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 알려면 삶이 무엇인지 먼저 고민하라

- 강사 : 돈연 법사(시인ㆍ메주와첼리스트 대표)
- 주최 : 현대불교신문사
- 일시 : 2008년 8월 27일
- 장소 : 조계종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공연장

<황금털사자의 미미소>출간 기념 특별 강연회
메주와 첼리스트 禪詩를 말하다.

인간의 존재를 자문하는 선시의 세계를 논한다.
현 정부 들어 이어지고 있는 종교 편향에 대해 불자들의 마음을 모아 항의하고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범불교도대회가 열렸다. 같은 날 저녁 조계사 밖을 갈무리 하듯 조계사 안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는 성난 불심을 다독이듯 초연한 선의 세계, 시의 세계로 몰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황금털사자의 미미소> 출간을 기념해 기획된 돈연 법사의 초청 강연이 바로 그것이다. 돈연 법사와 그의 도반 도완녀, 우리는 그들을 ‘메주와 첼리스트’라고 부른다. 도완녀가 강연에 앞서 연주한 ‘그리운 금강산’은 난해한 선시의 세계로 입장하는데 윤활유가 되었다.
<황금털사자의 미미소>는 우리나라 근현대기에 선풍을 일으킨 경허 스님 이하 12분 큰 스님의 선시를 통해 선사의 삶과 선 세계를 이해하는 본격적인 선시 해설집이다. 저자 송준영은 서문을 통해 “젊은 시절 산사에서 노장 스님께 단편적으로 얻어 들은 선장들의 설화는 삶의 지표가 됐다. 눈 푸른 선사들이 도처에 웅크리고 있던 시절, 그들의 입각처인 진원지에서 더불어 크게 웃는 것이 꿈이요 현실이 되길 갈망했다. 이 책은 나의 그림자인 동시에 나의 깊은 곳에 깔린 나의 얼굴이다. 어눌한 말씨로 띄엄띄엄 들려주시던 선사의 말씀들은 고적한 산사에서 헤매던 나에게 어느 논서보다 나를 매료시켰고 그들과 동일시하는 성향으로 길들여져 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선사들의 행장이 뒤섞여 구분이 힘들어졌다. 이에 어록을 필사하고 수집 정리해 12분의 선지식을 전편으로 나머지 12분을 후편에 모셔야겠다는 기획을 했다”고 저술동기를 밝혔다.

#<황금털사자의 미미소>와 만남 위한 가이드라인
선시에 처음 나타나는 금모사자의 한글 번역인 황금털 사자는 문헌상 중국 당대에 어느 선사가 조주 선사에게 준 게송에 보입니다. ‘구름 속에 황금털 사자가 나타나더라도 정안의 길조가 아닐 텐데...’라는 내용입니다. 중국 오대산 청량사는 화엄종 4조 청량 국사를 기리며 건립됐는데 설법 때 구름 속에 황금털 사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황금털 사자는 본연의 진면목을 의미합니다. 선시 수사법에 보이는 실상의 표현이죠. 선문에서 ‘알 수 없다’는 불교 진원의 진체를 부지(不知) 또는 불회(不會)로서 근본의 ‘모르오’를 형상화합니다. 근대의 선지식이 우리에게 전하는 자비심의 실상 즉 승가의 다른 표현입니다.
조사 스님의 선시는 모두 중생의 눈을 뜨게 해주고자 하는 방편으로 자비심의 발로입니다. 선장이 보여주는 생동하는 삶은 우리가 떠나온 근본 진원지인 실상으로 환지본처(還之本處)하도록 합니다. 선시는 선의 참 도리를 깨우치게 함으로서 중생을 대자유인으로 제도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면의 본래면목을 표현하는 선시의 방식이 포스트모더니즘사상을 형성하고 완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선시의 표현법은 후기 현대시의 중심사상으로 작용했고 선시 고유의 수사학을 두고 무한실상에 대해 모순적 어법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로부터 선시를 전위적으로 해석하게 됐습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禪이다.
선시란 말로 할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고로 선은 어렵게 인식되고 행하기 쉽지 않습니다. 평생 동안 이름 없이 선수행하다 죽어간 선승들도 많습니다. 어록을 통한 기록 또한 1만 명 중 한 명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황금털사자의 미미소>출간이 지닌 의미는 실로 소중합니다.
삶이란 늘 돌발적으로 움직이고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선이란 산스크리트어로 ‘디아나(dhyna)’의 음사입니다. 조용히 생각하는 것, 사유수(思惟修)라는 뜻으로 고대 인도에서 요가라는 명상법 중 정신통일 부분이 불교에 도입된 것입니다. 그나마 명상(meditation)이라는 해석이 가장 흡사합니다. 6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지금의 파키스탄 유적지 모헨조다로(Mohenjo-daro)에서 선의 기원을 찾습니다. 고대인들의 사유 형식을 표현한 말로 선의 뿌리는 적어도 불교ㆍ중국ㆍ동북아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선 안에 들어가면 복잡다단한 사바세계를 단순 명료하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선을 언어 밖의 소식,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고 정의하죠.
저는 농부입니다. 법사라는 호칭이 과분합니다. 선을 수행하고 경전을 번역하는 것 또한 제 본업이 아닙니다. 저는 1973년에서 1979년까지 봉은사에 살았습니다. 땅 한 평에 1100원 하던 시절입니다. 제가 현재 기거 하는 강원도에는 트랙터를 몰고 4만평은 가야 할 농토가 있습니다. 제가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 밑에서 번역 공부를 열심히 하고 바로 산중으로 들어가 미친 듯이 선방에 기거할 때 일입니다. 선방에서 가행정진을 하게 되면 12시에 자고 3시에 일어납니다. 12시 정각이 되면 죽비를 치고 15분 내에 준비하고 잠자리에 든 후 2시 45분에 기상해 세안 후 3시 정각에 죽비를 치면 절 3자리로 예불을 대신합니다. 이것이 선수행의 일과입니다.
치열히 공부하는 내내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과연 도(道)란 무엇일까?’ ‘선수행의 길이 참된 길인가?’ ‘모든 것이 보호된 승가에서 도를 얻을 수 없다면 내 인생의 낭비가 아닌가?’하는 의문이 샘솟던 때에 광주사태가 발발했습니다. 여전히 ‘나’와 ‘수행자’의 관계를 고민했습니다. ‘내가 과연 공양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부끄러워졌고 법당 문을 열기가 두려웠습니다. 바로 인도로 향했고 대륙을 맨발로 2000km 행진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강원도 땅에 농사를 짓고 결혼해 자식도 셋을 낳으면서 사업도 확장했습니다. 150만원으로 시작한 사업이 100억 가까이 수익을 올렸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 아닐 런지요.
과연 선의 정신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저를 미국으로 인도로 히말라야 사막으로 인도하는 것일까요. 12시에 자고 3시에 일어나는 선방의 아닌 삶의 현장에서 계속 찾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선이었습니다.
선을 체험하고 싶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무식 유식의 여하를 떠나 ‘삶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하십시오. 이것을 대의단심이라고 합니다. 큰 의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제가 선방에서 처음으로 만난 선지식이 구산 스님입니다. 스님께서 묻기를 “조계산만한 황금이 있다. 자네 생명과 바꿀 수 있겠는가?” 저는 “안 바꾸겠다”고 답했고 스님은 “그것보다 더 귀중한 보물이 있으니 받거라”하고 던져 준 것이 바로 ‘무(無)’입니다. 이 말씀이 저를 현재에 이르게 했습니다.
사바세계에 인간으로 태어난 참 뜻을 아십니까? 이 세상에 어떻게, 왜 왔을까요. 우리가 살아가며 잊고 지내는 것 중 하나가 ‘이 세상에 내가 태어난 목적’입니다. 이 세계를 선택한 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나 이외의 어느 것도 내가 이 사바세계로 향하도록 권하지 않습니다. ‘나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선명하게 깨달으십시오. 선사들은 그것을 깨닫고 아는데 신앙생활을 통하는 것보다 하나의 커다란 의심으로 단도직입적으로 직행하는 방법을 추구했습니다.
대분심을 내어 분발하고 논쟁하며 비판하십시오. 선은 분심이 있어야만 불발할 수 있습니다. 긍정을 돌출해 내기 위한 비평 정신을 키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대 용맹심을 내십시오. 현재의 비롯함은 어제입니다. 미래는 어제와 오늘의 합입니다. 부처님도 “너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오늘 현재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이란 철두철미하게 마음의 현장입니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 의심하고 분발하는 내 모습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거대한 용기입니다. 성취는 용기에 정비례합니다. 진정한 용기는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의 주제입니다. 돌장승이 춤을 추고 금빛 사자가 구름 속에서 얼굴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선시는 이렇게 질기고도 고통스러운 실상을 노래하며 그 안의 보석을 찬미합니다.
자기 자신의 스승은 자기 자신입니다. 소설 ‘갈매기의 꿈’의 저자 리차드 바크의 말입니다. 자기 자신 이외에 누가 자기 자신의 스승이 될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게 되면 만나기 어려운 스승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을 잘 보살피십시오. 인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자기 자신을 분명히 지켜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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