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봉 스님의 <육조단경>강의-2

◆ 정혜일체(定惠一體)

“나의 이 법문은 정과 혜로써 근본을 삼나니, 첫째로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니라. 정은 바로 혜의 몸이요, 혜는 바로 정의 작용이니 혜가 나타날 때 정이 혜
안에 있고 또한 정이 나타날 때 혜가 정안에 있느니라. 도를 배우는 이는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기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짓는 이는 법에 두 가지 모양(相)이 있는 것이니라.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지혜와 선정을 함께 함이 아니요. 마음과 말이 함께 착해 안팎이 한 가지면 선정과 지혜가 곧 함께 함이니라.

일행삼매란 어느 때나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곧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니라. <정명경>에 말씀하기를‘곧은 마음이 바로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바로 정토다’라고 하였느니라.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가지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니라.

단지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음을 일행삼매라고
하느니라.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법의 모양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국집하여 곧은 마음은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망심을 제거하여 일으키지 않음이 일행삼매라고 하나, 만약 이와 같다면 이러한 법
은무정(無情)과 같은 것이니 도리어 도(道)를 장애하는 인연이니라.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하나니,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바로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면 바
로 속박이 되는 것이니라.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인, 이름은 비록 둘이나 몸은 둘이 아니니, 정과 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법에는 단번에 깨달음과 점차로 깨달음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달은 이는 단번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 것이
니, 깨달으면 원래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느니라. 나의 이 법문은 예부터 단번에 깨침과 점차로 깨달음을 모두 세우나니 생각 없음을 종으로 삼으며 모양 없음을 본체로 삼고 머무름 없음
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중국의 고어(古語)에서는 혜(惠)와 혜(慧)가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마치 스승 사(師)와 짐승 사(獅)가 고어에서는 으뜸 사, 앞설 사, 모범 사, 이끌어갈 사 같은 의미로 쓰이듯이 말입니다. 어질 혜(惠)는 똑똑할 혜(慧) 와 의미가 겹쳐, 트이고 열린 바른 앎(知)과 바른 봄(見)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조단경>의 제2장인 정혜일체(定惠體)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는 둘이 아닌 하나임을 일깨우기 위한 장(章)이라 할 것입니다. 흔히 참선 수행하는 스님이나 거사들이 선정삼매의 깊은 도락(道樂)에 대해 은근한 자랑을 늘어놓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구업(口業) 수준의 선정삼매는 오고갈지언정 넉넉한 지혜의 슬기로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짜여진 시간표에 의해 죽비소리에 길들여지는 작금의 선원풍토에서는 절구통 스님은 있을지언정 마음이 열린 참 선지식은 쉽게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定)이 있으면 혜(惠)가 있기 마련이요, 혜(惠)가 있으면
정(定)은 저절로 이뤄질 터인데도 선정삼매만 자랑할뿐 열린 지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형식과 틀에 안주하는 한 관습의 고리와 집착의 병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화제를 잠시 다른 데로 돌려 설명을 이어가겠습니다. <천수경(千手經)> 첫 머리인 정구업(淨口業)부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천수경>의 첫 부분에서 구업(口業)을 등장시킨 것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중 구업의 비중이 가장 크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은 살생, 투도, 사음이 있고 뜻으로 짓는 의업(意業)에는 탐진치가 있으나 구업(口業)에는 망어(妄語), 양설(兩設), 기어(綺語), 악구(惡口) 등 4가지가 있어 그 비중이 크며 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으뜸 덕목이 구업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신·구·의 삼업은 셋이 아닌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업이 의업이요, 신업이 의업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코 밑의 입만이 입이 아니라 열리고 뚫리고 위 아래로 흐르며 막힘없이 통하는 것은 모조리 입 아닌게 없는 것입니다. 눈은 보는 입이요, 귀는 듣는 입이며, 코는 냄새 맡는 입이요, 배꼽 밑 두 개의 생식기는
배설하는 입인 것입니다. 입으로만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눈짓, 손짓, 발짓, 몸짓으로 강한 대화, 은밀한 의사 표시를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생과 투도, 삿된 음행은 몸이 저지르는 신업이나 의업의 지시와 판단에 의한 행동일 뿐이며 입으로 짓는 망어, 기어, 양설, 악구 역시 입으로 뜻이 표출되고 있으나 의업의 판단과 지시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조 혜능 선사는‘도를 배우는 이는 짐짓 정(定)을 먼저해 혜(惠)를 낸다거나 혜(惠)를 먼저해 정(定)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기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짓는 이는 법에 두 가지 모양이 있는 것이니라. 입으로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지혜와 선정을 함께함이 아니요, 마음과 말이 함께 착해 안팎이 한가지면 정과 혜가 곧 함께함이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육조 스님은 <유마경>의‘곧은 마음이 바로 수행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바로 극락정토’라는 말씀까지 인용해 열린 마음으로 들어서는 빗장까지 풀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 스님께서는 일행삼매를 언급했습니다. 스님은‘일행삼매에 국집해 곧은 마음은 앉아서 움직이지않는 것이라 하며 망심을 제거해 망념을 일으키지 않음이 일행삼매인줄 알며 이러한 무리는 무정과같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하나니 어찌 도리에 정체할 것인가.’라고 우리의 고정관념의 잠든 의식을 흔들어 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육조 스님께서는 등불까지 등장시키며‘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사라지므로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용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정을 떠나 혜가 있을 수 없고 혜가 없는 정은 의미를 잃고 마는 것입니다. 육조 스님께서는‘법에는 단박에 깨달음과 점차로의 깨달음이 없다. 사람에 따라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을 뿐’이라며‘생각 없음으로 종을 삼고(無念爲宗), 모양 없음으로 본체를 삼고(無住爲本), 머무름 없음으로 근본을 삼는(無相爲本)’도리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여윈 것이요,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을 여윈 것이며,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설명과 해석이‘머문바 없이 생각을 낼지어다’가 아닌‘한 생각이 일어나되 거기에 머물지 말라’가 바른 해석인 것입니다.

육조 혜능 스님의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씀이 이를 증명해 보이는 가르침입니다.‘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범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이쯤해서 육조의 3대 제자 중 한 사람인 남악회양 선사가 그의 제자 마조를 질타한 좌선법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마조가 깨달음을 위해 날마다 나무그늘에 앉아 좌선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의 스승인 남악 선사가 마조 곁에 와서 벽돌로 기왓장을 갈고 있었습니다.

“스승께서는 벽돌로 기왓장을 갈아 무엇에 쓸려고 그러십니까?”스승이 대답하기를“거울을 만들어 볼까 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제자가 스승의 어리석음을 탓하듯 조소어린 투로 말했습니다.
“백날 벽돌로 기왓장을 갈아 보십시오. 거울은 커녕 멀정한 벽돌과 기왓장만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그러자 이번엔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앉아서 맨 날 무엇을 이루기 위해 정진하는가?”“저는 깨달음을 성취해 부처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승이 제자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앉아서 부처를 이룬다면 앉은뱅이가 부처를 이룰 것이다. 마차를 움직일 땐 소를 때려야 겠는가? 마차를 때려야겠는가?”

생각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장식과 격식 따위는 벗어버려야 합니다. 오로지 간절심 하나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형식과 절차에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나무와 나무를 비벼대면 뜨거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1000번을 비벼서 불꽃을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름, 겨울 안거기간만 시간을 정해 놓고 나무와 나무를 비벼대다가 해제가 되면 비벼대는 작업을 쉬게 됩니다. 나무의 열은 빠르게 식는 법입니다. 이런 풍토, 이런 정진자세에서 선지식이 출현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뻔한 대답은 뒤로 하고 육조의 3대 제자 중 한사람인 영가현각 선사의 시원한 게송을 끝으로 올려놓습니다.

夢裏 明明有大趣覺後 空空無大千
꿈속에서 헤매일 때는 육도윤회가 분명히 있는 줄 알았더니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마저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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