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봉 스님의 <육조단경> 강의-7

◆돈교설법(頓敎說法)

“근기가 작은 사람은 단박에 깨닫는 이 가르침을 들으면, 마치 뿌리가 작은 대지의 초목이 큰 비를 맞고 모두 다 저절로 거꾸러져서 자라지 못함과 같나니, 작은 근기의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반야의 지혜가 있는 점은 큰 지혜를 가진 사람과 차별이 없거늘, 무슨 까닭으로 법을 듣고도 바로 깨닫지를 못하는가? 삿된 소견의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니라.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능히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반야의 지혜도 또한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이와 같이 근기가 작은 사람이라도 단박에 깨닫는 가르침을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마음에서 자기의 본성으로 하여금 항상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 번뇌·진로의 중생이 모두 다 당장에 깨닫게 되나니, 마치 큰 바다가 모든 물의 흐름을 받아들여서 작은 물과 큰물이 합해져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바로 자성을 보면 안팎에 머물지 아니하며 오고 감에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능히 없애 통달해 거리낌이 없나니, 마음으로 이런 행을 닦으면 바로 <반야바라밀경>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경서 및 문자와 소승과 대승과 십이부의 경전이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나니, 지혜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능히 세운 것이니라. 만약 나(我)가 없다면 지혜 있는 사람과 모든 만법이 본래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요, 일체 경서가 사람으로 인해 있음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사람 가운데는 어리 석은 이도 있고 지혜로운 이도 있기 때문에 어리석으면 작은 사람이 되고 지혜로우면 큰 사람이 되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지혜 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 법을 설해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우쳐서 알고 마음이 열리게 하나니,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달아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 가진 사람과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알아야 할지니, 깨닫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달으면 중생이 바로 부처니라.

나는 홍인화상의 처소에서 한 번 듣고 그 말뜻에 크게 깨달아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느니라. 만약 능히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볼 것이니라. 어떤 것을 선지식이라 하는가? 최상승법을 깨달아 바른 길을 올바르게 가리키는 것이 바로 큰 선지식이며 또한 바로 큰 인연이니라. 이른바 교화하고 지
도해 부처를 보게 하는 것이니, 모든 착한 법이 다 큰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어나느니라.

만약 깨달은 이는 밖으로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으며 밖으로 선지식을 구해 해탈 얻기를 바란다면 옳지 않나니, 자기 마음속의 선지식을 알면 바로 해탈을 얻느니라. 만약 자기 마음이 삿되고 미혹해 망념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준다 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반야의 관조를 일으켜야 하나니,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지면 이
것이바로 자기의 참 선지식이며, 한 번 깨달음에 곧 부처를 아느니라.

자성(自性)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해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곧바로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얻으면 곧 바로 반야삼매며, 반야삼매를 깨달으면 곧바로 무념이니라. 어떤 것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무념이란 모든 법을 보되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모든 곳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해 여섯 도적(色·聲·香·味·觸·法)들로 하여금 여섯 문(眼·耳·鼻·舌·身·意)으로 달려 나가게 하나 육진(六塵)속을 떠나지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감에 자유로운 것이니,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로서 무념행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지니, 이는 곧 법에 묶임(法縛)이니 곧 변견(邊見)이라고 하느니라. 무념법을 깨달은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달은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을 깨달은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이여, 나의‘모양을 여읜 게송(無相頌)’을 들을지니, 그대들 미혹한 사람들의 죄를 없앨 것이니 또한‘죄를 없애는 게송(滅罪頌)’이라고 하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복은 닦고 도는 닦지 않으면서 복을 닦음이 곧 도라고 말한다. 보시 공양하는 복이 끝이 없으나 마음 속 삼업은 원래대로 남아 있도다. 만약 복을 닦아 죄를 없애고자 하여도 뒷 세상에 복은 얻으나 죄는 어쩔 수 없느니라. 만약 마음 속의 죄의 인연 없앰을 안다면 저마다 자기 성품 속의 참된 참회이니라. 만약 대승의 참된 참회를 깨달으면 삿됨을 없애고 바름을 행해 죄 없어지리.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자성(自性)을 관찰하면 바로 깨달은 사람과 더불어 서로 같으니라. 대사(五조대사)께서 단번에 깨닫는 이 가르침 전하심은 배우는 사람이 같은 한 몸 되기를 바라서니라.

만약 장차 본래의 몸을 찾고자 하면 삼독의 나쁜 인연 마음에서 씻어 없애라. 힘써 도를 닦되 한가로이 지내지 말라. 어느덧 한 세상 헛되이 끝나 버리리라. 만약 단번에 깨닫는 대승법을 만났거든 정성껏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여라.”



중국 선불교의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담아 놓은 책을 어록(語錄)이라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조사어록(祖師語錄)은 옛 선지식들의 말씀이 담긴 책을 의미합니다. <조주어록>하면 조주 스님의 가르침, <운문어록>하면 운문 스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후대에 모아서 만든 책입니다.

예로부터 숱한 조사어록집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한국의 선불교에서는 <임제어록>을 으뜸으로 삼고 있습니다. 임제 선사의 가르침에는 날카로운 지혜의 칼날이 중생들의 미혹과 아둔함을 예외 없이 구석구석 잘라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제 선사는 조불(祖佛)이란 단어까지 여러 곳에 등장시키며 조사와 부처님이 동등하며, 중생에서 부처에 이르는 길을 혜능 선사 못지않게 바로 알고 바로 이르게 하는 선지식중의 선지식입니다.

그 중 한 가지만 옮겨와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수행자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4단계의 수행법을 닦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 단계는 주관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객관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주관과 객관을 한꺼번에 다 비우고 버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단계는 주체와 객체를 다 남겨두는 것입니다.

넷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보는 나와 보이는 사물이 참나를 이뤄 걸림과 막힘이 없는 대자유의 참사람에 이르게 됩니다. 주관은 주관대로 객관은 객관대로 비우고 버릴게 아니라, 그 자체를 즐기며 행복과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산은 산인 그대로, 물은 물인 그대로 차별이 없는 참사람의 열린 지혜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 이르면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져죽지 않는 진리와 내가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물론 타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은 육체가 아닌, 차별이 없는 참사람의 대자유를 누리는 정신세계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마음을 바로 보아 부처를 이루는 선(禪)의 생명이자 선의 특징입니다.

임제 스님의 말씀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선사들은 깨달음을 성취한 뒤 떠난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치열한 구도자의 뼈아픈 체험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객체에 끌려 다니고 주체에 얽매여 생사의 윤회를 거듭하는 범부의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바퀴를 돌아 객체와 주체가 둘이 될 수 없는, 하나에 이르게 되면 객체는 객체인대로 주체는 주체인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상대가 되지 않으며 오고 감도, 더함도 덜함도 아닌 생멸이 둘이 아닌 하나의 차별이 없는 참사람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생활이 곧 도(生活是道)요,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다’라는 부분에 있어서도 일상인으로서는 구름 잡는 허황한 이야기일 뿐 생활을 열어 가는데 있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임제 스님의 가르침처럼 한 바퀴를 돌아 버릴 객체나 머물 주체가 없어 참으로 한가한 평상심으로 돌아와 있을 때에는 생활 그대로가 도(道)가 됩니다. 옷 입고 밥먹는 그대로가 부처의 삶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혜능 선사는 돈교설법에서 수행자를 소근기(小根器)와 대근기(大根器))로 나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설명했습니다. 수행자를 풀과 나무로 비유해 큰 비가 내리면 풀잎은 꺾이고 뿌리까지도 흔들릴 수 있으나 큰 나무는 큰 비를 받아들이며 오히려 큰 비 자체를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으며 즐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수행자들이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사견의 장애를 겹겹이 해 번뇌의 뿌리를 더욱 깊게 하는 집착의 병을 앓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혜능 선사가 <보살계경>까지 인용해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청정하다며 도를 배우고 닦는 이로 하여금 단박에 깨달음을 이뤄 진리와 하나가 되라며 채근질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선지식이란최상승법을 깨달아 바른길을 올바르게 가리키고 실천하는 자라며 상대자가 누구든지 교화하고 지도하며 착한 법으로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이 되고 누구
에게나 착한 벗이 돼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흔히 돈오점수(頓悟漸修)니 점수돈오(漸修頓悟)니 또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앞세우며 나름대로의 학설과 주장을 펴고 있지만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혜능 선사처럼 돈오의 정신으로 정진에 매진하되 중생의 크고 작은 근기는 다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전이나 어록 등에서 많이 등장하는 마음이니 자성이니 본성이니 또
는 불성, 그 자리, 한 물건 등으로 표현되는 정신적 작용은 마지못해 다양한 이름을 붙여놨을 뿐 하나가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입니다.

법신과 도신, 그리고 화신이 곧 하나요, 하나가 곧 세신인 것입니다. 혜능 선사가 <육조단경>에서 무상송(無相頌), 멸죄송(滅罪頌)이라며 게송을 들려주는 것도 중생근기에 따라 처방해 주는 약이자, 길안내서일뿐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닙니다. 하여, 게으름 없이 나무와 나무를 끊임없이 비벼 불꽃을 얻는 것처럼 스스로 깨닫는 것만이 <육조단경>의 생명이자 혜능 선사의 참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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