승려들 병폐가 거기 있어요. 현실에 물들려 하지 않고 살려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사실 현장에서 고생하지 않은 사람은 현장 애환을 모르잖아요. ‘진속불이眞俗不二라. 진과 속이 둘이 아니다. 세속과 출가가 둘이 아니다.’고 하지만 말뿐이죠. 역경원에 근무하는 분들 가운데 승려출신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했기 때문에 힘이 없어요.”

“수행이라는 게 뭐냐? 닦음과 행동을 합친 말이죠. 닦으면 저절로 행동으로 나오기 마련인데 닦기만 하겠다는 거예요. 수행은 안팎을 닦는 일입니다. 안으로 마음 안정을 찾고 밖으로 이 사회구조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수행자는 안만 닦고 있어요. 바깥은 죽으나 사나 나 몰라라 하는 절름발이 수행이에요. ‘그냥 산속에 앉아서 머리 깎고 앉아서 가져다주는 밥 먹고 그런 건 누가 못하냐?’는 내 말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 결혼해서 살면서 자기 수입 가운데 많은 부분을 내놓아 끊임없이 어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굳이 승려들이 나서지 않아도 세상은 잘 굴러 가는데. 그러니까 다 내놓자. 사찰 경제 우리가 하지 말자. 왜 우리가 돈 만져야 하냐? 절 살림은 신도들한테 맡기는 게 좋겠다. 돈 내는 사람이 신도들이잖아요. 정, 재가불자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우면 살림살이를 잘하는 여자들, 비구니들한테 맡기자. 우리는 평생을 하루 세끼 얻어먹고 그냥 먹물 옷 정도 입고, 사치해봐야 얼마 안 되니까. 그 정도만 하고, 신도들은 정신 수행에 힘을 쏟기 어려우니까 그 부분만 우리가 맡자. 재가자 가운데는 은행가도 있고, 재테크하는 사람도 있고, 많지 않느냐? 우리보다 살림을 더 잘할 거다.”

돈연 스님도 광주 항쟁을 겪으면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전에는 중은 산중에 살아야 한다.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매어있었는데, 광주 항쟁을 겪으면서 혼란이 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과연 우리 집단은 뭐하고 있느냐하는 자괴심이 들었다. ‘불교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끝내기는 섭섭했다. 그래서 ‘인도에 가서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한 정립을 다시 해보자.’ 마음먹고 인도로 갔다. 일 년 동안 무려 이천 킬로미터를 걸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깨달으신 부다가야, 초전 법륜지, 처음 신도를 받아들인 바이샬리, 그리고 돌아가신 쿠시나가라를 비롯한 십대 성지를 걸어 다녔다. 걸어 다닌 까닭은 ‘부처님도 걸어 다녔을 테니 나도 걷자’는 생각에서였다. 걸어서 성지에 닿으면 첫째 날은 동쪽으로 12시까지 걸어간다. 12시가 되면 멈춰 거기서 다행히 얻어먹을 수 있으면 먹고, 그렇지 못하면 빈속을 달래면서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 보통 오전보다 오후 걸음이 늦다. 빨리 걸어야 오전에 걸은 거리 2/3쯤 걷는다. 그러다보니 늘 밤에 별을 보면서 걷게 된다. 이튿날은 남쪽, 그 이튿날은 서쪽 그리고 그 다음엔 북쪽으로 나흘을 걷고 나면, 사흘은 쉬어야 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렇게 걸었다.

▲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에게서 맡아지는 냄새는 나를 가볍게 했다. 모든 것을 놔 버릴 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가시덤불을 만나면 만난 대로
맹수를 만나면 만난 대로

“한 순례자가 스승이 태어나고 깨닫고 설법하고 돌아가신 길을 따라 무려 이천 킬로미터를 4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목숨을 내놓고 걷는다. 늪에 빠지면 코끼리가 길을 안내하고, 가시덤불을 만나면 만나는 대로, 맹수를 만나면 만나는 대로, 며칠을 걸어도 집 한 채 없는 황야에서 먹을 것이 없으면 굶고, 집을 만나면 차파티 한 조각으로 목숨을 잇고. 끝도 없이 걷고 또 걸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진정 사람다운 참 사람, 부처님이 이 외롭고 쓸쓸한 길을 홀로 걸으며 진리에 목이 마른 중생들에게 깨달음을 나누셨다.” 도완녀 님이 쓴 책 <남편인 줄 알았더니 남편이 아니더라> 한 대목이다.

“걷고 또 걸으면서 느껴보니까 부처님이 살았던 시대를 우리가 너무 아름답게 꾸미려든다는 걸 알았어요. 한국불교는 깨달음을 으뜸 목표로 하잖아요. 부처님이 우리한테 진정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깨달음이 아니죠.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사는 일이 진짜 불교 모습이었어요. 치열한 삶이죠. 거기서 뭔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걸 등급화, 계급화 시켰어요. 그래서 승려집단만이 할 수 있다는 도그마에 빠졌어요.” 걸으면서 ‘당신은 우리한테 무엇을 주려했는가? 또 준 게 있기는 한가? 그리고 내가 한국 사람으로서 부처님한테 치열하게 묻고 답하는데, 부처님이 내게 답을 해줘야할 까닭이 있는가?’를 묻고 또 물었다. 나중에는 ‘내가 2,500년 앞서 살았던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한국까지 책임지느냐? 그건 너희들 일이니 네가 치열하게 생각하고 풀어야할 문제다.’ 그런 답이 저절로 나왔다.

“내가 참으로 세상을 향해서 무얼 이야기할 수 있느냐,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지. 지금 내 옛날 동료들이 뭘 못하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 친구들은 그 나름 열심히 살고 있는 거고. 마치 은행 업무를 하고 있는 사람이나 국방의무를 행하는 군인처럼.” 틀을 벗어던진 사람은 자유롭다.

▲ 정말 존재가 자유로와 질 때 행복해진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돈연 스님은 담담하게 말씀한다. “처칠을 알려면 처칠을 읽어야 하고, 일본을 알려면 일본을 읽어야 하듯, 불교는 부처님이 만든 종교이니 불교를 알려면 석가모니부처를 읽지 않으면 안 돼요. 석가모니라는 사람 삶을 훑어보지 않을 수 없죠. 이것이 첫걸음이에요. 그리고 가장 손쉬운 일이죠.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얻으려고, 그리고 끝내 무엇을 얻어 이웃과 함께했는가를 헤아려야 해요.” 펄펄 살아 숨 쉬는, 사람 석가모니를 만나지 못하고 생생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불자가 아니라는 준엄한 말씀이다.

“내 이웃이 바로 부처이며 예수님이며 천주님입니다. 이 모두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가지들이지요. 불교를 배우는 일은 자기 자신을 배우는 일이며, 자기를 배우는 일은 자신을 텅 비우는 일이에요. 그래야 모든 사물과 하나가 될 수 있어요. 개체인 내가 전체로 퍼져나가는 일입니다. 깨달음이 이웃에 닿지 못하면 그 깨달음은 중생을 잃은 깨달음이에요. 진정한 깨달음은 지혜 완성이자 자비 실천으로 이어져야 해요.” 법정 스님 말씀이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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