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에 투영된 다선일미의 향운

- 강사 : 예밍 왕(Yeming WANGㆍ감독)
- 주최 : 사단법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회
- 일시 : 2008년 7월 22일
- 장소 : 부천 프리머스 시네마 소풍 9관
-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경기도, 부천시,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상자료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부천문화재단, 일본국제교류기금


손님이 오면 으레 엽차 한 잔을 내놓듯 차는 우리 일상에 보편화된 문화다. 차를 논하는 사람치고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이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차는 창작의 원천을 제공한다. 차는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그 간극을 부드럽게 융합시키는 효능을 지녔다. 불교의 선사들도 차를 통해 화두를 들었고 구도 행각을 펼쳤다. 그러한 범상치 않은 차 한 잔을 예술로 승화시킨 영화가 있어 주목된다. 차에 담긴 가치와 정신을 중국ㆍ대만ㆍ일본 동북아 3국을 배경으로 제작한 예밍 왕 감독의 ‘녹차전쟁’이다.
중국으로부터 전해져 각국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룬 차 문화의 맛과 기술을 겨룬다. 원제 ‘투차(鬪茶)’는 중국 복건성에서 발생한 녹차의 맛과 향기를 겨루는 시합을 일컫는 말이다. 영화 속 다인들은 다도에 임하는데 있어 절제된 예의와 작법을 갖춰 선보인다. 선과 악이라는 이중 구도를 중심으로 궁극의 평화를 향해 가족애와 연인 간의 사랑이 갈등하고 화해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고요하고 평온한 가운데 지극히 깨어있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을 신세대 감각의 영상미로 표현한 수작이다. 애니메이션과 특수효과를 적절히 사용하면서 방대한 사건과 인물들을 느슨하지 않게 조합됐다. 녹차를 가지고 벌이는 시합의 순간은 역동적으로 완성했다. 사랑ㆍ환상ㆍ모험을 주제로 제1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된 ‘녹차전쟁’을 통해 행복을 부르는 환상의 차에 감춰진 비밀이 공개된다.

중국 송나라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에 이르기를, 마시면 혈기가 왕성해지고 폭력적인 기운이 생기는 ‘웅흑금차(雄黑金茶)’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평온한 기분이 드는 ‘자흑금차(雌黑金茶)’가 있었습니다. 오랜 전설의 두 명차는 두 파벌로 나뉘어 최고를 가리는 피의 대결을 펼쳤죠. 분노한 웅흑금차파는 자흑금차파의 차밭을 모두 불태워버립니다. 그 때 전쟁에 가담한 것을 뒤늦게 후회한 이가 있었고 힘겹게 지켜낸 한 그루의 묘목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 때 두 파의 싸움을 지켜보던 한 아이가 웅흑금차와 자흑금차를 하나로 합해 마시더니 바로 용이 되어 승천했다고 합니다.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일본 교토의 유서 깊은 ‘야기(八木)찻집’에는 선조부터 전해 내려오는 자흑금차 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습니다. 당대 최고 차의 달인이었던 ‘야기’는 환상의 ‘흑금차’ 재배에 몰두하는 사이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되고 ‘흑금차의 저주’를 받았다 여기며 의욕을 잃은 채 살아갑니다. 아버지가 차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딸 ‘미키코’는 저주를 풀기 위해 대만 녹차학교로 향하죠. 그러나 대만에는 이미 60년 전에 차 암시장계를 장악한 웅흑금차의 후손이 ‘미키코’의 자흑금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명차는 과연 완성될 수 있을까요?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 時代: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에도 ‘투차’와 관련한 설화가 전해집니다. 마신 물의 산지를 알아맞히는 ‘투수(鬪水)’란 놀이에서 한 단계 발전해 여러 종류의 차를 나누어 마신 후 그 품종과 산지를 맞추는 놀이입니다. 교토ㆍ나라 등 각지로 차 재배지가 확대되면서 귀족에서 서민까지 골고루 즐기는 차 놀이문화가 되었죠.
최고의 차는 어떻게 가려낼까요. 첫 번째는 거품의 지속력입니다. 그 다음은 향의 은은함에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맛도 중요합니다. 최종으로 다도의 기량과 완성도 또한 경합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일본은 신사에서 다도회를 자주 개최합니다. 우리가 흔히 가루녹차를 거품 내 완성하는 말차가 일본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만 말차의 기원은 중국 송나라입니다. 중국에 머물던 일본 스님이 백장 선사의 백장청규안의 규범을 배워 일본으로 돌아가 다도를 전수한 것이 일본 말차의 시초입니다. 중국에서 말차법이 사라진 것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다법(茶法)을 개혁하면서부터입니다. 당(唐)ㆍ송(宋)ㆍ원(元)을 거쳐 전해 내려오던 차제조법이 서민생계에 유해할 뿐 아니라 사대부들의 사치를 조장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엽차(葉茶)를 마시는데 용이한 소호(小壺)의 사용이 점차 흥성해 오늘 날 중국 차 문화에 이른 것입니다.
차의 품질은 색ㆍ향ㆍ맛ㆍ기술입니다. 차를 왜 마실까요? 오직 인간만이 차를 마십니다. 지금 여기 15년 된 우롱차가 있습니다. 오래 숙성시킬수록 향과 맛이 탁월하지요. 반드시 처음에는 향을 음미하십시오. 그리고 홍차와 비슷한 맛을 지닌 꿀 향이 나는 차가 있습니다. 부드럽게 입안을 감싸는 느낌으로 영국인들이 동양의 샴페인으로 부르는 차, 바로 ‘동방미인’입니다. 차에는 여성에게 느껴지는 매력과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미키코’의 어버지 ‘야기’도 그러한 차의 매력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부인을 잃었습니다.
영화에는 자흑금차를 찾는 여인 ‘루후아’가 나옵니다. 그녀는 자흑금차의 후손으로 웅흑금차의 후손과 대만 녹차학교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이 둘의 인연은 선조들이 지은 악연의 업(業)으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사랑은 증오와 분노의 장막에 가려져 있습니다.
웅흑금차를 너무 많이 마시면 폭력성을 지니게 됩니다. 어찌 보면 이 시대에 유통되는 차가 웅흑금차가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자흑금차가 지향하는 세상도 옳지 못합니다. 마치 마약에 취한 듯 흐릿할 테니까요. 이 둘은 적당히 어우러져야만 하며 인류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 역시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해답은 한 잔의 차에 있습니다. 각각이 지닌 성장의 아픔과 사랑의 안타까움 그리고 분노의 기억이 지닌 아픔들이 녹아 한 잔의 차로 완성됩니다. ‘녹차 전쟁’에서 나의 적은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다도의 진수는 바로 나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구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실은 속세를 벗어난 별세계입니다. 차선을 휘젓는 소리에 집중해 보십시오. 광대무변의 천지가 다실 안에 있습니다.
진정한 화해의 차 그리고 치유의 차를 맛보십시오. 자기 자신과 싸울 때는 이기고 지는 승패가 없습니다. 결국 흑금차의 저주는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어두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입니다. 차란 ‘무엇을 마시는가’보다 ‘누구와 함께 마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영화 <녹차전쟁>은 어린 시절부터 차를 즐겨오던 경험에 비추어 완성됐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벌어지는 매우 사소한 다툼의 근원은 무엇일까 고민해왔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고민했습니다. 그 해답은 차 안에 공존했습니다. 평화의 길은 차 안에 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관객 여러분이 갈증을 느끼시고 극장 밖을 나가 시원한 차 한 잔 마시면서 갈등하는 모든 것들과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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