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는 그립고 아쉬움이 따라야


“벽에 그림을 걸어놓으니 오두막 분위기가 확 달라져요. 아이 표정이 참 좋습니다. 목에 두른 보랏빛 스카프도 잘 어울려요. 봉순鳳順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눈길이 갈 때마다 말없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듭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내 말벗이 되어줄 것입니다. 봄이 와서 山에 꽃이 피어나면 진달래라도 한 아름 꺾어다 우리 봉순이에게 안겨 주어야겠다는 생각이입니다. 곁에 봉순이가 있어 내 속뜰이 한결 풍성해질 것입니다. …·2003. 2. 17. 法頂 합장.”

2002년 박항룰 화백 개인전시회에 오신 법정 스님, 까까머리 소년이 그려진 그림 앞에 앉아 계셨는데 그림 속 까까머리 소년과 너무 닮았다. 깜짝 놀란 박화백 전시회를 마친 뒤 스님을 쏙 빼어 닮은 그 그림을 스님에게 드렸다. 이때 스님은 우린 맨날 머리 깎고 다니는데 또 까까머리냐? 난 소녀가 좋더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서 부랴부랴 새로 그려드린 게 봉순이다. “저는 스님이 늘 어려웠어요. 스님 앞에서 말씀도 제대로 드려본 적이 없어서 (인터뷰 요청을 받고) 고민 많이 했어요.”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아뜰리에에서 만난 박항률 화백(61)은 올해 환갑을 맞은 이답지 않게 당신 작품 속 소녀보다 더 수줍고 조심스럽다.

- 사촌누이 그리고 갈래머리 소녀
경제학자였던 아버지 눈으로 보면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려대는 소년 박항률은 이단아였다. 드센 아버지 반대에 부딪쳐 그림을 못 그리게 되자 공부마저 제쳐두고 만화만 그려댔던 소년은 고등학교 1차 시험에서 떨어지고 만다. 2차로 본교를 가면되는데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아 시험 칠 시기를 놓치고 고향인 김천으로 내려가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눈 밖에 나 쫓겨 간 그곳에서 꿈에 그리던 미술반에 들었다. 과수원이나 논두렁, 강가로 나가서 아스라한 시골정취를 고스란히 화폭에 담으며 그림 그리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덧붙여 박화백 그림 깊숙한 곳에 깔려 있는 아릿한 사촌누이와 인연도 시작되었다.

“그 시절이 없었으면 아마 지금 같은 그림 못 그릴 겁니다. 저보다 한 살 어린 사촌누이는 중3이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아주 똑똑한 애였어요. 문학소녀였던 걔 영향으로 시도 깔짝거리기 시작했고, 위안을 많이 받았죠. 제 동무 노릇을 톡톡히 해줬어요.”

사촌누이는 척추장애를 앓아 발육이 좋지 않은 탓에 중학교 3학년인데도 초등학교 3,4학년으로 보일만큼 조그맸다. 박항률은 누이를 엎고 산에 오르고 들로 강가로 나다녔다. 그것도 잠시, 지나치게 자유를 만끽한 탓인가? 그곳에서 한 해 남짓 학교를 다닌 박항률. 병을 얻어 서울로 올라와 두 해 동안 학업을 멈춘다. 공부를 썩 잘했던 누이동생도 서울로 유학 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인연이 이어지는데.

“그 병이 아주 처참하고 무서운 병이에요. 걔는 고2때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세상 뜨기 전 거의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있어주곤 했는데, 세상 뜨는 순간까지 너무너무 힘들어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제 그림에 슬픈 표정이 있다는데, 아마도 그런 게 우러나오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에요.”

사람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시련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런저런 아픔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통과의례처럼 여겨 쉬이 잊고 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릿하고 비릿한 아픔들을 무의식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 삭히고 삭힌 끝에 두레박으로 물 길어 올리듯이 애잔하고 애틋한 그리움으로 풀어내 코끝을 싸하게 만드는 박항률 화백 같은 이가 있다.

“…어쩌면 내 그림 속에/빈번히 등장하는/까까머리 소년 모습은/아직도 내 마음속을/차가운 정적으로/응시하고 있는 그녀 눈망울에 비친/내 자신일는지 모른다.” - 詩 ‘사촌누이’ 일부

아버지는 “아들이 하고 싶어 하는 걸 왜 시키지 않느냐?”는 친구와 친지들 설득에 못 이겨 아들을 서울예고 2학년에 편입을 시킨다. “그림 그리는 애들만 모여 있으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버님이 유럽에 다녀오시면서 그 당시 구하기가 힘들었던 모딜리아니 화집과 피카소 화집을 사다 주셨어요.” 그 모딜리아니 화집에 소년 박항률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 한 점. <갈래머리 소녀>다.
“천도복숭아 같은 갸름한 얼굴에 홍조띤 붉은 뺨과 붉은 입술, 오똑한 코가 당당하게 앞을 응시하는 눈동자에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단아하게 땋은 갈래머리와 이마를 자연스럽게 덮은 애교머리가 푸른 창밖 배경으로 인해 애잔한 슬픔으로 다가오는 소녀 초상화였다.”
박화백 시집 <그림의 그림자>에 나오는 글이다. 이 갈래머리 소녀가 박항률 운명을 바꿔놓는다. ‘아무래도 그림을 그려야겠어.’


- 해돋이는 100미터 높이서 봐야 제격
법정 스님과 인연은 어떻게 맺었을까?
“96년에 집사람하고 인도여행을 하면서 바라나시를 갔는데, 여행을 하다보면 입에 맞는 음식 고르기가 어렵잖아요. 중국음식은 웬만하면 입맛에 맞으니까 중국집엘 갔어요. 주인이 방명록에다 글을 적으라고 하대요. 적으면서 보니 한글로 ‘OOO은 시켜 먹어도 되고, ×××는 한국사람 입맛에 맞지 않으니 시켜먹지 마시오. 류시화’ 이렇게 적혀 있더군요. 적힌 대로 시켜먹었더니 입맛에 잘 맞더라구요. 그때 집사람이 류시화씨 책에 한참 빠져있을 때였어요. 집사람이 좀 극성맞은 데가 있거든요. 돌아와서 출판사를 통해 류시화씨 전화번호를 알아서 전화를 했어요.”
만나보니 류시화도 마침 박화백 그림을 좋아해 포스터 액자를 구해서 안방에다 붙여놓고 있었다. 이렇게 만난 인연. 필연이었을까? 서로 팬임을 확인하면서 자연스레 화제가 법정 스님이야기 옮아갔다.

“법정 스님은 화실에 딱 한 번 오셨어요. 길상사 달력 만들 때. 오셔서는 ‘슬라이드 다 내봐.’ 이러시는 거예요. 그림은 모두 스님이 직접 고르셨어요. 절대미감이 지니셨잖아요. 표지화가 지금 길상사 선열당에 걸린 그림인데요. 스님이 고르신 작품 가운데서 ‘스님 이걸 표지로 쓰면 좋겠습니다.’하고 권해 드렸어요.”

“한 번은 스님이 여행지에서 전화를 주셨어요. 해돋이는 100미터 높이서 봐야 제격이라고요. 스님이 좋아하셨던 이 그림도 스님한테서 그 말씀을 들은 그 뒤에 그린 겁니다. 그 말씀을 의식하고 그린 것은 아니지만 그만한 높이에서 바라본 풍경이죠.”라며 펼친 그림첩. 2004년에 그린 ‘일몰’이란 제목이 붙은 해넘이 그림이다. 화폭 오른쪽 위로 나는 갈매기와 곧 바다 위로 떨어질 해 그리고 뭍에 묶인 배에 걸친 노가 어슷하게 내리흐르고, 조그만 외딴 섬에 소나무 한 그루가 왼쪽으로 완만하게 드리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우리 전통 그림처럼 트라이앵글 구도를 가진 파스텔화(54×65). 고즈넉한 해넘이 풍경으로 여백미가 한껏 드러나는 작품이다. 스스로 빛을 발하려 들지 않고 대상을 선선히 받아들이는 그 넉넉함이라니. 그림에 취해 가만히 앉아 있다가 박화백 법명을 떠올렸다. ‘진공眞空’ 참 비움. 스님 발을 묶어둔 까닭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움에는 그립고 아쉬움이 따라야 합니다. 덜 채우면 그 빈자리에 생기가 돌아서 시들지 않는 품격이 감돕니다.”
법정 스님이 2007년 가을 법석에서 하신 말씀이다.
“위대한 예술가 배후에는 드러나지 않는 따뜻한 가슴이 받쳐 주고 있습니다. 박화백이랑 차 한 잔 드시고요.”
2005년 정초 스님이 박화백 곁님 무염지 보살에게 보낸 연하편지다. 그림을 그리는 내외를 향한 각별한 스님 사랑이 흠씬 묻어난다.

- 한 송이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박화백이 새를 그리기 시작한 건 대학 다닐 때부터였다. 그러다 추상으로 가면서 자연스레 그리지 않게 되었는데 지금 화풍으로 바뀌면서부터 다시 새를 그리게 되었다. 제자들과 베네치아 여행을 갔을 때 어떤 친구 머리 위에 새가 앉은 걸 보고 그림이 되겠다 싶어서 그렸다. 그 그림을 2006년 전시회 때 크게 그려서 걸었는데 그 제자가 와서 보더니 “‘선생님 저 머리가 제 머리 아니에요? 한 가지 비밀 더 가르쳐드릴까요? 실은 비둘기가 날아오게 하려고 제 머리 위에 비둘기 모이를 얹어놨었어요.”하더란다. 엉뚱하다. 그런 엉뚱함, 순정純正함이 예술을 만드나보다. “그 친구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떴어요. 조각하는 친군데, 최종태 선생님 대를 이을 만큼 훌륭한 아인데…….” 말을 잇지 못하는 박화백, 눈시울이 금세 붉어진다. 이 대목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는 시구가 떠올랐다. ‘한 사람 화가 탄생에 참으로 많은 인연들이 함께 했구나.’ 그물코처럼 얽힌 중중 무진한 화엄세계.

“아주 흔한 건데 사람들이 그리지 않는 게 있습니다. 그런 게 많아요. 보기를 들면 나뭇가지 끝에 잠자리가 앉잖아요. 참 흔한 풍경인데 중국화 가운데 습작형식으로 그려진 게 딱 하나 있을 뿐, 동서양을 통 털어서 제가 처음이에요.”
추상작품을 하다 90년대 초 화풍을 바꾼 박항률 화백. 처음엔 까까머리 소년을 주로 그렸다. 그러다가 98년도쯤 불현듯 한복 입은 소녀를 그리고 싶어서 그렸는데 화랑을 하는 친구가 와서 납작 들고 나간다. 뒤통수에다 대고 그 흔한 걸 왜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요즘 한복 그리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한번 찾아보래요. 찾아봤더니 한국화를 그리는 화가들 가운데도 한복을 그리는 화가가 없었어요. 민중미술 하는 화가들이 두루마기 입고 주먹 불끈 쥔 그림은 그렸지만, 한복 치마저고리 입은 그림은 없더라고요. 1960년대에 그린 그림들이 있을 뿐, 70년대 들어서면서 없어지기 시작해요. 80년대 들어서서는 거의 없어요.”
그렇게 시작한 한복 입은 소녀 그리기는 이제 나라를 대표하는 그림이 되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관저에도 박화백이 낳은 한복 입은 소녀가 고운 자태를 드리우며 손님을 맞고 있다.


- 찰나도 영원이고 영원도 영원
“70년도에 대학 들어갔을 때 직지사를 갔었어요. 말간 아침에 스님 한 분이 걸어가는데 골상이 너무 이쁜 거예요. 야, 저거 한 번 만들어 봐야겠다하고는 바로 스케치하고 그 길로 올라와서 까까머리 조각을 몇 점을 했어요.”
그 스님이 사월초파일 키우던 난초를 밖에 내놓고 햇볕을 쬐게 했다. 그런데 그만, 부처님 오신 날이라 모처럼 절에 온 아이들이 꽃을 다 꺾어갔다. 초파일 행사를 다 마치고 돌아와 그 광경을 본 스님은 “아, 내가 아직도 많이 모자라구나.” 하면서 어디론가 떠났단다. 꽃을 꺾어간 아이들에게 화는커녕 내 정성이 모자라는구나하는 마음을 내는 수행. 가슴 속까지 ‘쏴’해지는 맑은 소식이다.

그림을 지금처럼 바꾸면서 가장 먼저 그린 그림이 바로 까까머리 소년이었다.
“93년도 작품 가운데 길상사 식당에 걸려 있는 머리 깎은 와상이 있어요. 부처님 열반상에서 힌트를 얻은 건데 그 그림을 그리고 한 해 쯤 지나서 작업실에 스님 한 분이 찾아오셨어요. 팸플릿에서 본 그 그림이 마음에 드는데 포스터가 없냐고 해서 드렸는데, 그 스님이 가시면서 그러는 거예요. 어떤 불상보다 이게 좋다고.”
그것이 인연이 됐을까? 박화백은 몽골여행길. 그림 컨셉을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궁리 끝에 떠오른 낱말이 메디테이션meditation, 명상이었다.
“그 다음부턴 전시회를 할 때마다 전체 주제를 ‘meditation’이라 붙이고 부제를 달기 시작했어요. 명상을 어렵게 생각할 게 아니라 찰나에도 될 수 있는 생각에 그렸어요. 그림 제목 가운데는 ‘정오의 명상’이 있어요. 정오라는 것은 한 꼭지점에 지나지 않잖아요? 또 ‘낮꿈’이라는 건 낮에 잠깐 조는 건데 그때도 명상이 되고 그러면 찰나도 찰나가 아닌 셈이죠.”
찰나도 놓치지 않고 살려낼 수 있다는 말이다. 길상사 관음상을 조각한 조각가 최종태 선생도 ‘찰나도 영원이고 영원도 영원이다.’는 말씀을 했는데 예술을 하는 분들 정신세계는 맥이 통하나보다.

“최종태 선생님은 제가 대학 다닐 때 전임강사셨어요. 어느 날 그 분 연구실 앞을 지나는데 문이 빼꼼 열려있었어요. 문 틈새로 보인 게 가녀린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여인상이었는데 눈부시게 고왔어요. 보는 순간 너무 아름다워서 폭 빠졌어요.”
너무 좋아한 나머지 최종태 선생 수업을 듣고 싶어서 당시엔 전공이 다르면 학점인정이 되지 않았는데도 4학년 때, 3학년 부조 시간에 가서 들었단다.

이 말씀을 듣다 문뜩 외람된 생각이 떠올랐다. 길상사 지장전을 지을 때 법정 스님은 본디 이층 높이 양식 건물을 지으라고 일렀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때 스님 말씀을 따라 건물을 승효상 같은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겨 짓고, 최종태 선생과 박항률 화백 같은 분들이 불상과 후불탱화를 현대 관점으로 해석해서 모셨더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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