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서울대 불이회(不二會) 초청 특별강연회서 법문

“Seon Practice in the Modern World-현대인의 삶과 선(禪)”
서울대 대봉 스님 초청 특별 강연
일시: 2009년 3월 26일
장소: 서울대학교 국제회의실
주최: 서울대학교 불이회(不二會)
법사: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무상사 조실 대봉(大峰) 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는 가르침을 남긴 숭산 스님(前 화계사 조실, 1927~2004)의 전법 제자다. 오랜 기간 해외포교를 통해 한국 간화선의 세계화에 앞장섰던 숭산 스님은 대봉 스님 외에도 현각 스님 등 다수의 푸른눈의 수행납자들을 상좌로 뒀다. 복잡한 삶 속에서 고뇌하는 현대인들은 숭산 스님 열반 이후 간결했던 스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서울대 불자 교수모임 불이회(회장 배광식)는 3월 26일 대봉 스님 초청 특별강연회를 개최했다. 대봉 스님은 이날 강연에서 쉽고 재미있는 법문으로 스승의 화두 ‘오직 모를 뿐’을 강조하며 청량제와도 같은 감로법문을 쏟아냈다. 다음은 이날 법문의 요지다.

저는 오늘 지팡이를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오늘 법문은 법고좌에 올라서 하는 형식적인 법문은 아닙니다. 저의 스승이신 숭산 큰 스님이 하셨던 방법으로 시작 해보겠습니다.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탕!(책상을 주먹으로 치면서) 모양(相)이 공(空)이며 공이 모양입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무상합니다. 이분법 적인 세상이라 할 수 있죠. 인간은 누구나 이분법적인 세상에 살고 있고, 이 현상에 익숙해져 그 세상이 전부인 듯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은 물이고 물은 산입니다.
탕! 모양(相)도 없 공함(空)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정적이고 모든 것이 공한 상태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원점에서 시작해 공(空)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절대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이때는 이분법적인 세상이 아닙니다. 이 순간을 우리는 표현할 수 없기에 모양도 없고 공함도 없다고 합니다. 단지 모양도 공함도 없을 뿐입니다. 산도 없고 강도 없습니다.
탕! 모양(相)은 모양이고 공(空)은 공입니다. 여러분이 생각, 공함,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것입니다. 모양도 완전한 것이고 공함도 완전한 것입니다. 하늘도 완전하고 땅도 완벽한 것입니다.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다 완전한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들도 지금 이 순간도 완전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완전한 세계이며 진리의 세계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고나 공함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고 본성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는 모든 것들이 분명하다면 모든 것이 다 분명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완전한 세상, 진리의 세상이라고 합니다. 모양(相)은 모양이고 공함(空)은 공함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 이 순간을 사는 것
도대체 어떤 세상이 바른 세상일까요?
할! 산은 높고 물은 흐르고 있습니다. 이게 끝입니다. 이것이 법문의 요지이고 끝입니다. 하지만 이 네 개의 세상이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분법적인 세상, 절대적인 세상, 완전한 세상, 마지막은 이 순간의 세상입니다. 순간의 세상은 실생활에서 실천의 세계를 가르칩니다. 산은 높은 것이 산의 할 일이고 물은 흐르는 것이 물의 할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네 가지 현상에 대해 바르게 인지하고 수행하고 있다면 바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수행이 얼마나 이 세상과 적용돼 소통하고 있을까요?
여러분들이 산에 있는 스님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하면서 기뻐할 수 있겠죠. 이런 말들은 굉장히 근사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에 도움이 될까요?
아이가 울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이는 아이고, 엄마는 엄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나요?
“뼈를 부수고 빨리 몸 밖으로 나와!” 이렇게 말해야 할 까요? 바로 여러분들의 생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나무가 흔들립니다. 하지만 나무는 결코 쓰러지기 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인식 속에 얽매여 있지 않다면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금방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울고 있는 아이에게 달려가 안아주는 것이죠.
선수행이란 것은 이분법적인 세상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분법적이고 절대적인 세상에서 지적으로 따지고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여러분의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매 순간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禪)은 결코 특별하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고 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이 선입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who am I)?’

# 오직 할 뿐
여러분들 집에서 누가 설거지를 담당합니까? 설거지를 할 때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다음번에 한번 체크해보세요. ‘우리 남편은 별로야. 우리 애들은 왜이리 속썩이나….’ 이런 생각 안 해보셨나요?
제가 미국 선방에 있을 때 45명분의 그릇을 설거지 하는 담당을 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밥 먹고 나서 설거지 하는 것을 매우 싫었습니다. 참선이 끝나고 설거지까지 하려니 피곤할 수 밖에요. 제가 그때 자주 생각했던 것은 ‘사람들은 왜 먹을까? 안 먹으면 설거지할 필요도 없을 텐데…’ 였습니다.
어느 날 저보다 선 수행을 앞서 시작했던 다른 사람과 함께 설거지를 했습니다. 그들은 그냥 설거지를 할 뿐(just do it)이었습니다. 저도 그들을 보고 따라하게 됐죠. 그리고 30분 뒤에는 설거지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생각 없이 설거지를 하니 금방 끝나는 것 같고 에너지도 생기는 듯 했습니다. “아 설거지야 말로 참선 수행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 ‘아 여기가 내 선방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해보십시오. 스펀지, 세제, 물들이 화두가 될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큰 궁금증과 질문을 품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몸과 마음이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그릇을 깨게 되겠죠.

# 나를 되돌아보기
30년 전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미국 플로리다에 가면 개 경주(Hound Racing)장이 있습니다. 개들이 토끼 모형을 쫓아가게 해 트랙을 도는 경주인데 개들은 토끼 모형을 잡기위해 신나게 달립니다. 토끼는 뒤에서 사람들이 조종하면서 개들이 절대 따라잡지 못하게 합니다. 경마와 같이 사람들은 경주견들에 돈을 겁니다.
그곳에 클리어메리(Clearmary)라는 항상 1등을 아주 뛰어난 경주견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개에게 돈을 걸곤 했습니다.
어느 날, 클리어메리는 출전하는 경기에서 토끼를 쫓아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리를 쳐다보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야 이 바보같은 개야 빨리 달려 달려!” 하지만 그 클리어메리는 토끼를 쫓아가는 개를 그냥 바라볼 뿐입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방향을 바꿔 반대방향에서 오는 토끼를 확 덮쳤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숭산 스님은 “그 개야 말로 참선하는 마음을 갖고 있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인간도 이 경주견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어떤 것을 추구하고 쫓고 쫓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얻더라도 진실 된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도 없고 그것은 영원히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스님들조차 “난 꼭 깨달음을 얻어야돼”라는 집착을 갖고있죠. 하지만 영원한 깨달음을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클리어메리는 달리던 걸 멈췄습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본 것이죠. 그리고는 그 토끼를 잡은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부처님도 멈춰서 서 자신의 내부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봤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음선종에서 가르치는 “순간 순간이 중요하며, 주의집중 하라”는 것입니다.

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수행은 바로 이 처럼 현대의 삶, 사회와 연관돼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 하겠습니다. 매일 우리는 음식을 먹습니다. 왜 음식을 매일 먹습니까?
내 위를 위해? 내 혀를 위해? 내 몸을 위해? 내 가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모든 생명체들을 위해? 왜 먹습니까?
대답이 분명하다면 인생이 분명해지고 그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의 인생조차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 저녁에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최상의 가르침은 바로 이 질문입니다. ‘오직 모를 뿐’을 항상 염두에 두시고 수행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깊은 궁금증을 마음속에 품고 ‘오직 모를 뿐’ 그 마음으로 가세요. 이 자리에 계신 모두가 우리의 참 본성을 깨닫고 모든 인류를 고통에서 기원합니다.

대봉 스님 약력
1950년 미국 출생. 대학 졸업 후 5년간 교도소 및 정신병원의 상담사, 조선소 용접일을 함
1977년 선을 전하기 위해 도미한지 4년 된 숭산 대선사를 친견 후, 미국 프로비던스 선센터에 거주하며 선수행 시작
1984년 수계 후 동안거 결제를 위해 내한
1985~1993년 프랑스 파리 선원 주지, 미국 버클리 선센터 및 케임브리지 선센터 주지를 순차로 역임
1992년 숭산스님께 인가 받음
1999년 법을 전해 받음
1993~1999년 숭산대선사가 계신 서울 화계사에서 선수행 및 교화활동
1999년~ 숭산대선사를 도와 충남 계룡산에 무상사 건립. 미국, 유럽 및 아시아에서 선 수행 및 교화를 했고 현재 무상사 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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