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세상의 주인인 너만 있을 뿐






소년은 뒷산에 올라가 멀리 햇빛에 빛나는 금강(錦江)을 보았다. 그렇게 본 금강은 기억 속에 한 조각 빛으로 남아있다. 산골의 작은 암자에서 살았던 소년의 하루 일과는 예불과 노동이었다. 예불을 올리기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주지 노스님은 재받이 전문가로 자주 여기저기로 초청돼 출타했기 때문이다. 속세와 완전히 격리된 그 곳에, 바깥세상의 소식을 전해 주는 이는 몇 개월에 한 번씩 들르는 객스님과 방학 때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뿐이었다. 객스님들과 고등학생들은 소년의 선생이 돼 한문을 익히게 했고, 초등학생 수준의 국어와 셈본을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어느 날 한 객스님이 소년에게 ‘큰 절에 가야 배울 것도 많고 진짜 중이 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 길로 소년은 금산사로 갔다. 그 당시에는 행자에 대한 엄격한 심사가 있었는데, 노동력이 우선시됐다. 소년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일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쫓겨날 뻔했지만, 잘할 수 있다고 울며 매달려서 간신히 행자 입방을 허가받았다. 소년은 행자 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금산사에 내려와서 며칠씩 묵어가시는 혜정 스님이 참으로 좋았다. 혜정 스님의 고요하고 자비스러운 모습을 멀리서 여러 번 훔쳐보았다. 혜정 스님의 인품을 존경했기에 은사 스님으로 모시겠다고 여쭈었고 허락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소년은 행자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혜정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고, 그 소년이 바로 지명 스님이다.


지명 스님을 만나기 위해 안면도에 위치한 안면암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안면암으로 들어서자 다부진 근육질을 가진 금강역사와 제석천과 용, 긴나라, 가루라 등 팔부신장이 먼저 반겼다. 금강역사와 팔부신장은 안면암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지켜줄 것만 같다. 안면암 2층 법당에 서니 천수만이 내 집 안방처럼 훤히 내려다보인다. 원래 바다를 좋아하는 지명 스님은 이곳에 방생법회를 왔다가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풍광에 반해서 절터로 잡은 것이다.

안면암은 기와를 올리고 단청을 한 그 햇수가 십년이 조금 넘는 신생사찰로 무량수전과 비로전, 나한전 등 여러 채의 당우가 들어서 있다. 비로전과 나한전에서는 바다를 보면서 기도를 할 수 있어 더욱 좋다. 안면암과 마주 보이는 바다 한가운데 여우섬과 조구널섬이라는 두 개의 작은 무인도가 있다. 안면암에서 조구널섬까지 오렌지색 부교(浮橋)가 놓여있고 그 너머에는 물에 뜨도록 만들어진 부탑(浮塔)이 있다. 부교와 부탑으로 인해 안면암은 안면도의 관광명소가 돼있다. 지명 스님은 안면도에 아무 볼거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서 안면암 주위에 부탑과 부교를 설치해 놓았다.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드는 저녁 무렵, 물결에 흔들리는 부교를 건너다보면 잠시 이 사바세계를 잊게 된단다.

지명 스님은 여름날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동탑을 조성하고 있었다. 동(銅)을 잘라서 직접 용접까지 하는 것이다. 세납 육십을 넘어섰는데 그런 노동이 어렵고 힘들지 않느냐고 여쭈었더니 ‘어렵기는 하지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라 답했다. 그동안 지명 스님이 조성한 탑은 안면암의 부탑을 비롯해 과천 포교당에서 동탑과 철탑 2점을 더 제작했다. 이 정도면 동탑 제작의 대가 반열에 들어서도 되지 않을까 싶다.


지명 스님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 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보청기를 사용해야만 했다. 또 허리 디스크와 간과 신장질환 등으로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분명한 생사관으로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공기가 모든 공간에 곽 차 있듯이, 병과 죽음 등 모든 재앙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우리 앞에 놓여 있어요. 질병, 죽음, 불의의 사고 등은 아주 공평무사하게 나타나는 것인데, 나만은 이 법에서 제외시켜 달라고 떼를 쓰지 않아야 합니다. 내 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수용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 편하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마음이 지은 모든 유위법(有爲法)도 끊임없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에 있다. 생겨나서 조금 머무는 것 같지만 바로 달라지고 소멸된다. 뜻밖의 재앙이나 질병, 죽음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긴 하지만 그것은 안 될 자리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질서가 부여한 본래의 자기 자리에 당당하게 나타나는 것이란다.
스님은 선사상 특징 중 하나인 무일물(無一物)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무일물은 ‘마음밖에 본래부터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한 물건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연기법이나 공사상은 필연적으로 모든 사물의 영원한 존재를 부정하잖아요. 무일물에는 이미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무상(無常)과 고정적이고 실체적인 나가 없다는 무아(無我)가 전제돼 있어요. 사물이란 것도 사람들이 제멋대로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해요. 그리고 부귀, 권력, 명예, 성공, 행복 등의 개념과 단어도 사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본래부터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있을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하루살이의 태어남과 죽음처럼 그 과정을 한 번에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무상이라든가 무아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처럼 변화의 주기가 길 경우에는 무상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우리의 번뇌와 고통은 무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는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스님은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지’를 물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근본적인 답은 제쳐둬야 할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자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이 지구상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 있다면, 출세라는 자리를 위해서 돈, 명예, 권력에 매달리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이 있다고 생각하고 남을 의식하기 때문에 자신을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무(無)사상은 이러한 우리에게 ‘타인은 없다. 오직 너만 있고 네가 바로 세상의 주인’인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임제 선사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어디에서든지 주인공으로 살라’고 했다. 지명 스님은 주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했다.

“모자처럼 이름만 덮어 씌워진 주인이 있는가 하면, 실질적으로 조종하는 실세 주인도 있고, 현장에서 자기소임을 다하여 전체에게 꼭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주인도 있어요. 세상을 잔칫집으로 친다면 세상사람 하나하나가 자기 나름대로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치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친다’는 말은 ‘나 외에 따로 주인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의 나를 저 주인으로 삼아라’는 뜻이란다.

은사 혜정 스님은 사미계를 받기 전에 상원사의 구정 선사 이야기를 해주셨다. 가마솥을 걸기 위해 아홉 번이나 허물고 다시 걸기를 반복했지만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는 구정(九鼎) 선사. 은사스님은 “구정 선사처럼 수행자로서 아홉 번이 아니라 백 번이라도 고쳐 걸 수 있는 마음으로 불도를 닦아라”고 일렀다. 이 말씀은 평생을 수행자로 살아가는데 큰 지침이 됐다.


사미계를 받은 지명 스님은 범어사 강원에서 강고봉 스님, 혼해 스님, 변각성 스님으로부터 내전을 배웠다. 불경에 나오는 많은 보살·천왕·용·야차·귀신 등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으며,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천신이 나타난다는 그런 상징들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이들이 불경의 등장인물로 나오기 때문에, 불경 자체의 내용에 대해서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강고봉 스님으로부터 <능엄경> 공부를 하게 됐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보현보살은 행원을 상징하고,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상징하고, 지장보살은 원력을 상징한다”는 이 말씀에 재발심하게 됐다. 요즈음은 이런 말씀이 특별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무척 가슴에 와 닿더란다. 여러 강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지명 스님은 불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좀 더 공부 하고 싶은 열망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서 동국대 불교대학에 적을 두었다. 스님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영어에 대한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영어에 대한 욕심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 법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국 LA의 한 포교당에 스님이 필요하다고 했다. 영어와 기독교에 대한 공부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가 서른셋의 푸른 나이였다. 삼년 동안 절의 소임을 살면서 영어공부에 매진했다. 주변의 보살님들이 여기까지 왔으니 공부를 좀 더 하라고 자꾸 권했다. 그래서 지명 스님은 미국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 종교학과에 진학해 석 ? 박사학위를 마쳤다.

“교포 독지가의 후원으로 템플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지요. 조금이라도 신세를 덜 지기 위해서는 학위를 빨리 마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정말 밤낮없이 공부했어요. 학위를 마치고 나니 건강도 많이 망가졌고, 얼굴엔 기미가 가득하데요.”

지명 스님은 타국에서 힘들고도 어렵게 마친 공부를 사회에 회향했다. 1993년 불교방송에서 8개월간 <교리강좌>를 맡아 했으며, 이듬해인 1994년에 불교방송에서 <열반경>강의를 했다. 스님의 강의는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일상사에서 겪는 고통과 번뇌를 예로 들어 쉽고도 재미있게 풀어서 설명해 주었기에 불교경전은 어렵다는 선입관을 무너뜨렸다. 이때 방송한 내용은 <허공의 몸을 찾아서> <깨침의 말씀 깨침의 마음> <큰 죽음의 법신> 등 여러 권의 책으로 묶어져 세상에 나왔다.

지명 스님은 2004년 무동력 요트를 타고 1만여km에 이르는 태평양 바다를 횡단했다. 미국의 샌디에이고 항에서 출발해 4개월에 걸린 대장정을 끝내고 부산항으로 귀환했다. 이를 두고 칼럼니스트 이규태(李圭泰)씨는 ‘사발 같은 통 배에 돗자리 펴 달고 신라를 떠나 동지나해, 남지나해, 벵골 만을 가로질러 갠지스 강 삼각주에 상륙한 혜초 스님’을 이야기하면서 ‘구법정신과 접목한 신라 프런티어십의 현대적 구현으로 불교인식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쾌거’라고 찬사를 보냈다.

“법문을 할 때 생사일여(生死一如) 혹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내가 살아있으면서 과연 생과 사에 끄달리지 않고 초연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어요. 편안한 일상에서 벗어나 죽음과 대면해야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지요. 출발할 때는 알라스카나 남태평양으로 밀려가서 고생하다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스님은 경전에서 읽던 제망찰해도 볼 수 있었다. 나를 당장 삼켜버릴 듯이 덤비기만 하는 파도나 바람이 계속 똑같이 무서운 얼굴로만 있지는 않다는 것을 체험하고는 공사상을 새로 정립했단다.
“집채만 한 파도도 몇 시간 또는 며칠이 지나면 견딜만할 정도로 변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바람이 전혀 없는 무풍지대에 갇히기도 했어요. ‘파도와 바람에게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공의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있던 파도가 없어지기도 하고 없던 바람이 생기기도 하기 때문에 ‘없다’로 규정할 수만은 없음을 깨달았지요.”
‘바다에 파도와 바람이 있듯이 이 세상에도 많은 위기들이 있다’면서 아무리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어도, 언젠가는 가라앉게 돼 있으니, 일시적인 위험에 겁먹거나 포기하지 말고, 지혜롭게 극복해야 함을 강조했다. 삶의 시시처처(時時處處)에서 위기를 맞고 또 위기를 넘기는 것이 우리네 생이 아니던가.

높이가 5~6m나 되는 파도가 쉴 새 없이 들이치면 뇌리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 가득 찼고, 그 공포감을 통해 망망대해에서 한 점에 불과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스님은 말미에 “지금 죽는다 해도 미련 같은 것은 별로 없다”고 덧붙였다. 스님은 생사를 온몸으로 체득했기에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한조각 구름에 불과함을 여실히 깨달은 것이 틀림없다. 태평양횡단은 지명 스님만의 또 다른 수행방법이었다. 스님은 태평양 횡단을 마치고 나서 종단의 이런저런 직책을 다 내려놓았다. 지금은 괴산 각연사와 안면암을 오가면서 수행과 포교에 힘쓰고 있다. 스님은 바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면서 이런 말씀을 들려주었다.

“바다는 더러운 물, 깨끗한 물을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고,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모두가 본질적으로 평등하고 하나라는 가르침을 주는가 하면 바다에게는 적이 없어요. 아무리 끝이 날카로운 바위나 절벽이 앞을 가로 막더라도, 그것들과 직접적으로 대결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끊임없이 감싸고돌잖아요.”

바다의 습기는 인연 따라서 수증기, 구름, 비, 물, 눈, 얼음 등 수많은 몸으로 나툰다. 구름의 몸으로도 물의 삶을 누릴 수 있듯이, 우리의 자성 또한 무한한 것이니 어떤 틀 속에 가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명 스님 약력

부산 범어사 강원과 영천 죽림사에서 내전을 수학.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 마침. 미국 템플대학 종교학과에서 석사, 철학박사 학위 취득. 의왕 청계사, 법주사 주지 역임. 중앙종회의원 역임. 1993년과 1994년 ‘불교방송’에서 <교리강좌>와 <열반경> 강의. 2004년 무(無)를 닦기 위해서 요트를 타고 미국에서 한국까지 태평양을 횡단. 지금은 각연사와 안면암을 오가며 수행과 포교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허공의 몸을 찾아서> <깨침의 말씀 깨침의 마음> <큰 죽음의 법신> <무로 바라보기> <그것만 내려놓아라> 등이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