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기독교가 만나는 자리① 강남대 이찬수 교수(종교문화연구원 원장)


대안연구공동체(대표 김종락)는 3월 21일부터 서울 서교동 서교빌딩에서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는 자리’를 주제로 9주간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강좌는 이찬수 강남대 교수(종교문화연구원 원장)가 맡았다. 이찬수 교수는 “불교의 핵심사상인 연기, 무아, 공, 보살, 불성, 여래장, 유식 등과 기독교 신학의 중심 개념을 비교하면서 두 종교 간 접점을 진지하게 모색할 것”이라며 “불교와 기독교 간 오해에 기인한 상호 갈등의 골이 조화와 평화로 역전되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강의주제는 △붓다와 예수 △공(空)과 하느님 △대승기신론과 신학의 구조 △열반과 하느님 나라 △보살과 예수 △불성과 하느님의 모상 △자력과 타력 △보신불과 그리스도의 몸 등의 주제 △<대승기신론>과 <요한복음>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수업 방식은 강의와 토론으로 진행한다. 강의는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30분에 열린다. 강의 교재는 길희성 前 서강대 교수의 <보살예수>, 이찬수 교수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인간은 신의 암호>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불교와 기독교는 코드가 맞는 종교 ‘보편성과 세계성’

“불교와 기독교는 사상의 현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코드’가 맞는 종교이자 심층적 문법이 맞는 종교다.” <보살예수>
인간의 상통성을 살펴보는 최고의 수단은 동양사상의 핵심축인 불교와 서양사상의 핵심축인 기독교에 있다. 두 종교는 겉보기에는 이질적인 것 같지만 드러나지 않은 깊고 넓은 세계에 상통하는 면이 상당히 많다.
두 종교는 교리나 사상의 현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코드가 맞는 종교이자 심층적 문법이 맞는다. 지구상에 등장하는 종교. 최고의 가르침에는 ‘보편성과 세계성’이라는 상통점이 있다. 20세기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우리시대 최고의 사건은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두 종교의 ‘만남’은 진리의 보편성을 잘 보여준다.

수 천 년 진리의 보편성을 확인해온 종교는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동서양을 대표하는 세계 양대 종교이다. 민족적 특수성을 넘어 누가 들어도 수긍할 만한 보편성과 세계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온 인류를 향해 적극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선교적 종교로서, 인종ㆍ지역ㆍ문화를 초월해 전해지고 있다.

이슬람교는 약간 관점이 다르다. 이슬람교는 보편성을 지녔으나 삶 전체를 율법이라는 성스럽고 정형화 된 행위, 곧 종교적 의례(ritual)로 살도록 명하는 종교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해 한ㆍ중ㆍ일은 물론 태국ㆍ미얀마ㆍ스리랑카 등 동남아시아 서아시아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불교는 동양사상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앞으로 불교를 모르고서 미래세계 종교지도를 그리기 힘들다. 미국에도 불자는 400만 명이 넘으며, 프랑스도 가톨릭이 주도적인 나라이지만 가톨릭을 제외하면 불교신자가 많고, 영국도 불교도가 늘어가고 있다. 불교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각광 받고 있는 사상이자 영적 운동이며, 심대한 변화를 일으킬 종교다.

하지만 전 세계에는 100년 전 이래 사유와 인식, 외적인 삶의 형태인 의식주가 서양적 패러다임으로 바뀌었다. 서양적 패러다임의 핵심은 기독교다. 배타적 기독교인이 한국 사회에 문제점을 일으켜 삼류종교인 것처럼 보여 굉장히 안타깝지만, 기독교의 심층을 살펴보면 서양사상의 근간이자, 세계정신사회의 한 축으로서 자리매김해 올 만한 자격이 있다.

#붓다와 예수는 닮은꼴

붓다와 예수는 ‘나’의 문제를 해결한 영적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자기와 세상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초월을 통해 철저히 변화된 자기와 세상을 갈망했다. 도덕적ㆍ영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존재, 새로운 세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들 삶의 추동력과 원동력은 자기 내면의 문제가 해결된 이의 에너지다. 이 에너지가 사회와 주변을 변화시켰다. 예수와 붓다가 일으킨 혁명의 파장과 파고, 충격과 열기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비록 약화되기도 하고 타협ㆍ변질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인간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초월적 구원을 추구하는 영적 혁명은 무엇보다 자기부정에서 시작한다.
불교에서는 무아의 진리를 철저히 깨달아 거짓된 자아와 아집을 버리는 영성을 추구하고, 기독교에서도 십자가가 상징하고 있듯이 자기 부정의 영성을 추구한다. 진정한 생명, 구원은 탐욕과 무지가 판치는 현세적 질서와 치열하게 대결하고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불교나 기독교는 세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초월을 이야기 한다. 두 종교의 세계성은 보편적ㆍ초월적ㆍ영적 인간관에 기인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그 근원을 추구한다.

붓다와 예수는 가장 순수하고 자유롭게 살았다. 가족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세속적 질서를 떠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소유하거나 바라지 않는 무소유와 무욕의 삶을 살았다. 또 무차별적 사랑, 완전하고 순수한 사랑과 자비로 모든 사람을 품었다.

불교와 기독교의 열반, 해탈, 구원 등은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불교에서는 초월을 열반, 정토, 불국토, 해탈, 법계 등으로 부른다. 기독교는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늘나라’라고 했다. 언어는 다르지만 열반과 하느님 나라의 관계는 이질적이지 않다. 하늘나라는 구름너머의 특정 공간이 아니다. 인간의 지배체계에 따라 돌아가는 차별적 세상이 아닌, 신의 다스림을 말한다. 해가 누구에게나 고루 비추고, 비가 누구에게 고루 내리 듯, 남녀노소, 빈부귀천 없이 동일한 은총을 베푸는 세계다. 현실을 현실 되게 하는 근원의 세계다. 하느님 나라는 열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불교나 기독교는 자신을 바꾸는 데에 더 큰 무게 중심이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인간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해야한다는 것이다. 언어상의 차별성은 있지만, 그것이 구원, 해탈, 열반이다. 불교나 기독교는 종교학적 용어로 말하면,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다. 구원은 현실에 안주하고 집착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실에 있으면서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힌두교와 불교의 관계,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매우 비슷하다. 기독교는 유대교라는 민족종교가 그리스 철학과 만나면서 세계 보편종교로 거듭났다. 불교는 힌두교라는 인도 민족종교에서 출발해 세계 보편종교가 됐다.

불교는 힌두교의 다르마(dharma, 法) 개념을 수용했으나 그것을 보편적 윤리, 내면적 윤리고 승화했다. 불교의 다르마는 주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을 가리키거나, 해탈을 위해 닦아야 하는 마음의 덕목이다. 또한 남녀노소, 신분에 따라 차별하는 윤리가 아니라, 보편성을 지닌 윤리다. 카스트를 근간으로 하는 다르마를 파기하거나 거의 무시하고 해탈을 위한 수행에 치중함으로써 다르마를 보편화 했다.

사도 바울이 예수의 메시지를 유대교의 율법으로부터 분리해 그리스도 신앙이 세계로 전파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한 것과 유사하다. 이는 예수의 사랑의 윤리는 이미 율법주의를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나 기독교 모두 원칙적으로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상통성을 가진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보지, 특정한 집단의 일원, 혈연 공동체나 민족 집단에 속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남녀, 노소, 신분, 민족이나 계급의 차이를 넘어서 모든 인간을 인간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긴다. 힌두교가 카스트제도와 같은 사회체계나 신분제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민족적 고착성을 보이지만, 불교는 그것을 극복해 보편적 가르침으로 나아갔다.

고타마 싯달타 왕자가 붓다가 되고,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그리스도로 불리게 된 것은 인간존재의 근원, 구조를 깨달은 이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붓다(Buddha, 佛陀, 覺者)나 그리스도(Christ)는 개인 이름이 아니라 위대한 일을 성취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개인 역사적 존재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타마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고 붓다(Buddha)라는 칭호를 얻었다. Buddha는 ‘깨달은 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다. ‘그리스도(christ)’는 당시 유대 민중의 기대와 민족 구원의 갈망에 부응한 이상적 지도자에 붙여지는 호칭 ‘메시아(Messiah)’라는 뜻이다. 낱말의 기본 뜻은 기름부어진 자, 의미상으로는 구원자ㆍ인도자다. 예수라는 역사적 존재가 메시아의 그리스어 표현인 ‘Christ’로 불리게 됐다.

싯달타 왕자가 6년 고행 끝에 깨달았기 때문에 붓다라고 불리는 것처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깨달음 또는 믿음에 기반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이렇게 호칭이 바뀌는 것도 공통점이다.

붓다는 열반에 들면서 자등명 법등명이라며 사람들에게 법에 의지하라 했다. 예수도 스스로를 신이라고 한 적이 없다. 유대교를 기반으로 나온 예수시대 가르침은 인간을 신화시키고 신적차원으로 높이는 것은 경계했다. 싯달타도 역사적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근원적 원리를 깨달았다. 이전부터 존재해온 다르마, 즉 법을 발견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에 문제가 있다면 이러한 칭호를 받게 된 이유와 역사적 사실을 빼버린 채 예수를 하늘에 모셔두고 아쉬울 때 찾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존재, 맹목적 신앙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불교에도 기복적 신앙을 하는 이가 있다. 이들의 어마어마한 노력과 공부, 삶은 빼버린 채버린 채, 이상적 존재로 신격화시켜 하늘에 모셔놓는 민중적 질서도 한국에서는 비슷하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성품을 불성이라고 한다. 싯달타가 어떻게 붓다가 되었는지, 그 존재론적인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요청된 개념이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은 예수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존재다. 신은 예수를 예수되게 해준 근원이다. 그 근원을 온전히 깨달았기에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신적 차원을 보았다. 그래서 예수의 모든 것이 신이라는 단순 논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논리는 예수만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돼야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신적 차원을 예수에게만 적용해 예수만 신격화하는 오류 아닌 오류를 범하게 된다.

불교는 과연 자력종교인가? 불교든 기독교든 주어진 사실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불교에서의 ‘법(法)’, 기독교에서의 ‘신(神)’이라고 표현했다.

붓다는 깨달은 분이지만, 단순히 붓다가 개인이 이룬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상관관계, 우주법칙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런 의미의 관계성, 본래 주어진 사실들을 기독교식 언어로 표현하면 은총이다. 은총은 주어진 것이다. 자력적이라기보다는 타력적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따. 모든 것은 본래 주어진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본래 주어진 데서 출발한다는 측면에서 불교에도 은총적 측면이 있다. 그런면에서 종교에는 진정한 의미의 자력은 없다고 본다. 자기 이전부터 주어진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타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력이라는 것, 오로지 내가 다 한다는 것은 교만일 수도 있다. 자력도 교만일 수 있다. 진리 앞에 겸손할 때 종교에서 ‘자력’이란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진리의 힘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지 나 자신의 힘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불교 철학의 전개과정을 보면, 끝없이 붓다를 붓다 되게 한 근원, 법, 법신을 추구해왔다. 이들은 현실을 현실 되게 한 근원이다. 자력이라는 말로 쉽게 규정할 수 없다.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불교와 기독교의 보편성을 강조해야할 때다. 기독교에서는 깨달음의 측면을 강조하고 불교에서는 은총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보완해야 한다. 마태복음에는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성할 것이요, 네 눈이 밝지 못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이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라는 말이 있다. ‘눈’과 ‘빛’은 영안, 자신의 진정한 주체성을 뜻한다. 불교로 치면 혜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나의 진정한 주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깨달은 자이며, 기독교도 깨달음적 요소가 강하다.

#이찬수 교수는?
불상에 절을 했다는 이유로 강남대 교수직에서 해직됐다 최근 복직했다.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 대학원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現 강남대 교수 및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있다.
감리교신학대, 서강대, 성공회대, 원광대, 이화여대, 한신대, 일본 코세이가쿠린 등에서 불교학, 종교철학, 비교종교학, 종교신학, 한국문화 등을 강의했다. 저서로는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인간은 신의 암호> <종교로 세계읽기>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일본정신> <생각나야 생각하지>등이 있으며, <절대, 그 이후> <지옥의 역사>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 <화엄철학>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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