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봉 스님의 <육조단경> 강의 -5

◆무상참회(無相懺悔)

“지금 이미 사홍서원(四弘誓願) 세우기를 마쳤으니, 수행자들에게 무상참회(無相懺悔)를 줘서 삼세의 죄장을 없애게 하리라. 수행자들이여,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우치와 미혹에 물들지 않고, 지난날의 나쁜 행동을 일시에 영원히 끊어서 자기 성품에서 없애버리면 이것이 바로 참회니라.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지난날의 거짓과 속이는 마음을 없애도록 할지니, 영원히 끊음을 이름해 자성(自性)의 참회라고 하느니라.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아서 지난날의 질투하는 마음도 없애도록 할지니, 자기의 성품에서 없애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니라.

수행자들이여, 무엇을 이름해 참회라고 하는가? 참(懺)이라고 하는 것은 종신토록 잘못을 짓지 않는 것이요, 회(悔)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니, 나쁜 죄업을 항상 마음에서 버리지 않으면 모든 부처님 앞에서 입으로만 말해도 이익이 없나니, 나의 법문 가운데는 영원히 끊어서 짓지 않음을 이름해 참회라 하느니라.

지금 이미 참회를 했으니, 수행자들을 위해 상(相)을 여읜 무상삼귀의계(無相三歸依戒)를 주리라. 수행자들이여, 깨달음의 양족존께 귀의하오며, 바른 법의 의욕존께 귀의하오며, 청정한 중중존께 귀의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 바라옵건대 자성의 삼보께서는 자비로써 증명하소서 할지니라.

수행자들이여,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해 자성의 삼보에 귀의하게 하나니, 부처란 깨달음이요 법이란 바름이며 승이란 깨끗함이니라.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해 삿되고 미혹이 나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을 알아 재물을 떠나고 색을 떠나는 것을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바로 애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이라고 한다. 범부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날마다 삼귀의계를 받는다 하나, 만약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해도 부처가 어느 곳이 있으며, 만약 부처를 보지 못한다면 귀의할 곳이 없다. 이미 귀의할 곳이 없으면 그 말이란 도리어 허망 될 뿐이다.
수행자들이여, 각기 스스로 관찰해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말지니, 경의 말씀가운데‘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했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기의 성품(自性)에 귀의하지 아니하면 돌아갈 곳이 없다.”


참회(懺悔)라는 것을 한문 그대로 단순하게 직역하면 잘 못을 뉘우친다는 말입니다. 참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참(理懺)과 사참(事懺) 참회가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뼈끝을 울리며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참회를 이참참회라 한다면 사참참회는 형식과 격식의 절차에 따라 모양새만 갖추는 겉치레 참회를 뜻합니다.

이처럼 이참참회는 진실로 마음에서 울어나 참회를 하는 것이고, 사참참회는 진실 됨이 없이 입으로만 하는 참회입니다. 입으로 하는 참회는 일시적으로 형식적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고, 마음으로 하는 참회는 앞생각, 지금 생각, 뒷생각을 낱낱이 드러내고 씻어내어 다시는 한 말뚝에 두 번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잘못과 허물을 짓게 됩니다. 아집과 편견을 버리고 교만심과 질투심, 탐내고 성질부리며 어리석은 짓은 쉬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참회입니다. 한번 잘못을 뉘우침에 그 잘못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참(懺)이며, 뒷날에 이르러서도 죄업에 물듦 없이 한결같음을 회(悔)라고 말합니다.

흔히들 보시(布施)에만 유주상(有住相)과 무주상(無住相)이 나눠져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지계(持戒)와 인욕(忍辱), 정진(精進)과 선정(禪定), 그리고 지혜에도 유주상과 무주상으로 나줘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상참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일체의 모양과 경계에서 자유로운 무집착의 삶을 의미합니다.

육조 혜능 대사는‘삼세(三世)의 죄장을 없애게 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삼세라는 것은 바로 전생, 내생, 금생을 일컬어 삼세라고 합니다. 전생, 내생, 금생은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의미로 다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시간적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생이라는 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기 전의 생을 전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생이라는 것은 1초 전의 상황
도 전생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지나간 모든 것이 전생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다가올 내일은 미래가 아닌 바로 오늘의 내생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다가올 내일이 미래이지만, 오늘 죽을 수도 있는 사람에게는 내생입니다. <육조단경>에서 혜능 스님이 이야기하는 삼세라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서양의 학자들은 불교를 오늘의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 역시 항상 오늘을 소중히 여기라고 강조했습니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며, 내일은 다가올 오늘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집착하지 말고 바로 오늘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육조 대사는‘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아서 지난날의 질투하는 마음도 없애도록 할지니, 자기의 성품에서 없애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경전에서는‘질투’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달리 <육조단경>에서는 자주 언급되는 말입니다.

육조가 살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1350년 전입니다. 그 당시는 학문과 직업 등이 세분화되지 않고 단순화 돼 있는 상황이다 보니, 사람들이 소유에 대해강한 집착심을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혜능 스님은 질투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좀 더 사람들에게 강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눈(眼)은 색(色)을 대함에 분별작용으로 경계에 끄달리게 되고 귀(耳)는 소리를 느낌에 칠소대상으로 싫고 좋음으로 나누게 됩니다. 코와 입 그리고 몸과 의식작용 역시 빛과 어둠을 쫓아 팔만사천번뇌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에도 집착하지 말 일이며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에도 걱정을 미리 앞당겨 두려워할 일도 아닙니다. 더구나 오늘, 지금의 일은 전혀 걱정하거나 염려할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주인공으로서 오늘을 어떻게 열어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손금이 아무리 좋다 해도 얼굴 잘생김만 같지 못하고 잘생겼다 해도 마음 잘 타고남만 같지 못하고 마음을 아무리 잘 타고났다 하더라도 때와 곳에 따라 마음을 쓸 줄 아는 것만 같지 못하다(手相이 不如觀相이요 觀相이 不如心相이며 心相이 不如用相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앓는 모든 병은 집착심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욕심은 버릴수록 아름답
지만 집착은 키울수록 병이 됩니다.

나는 그 누구의 것이 영원히 되지 못하면서 그 누구는 영원히 내 것이 되길 바라는 소유욕이 싸움의 원인이 되고 가정의 평화를 흔드는 태풍의 눈이 되기도 합니다. 입으로만 무소유, 무집착을 떠벌릴게 아니라, 수행자라면 스스로 일일삼성(一日三省)하는 자세로 순수하고 정직하며 청빈한 삶을 드러 내놓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혜능 선사의 무상참회에 부끄럽지 않게 부처님의 가르침 중심으로 사찰의 법회는 떳떳하고 당당하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법성게>에서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이라고 했습니다. 육조 대사가 과거, 현재, 미래가따로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한 생각을 간절히 일으키면 곧 깨달음으로 변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참회(懺悔)라는 것은 종신토록 잘못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종신토록 참회를 한다는 것은 잘못을 다시는 범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다보면 작던 크던 잘못을 범하기 마련입니다.

<중아함경>에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한 말뚝에 두 번 넘어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 사람을 잘못 사귀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처럼 다시는 잘못을 저지른 일에 대해 두 번 범하지 않을 정도로 기본적인 자세가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불교는 구원의 종교가 아닙니다. 자력으로서 스스로의 인격을 완성시키고, 깨달음을 성취해 가는 종교입니다. 혜능 스님은‘깨달음의 양족존께 귀의하오며, 바른 법의 이욕존께 귀의하오며, 청정한 중중존께 귀의한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는 깨달은 사람을 말합니다. 바로 깨달은 사람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배울 학(學)자에는 받침에 아들 자(子)가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라는 것은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더라도 흔들리는 존재기 때문에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장에서 육조 스님이 강조하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에 대해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자신이 서있는 자리가 극락이고, 정토이며 인생의 황금기임을 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세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알고, 깨달음의 종교를 신앙으로 삼는 불교도라면 운명론적인 요행이나 신비주의에 현혹되지 말고, 일체의 만법(萬法)과 일체의 작용이 이 마음으로부터 비롯됨을 철저히 사무치게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색신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도, 극락과 지옥도 이 마음의 닫고 열림에서 비롯되며 간절심으로 둘이 아닌 하나를 이룰 수 있게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일념(一念) 가운데 찰라지간에 다 갖춰져 있는 것입니다. 전생과 내생도 오늘의 삶 속에 다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은 오늘의 삶속에서 눈물과 웃음 속에서 때때로 일어나고 있으며 육도윤회는 오늘의 삶 속에서 낮과 밤처럼 뒤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의 기적, 당생윤회(當生輪廻)가 혜능의 무상참회에서 청정법신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되는 생각의 윤회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은 무상과 무집착으로 세상을 열어가는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나와 당신입니다. 사람이 곧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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