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 스님 <법화경 강의> 불광사서 출판기념 법문

前 조계종 교육원장 무비 스님의 <법화경 강의>(불광출판사)를 출판 기념법회가 11월 30일 서울 불광사(회주 지홍)에서 봉행됐다. 이날 무비스님은 대승불교의 꽃인 <법화경> 법문을 통해 “사람이 부처님이다”는 인불(人佛)사상을 시종일관 강조하며 ‘부처아들(佛子)’다운 삶을 살 것을 당부했다. 스님은 인터넷 전법도량 염화실(cafe.daum.net/yumhwasil)을 통해 전법에 힘쓰고 있는 이시대의 강백이다. 스님은 현재 범어사 강주로 있으며 많은 집필활동과 전국 각지 법회를 통해 불자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있다. 역저서로는 <금강경오가해>를 비롯해 <금강경강의> <화엄경강의> <사람이 부처님이다> 등 다수가 있다. 경전과 조사어록뿐 아니라 동양고전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더불어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일상에서 진리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탁월한 통찰력이 담긴 무비 스님의 법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요즘은 모든 것들이 불확실합니다. 국제ㆍ국내 사정이 어느 때보다도 불확실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일을 예측하지 못하는 시기를 우리가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확실하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을 만듭니다. 경제가 어려워서 불안한 점도 있지만, 그 어려운 상황들이 이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까닭에 그 불안은 더 가중됩니다. 이럴 때 불자들은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야 부처님 제자다운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요? 첫째, 이런 상황에 의연해야겠고, 둘째, ‘부처님을 믿는 불자들은 불안한 상황에서도 의연하구나’하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게끔 하는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불자로서 이러한 시대에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면 불교정신으로 단단히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교에는 수많은 가르침과 진리, 사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내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튼튼한 의지처가 될 <법화경>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컨대 나무꾼이 나무를 한 짐 짊어지고 길을 가다가 황금을 만났습니다. 나무꾼은 곧바로 나무를 버리고 황금을 한 짐 짊어지고 돌아왔습니다. 그 값은 나무보다 수 만 배나 더 많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에 있어서도 불완전한 가르침을 버리고 진실한 가르침인 <법화경>의 길로 바로 들어온 것은 하루의 공덕과 수 만년의 공덕으로 비교됩니다. 그러므로 육조 혜능 스님은 나무꾼의 길을 버리고 불법의 길로 들어선 것이며 여러 불자들은 삿된 가르침을 버리고 참다운 성인의 가르침에 귀의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느 한 곳에 국한되는 가르침이 아닌 민족, 국가, 사회에 다 적용되는 ‘진리의 가르침만을 의지하라’는 것을 <열반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법화경>은 하나의 진리를 다양한 방편으로 종합해 엮어 모든 사람을 하나의 길로 이끄는 경 중의 왕입니다.

<법화경>의 원래 이름은 <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으로 ‘연꽃처럼 아름답고 미묘한 진리의 가르침’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연꽃의 특징은 첫째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항상 더러운 곳에 있지만 늘 깨끗합니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죠. ‘처염’은 우리의 현실, 삶입니다. 이 육신을 가지고 살면서 부패, 비리, 영광에 뒤섞여 있는 현실의 내면에는 청정하고 위대한 사람의 지고한 가치, 본질이 늘 내재해 있다 해서 ‘상정’이라 표현합니다. 둘째로,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있습니다(花果同時). 대개 다른 열매들은 꽃이 피어서 그 꽃이 질 무렵에 열매를 맺지만, 연꽃은 꽃이 피기 전에 이미 열매가 들어있습니다. 부처님이 왜 <묘법연화경>을 연꽃에 비유했냐하면, ‘꽃이 사람이라면 열매는 부처님’이라 본거죠. 일반적인 불교에서는 중생이 수행을 해 그 결과로 부처가 된다고 표현하나 <법화경>은 ‘사람과 부처가 동시이며 중생과 부처가 하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특징은 색향미묘(色香美妙)입니다. 색과 상이 미묘하다는 말입니다. ‘사람만큼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극히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거죠. 이러한 인간의 내면성을 깊이 깨달으시고 널리 펼치는 것이 <법화경>의 내용입니다.
<법화경>은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했습니다. 근본은 일불승(一佛乘)이며 목적도 일불승이라 했습니다. 모든 삶을 부처의 모든 것으로 귀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 따라서 별별 삶이 가능합니다. 당장 아귀, 축생, 아수라도 될 수 있습니다. 천태 스님께서는 한 순간의 생각 속에 삼천종류의 삶이 들어있다 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 인간의 삶에는 별별 것이 있는데, 부처는 이를 이해해야하며 궁극적으로 일불승이라 한 부처의 삶으로 귀결돼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법화경>에서는 ‘선한 마음 쓰는 것이 다 부처가 아니고 악한 마음 쓰는 것이 다 중생이 아니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마음 쓸 줄 아는 그 사실이 부처다’고 했습니다. 선이든 악이든 그 할 줄 아는 능력, 웃을 줄 알고,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을 줄 아는 그 능력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결론적으로 <법화경>에서 수기로 표현했습니다. <법화경>을 다른 말로 하면 수기경(授記經)입니다. 그래서 사리불부터 십대제자까지 500제자를 수기합니다. 심지어 천하의 무도한 악인까지도 부처라고 수기합니다. 악한 것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악한 일을 할 줄 아는 그 당체, 그것은 곧 한 생각 돌이키면 선한 일도 할 수 있고, 선한 일 할 줄 아는 것은 바꾸면 악한 일도 할 줄 안다는 의미입니다. 할 줄 아는 이놈이 위대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공부하는 불자들은 불교에 대한 차원의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방편품(方便品)에 보면 아이들이 장난삼아 모래를 뭉쳐놓고 그것이 불탑이라고 장난을 칩니다. 부처님은 이를 개이성불도(皆已成佛道)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이미 불도를 이루어 마쳤다’는 뜻인거죠.

또 어떤 사람이 망상과 번뇌가 들끓어 부처님 앞에 고개를 한번 숙인다던지 “나무불”하고 염불을 한다 던지, 절을 하기 싫어서 손을 한번 부처님 앞에 들었다 놓는다 던지 이것만으로도 ‘그대는 이미 부처를 이룬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은 이런 경전입니다. 확인하면서 정신을 다지십시오. 모든 가르침들이 염주 꿰듯이 쭉 하나로 연결 될 것입니다.
<법화경>은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대하는 것을 인격과 몸, 모든 삶에서 실천하기를 강조합니다. 절에서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염불하는 것보다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염불이 천배, 만배 공덕이 수승하다고 합니다. 방편품에서는 어린아이의 장난으로, 산란한 마음으로, 꽃 한 송이 공양도, 나무불이라는 염불 한마디도, 탑전에 고개 한번 숙이는 일도 모두가 다 이미 성불해 마쳤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차별하지 말고 그대로 부처님으로 예배 존중 찬탄 공경 공양하며 살 때 모든 인간의 지상목표인 행복이 성취될 것이며, 그것이 행복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을 ‘개시오입 불지견(開示悟入佛知見)’이라고 했습니다. 개(開)란 개발한다는 뜻이니, 무명을 파해 중생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연다는 것입니다. 시(示)란 드러내 보인다는 뜻으로, 이미 미혹과 장애를 모두 끊어서 지견의 본체인 법계의 참된 덕을 드러내 보임을 말합니다. 오(悟)란 각오(覺悟)를 가리키는데 진실된 실상의 본체를 원만히 깨달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입(入)이란 증득해 들어간다(證入)는 뜻으로, 중생에서 부처의 지견(지혜)을 증득해 걸림이 없고 자재함을 말합니다. 이로써 부처의 지견(지혜)을 열어 보이는 겁니다.

부처님은 오랜 수행 끝에 자신과 중생 모두가 고귀한 부처의 생명,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춘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은 펄쩍 뛰면서 “이야 신기하고 신기하다. 어떻게 해서 저 못난 중생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불성을 다 갖추고 있는가”하셨다 합니다. 부처님은 그런 안목을 가진 분입니다. 사람에 대한 실다운 모습을 바로 보신 분이라는 것이죠.

인불(人佛) 사상은 이미 불교에 있어 왔는데 이제라도 물리ㆍ사회ㆍ인문학계에서 깨달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츰 접근해가고 있다는 것은 참 다행입니다.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파했는지, 이것이 가치 있는 종교이며 참다운 성인인지를 명철한 안목으로 판단해야 해요. 그것을 우리 불자들만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고, 할 수 있어요. 곳곳에 그런 경전의 증거가 있으니까요. 그것이 말하자면 부처님의 혜안(慧眼)입니다. 사람의 중요한 가치를 볼 줄 아는 것이 부처님의 지혜예요. 그것을 보여주고 열어주고 깨닫게 해주고 그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삶이 되도록 하기 위해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셨다 하는 것을 <법화경>에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왔다가 “내가 살아있는 신이구나, 내가 살아있는 부처님이구나, 활신이요 활불이고 생불이구나” 하는 이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는 부처님과 인연이 됐으니까, 이 사실만이라도 알고 가는 것도 대단한거죠. ‘아 내가 부처님이구나 진정 부처님이구나, 부처가 되는 데에 아무런 손색이 없구나 내가 비록 늙었든 무식하든 가난하든 남자든, 여자든 몹쓸 병에 걸렸든 장애인이든 아무 관계없이 정말 위대한 존재, 아프면 아플 줄 알고 기쁘면 웃을 줄 아는 무량공덕, 무량생명, 무량광이구나.’ 이러한 사실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알고 가라는 것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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