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ㆍ만공의 선풍과 법맥’ 학술세미나 열려


길을 가던 스승과 제자,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이 시냇물을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처녀를 만났다. 처녀를 등에 업고 물을 건네준 한참 뒤 경허 스님에게 만공 스님이 물었다. “출가자가 어찌 젊은 여자를 업을 수 있습니까?”하자, 경허 스님은 “나는 그 처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느냐?”

일화에 소개된 경허 스님은 1899년 해인사 정혜결사를 필두로 통도사, 범어사, 화엄사, 송광사 등에서 수선결사를 조직해 영ㆍ호남 일대에 간화선풍을 드날린 선지식이다. 경허 스님의 법맥을 이은 만공 스님 역시 40여년간 덕숭산에 주석하며 수많은 납자를 길러낸 종장이다. 정혜사, 견성암, 간월암 중창과 1920년대 초 선학원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만공 스님은 선우공제회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한국불교 발전과 간화선 중흥에 기여했다. 두 스님 모두 조선말 쓰러져가는 한국 불교를 지탱한 동량이었다.
그동안 경허ㆍ만공에 대한 연구는 근현대 불교사 연구가 미진한 가운데서도 수차례 발표ㆍ정리됐다. 덕숭총림 수덕사 부설 한국불교선학연구원은 1999년부터 2004년까지 경허ㆍ만공 스님과 관련한 학술회의를 정리해 총 5권의 <덕숭선학>을 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허와 만공 스님이 근대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췄을 때 여전히 미진하다는 평가다. 특히 경허 스님은 쇠잔한 선풍을 되살린 대선지식이라는 평가와 함께 자유분방했던 무애행이 한국불교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평가가 교차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그간의 연구를 회통하고 미진했던 두 스님에 관한 연구를 보완해 한국 불교의 미래를 비추고자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소장 현종)와 덕숭총림 수덕사(주지 옹산)가 ‘경허ㆍ만공의 선풍과 법맥’을 주제로 4월 2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설정 스님(덕숭총림 수좌)의 ‘경허ㆍ만공의 선풍과 법맥을 되돌아보며’를 주제로 한 기조연설로 시작한 세미나는 최병헌 교수(서울대)의 ‘근대 한국불교의 선풍 진작과 덕숭총림’, 고영섭 교수(동국대)의 ‘경허의 행장과 수행가풍’, 변희욱(서울대 강사)씨의 ‘경허의 선사상에 대한 재조명’, 김경집 교수(진각대)의 ‘근대 한국불교에서 만공의 활동’, 황인규 교수(동국대)의 ‘근대 비구니의 동향과 덕숭총림 비구니들’, 오경후 선임연구원(선리연구원)의 ‘경허ㆍ만공의 법맥과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 등 7편의 주제발표로 이어졌다. 설정 스님의 기조강연과 참석자들에게 주목받은 논문 두 편을 소개한다.

# 한국불교와 민족을 아우른 선지식
설정 스님은 기조강연 ‘경허ㆍ만공의 선풍과 법맥을 되돌아보며’에서 경허는 선교에 모두 달통했던 선지식이라 소개했다. 경허를 시비ㆍ생사 등 시비가 끊긴 무애도인으로 설명한 스님은 “해인사 간경불사 당시 경허는 해인사 조실이었다. 이때 <선문촬요>를 저술했고, 화엄법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설정 스님은 “경허는 화엄법회 당시 <대방광불화엄경>의 ‘대(大)’ 한글자만으로 1주일간 법문을 할 만큼 선교를 겸수했었다”고 강조했다.
설정 스님은 “만공은 경허를 가장 오래 시봉했고 유지를 받들어 법을 펼쳤지만 그 법에 차이가 있었다. 정법안장을 구현한 철저한 실참 만이 참 중노릇이라 가르쳤다”고 말했다. 스님은 “만공은 정법안장 구현이 유무에 따라 승속을 나눴을 정도로 철저했다”면서 “만공이 생각하는 출가자상은 참 생명을 찾은 사람”이라 소개했다. 만공이 민족불교를 주창했던 인물이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스님은 “일본 강점기때 많은 승려들이 창씨개명 했지만 만공과 그 제자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었다. 민족불교의 주체성을 지켜 선학원을 건립하고 유교법회를 봉행해 종지종풍을 바로 세운 인물이 만공”이라 주장했다.
또 스님은 “일선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만해와 김좌진을 뒤에서 돕던 만공은 항상 ‘광복은 반드시 된다. 광복보다 광복 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면서, 간월도 암자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설정 스님은 “간월도에 있던 사찰을 선비들이 없애고 묘를 쓴 일이 있었다. 만공은 조선총독부에 건의해 파묘하고 다시 사찰을 지었고 그곳에서 1000일 기도를 시작하며 기도가 끝나는 날 광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기도회향하는 날 광복이 됐다. 광복 후 민족분단이 된 만공의 우려도 기우가 아니었다. 이처럼 만공 스님은 민족의 장래까지도 훤히 비춰보던 선지식이었다”고 말했다. 설정 스님은 “경허ㆍ만공을 재조명해 오늘날 불교의 나아가길을 밝히자”며 “경허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범부의 견해로 스님의 깊은 진리를 어찌 짐작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더 이상 무애도인에 대한 폄하가 없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 이능화 등의 비판은 경허 업적에 대한 반증
‘근대 한국불교의 선풍 진작과 덕숭총림’을 발표한 최병헌 교수(서울대)는 “근대 한국불교는 조선조 500년 동안 억불정책으로 명맥만 유지하다 일본 제국주의 침탈과 일본불교의 왜곡으로 변질되던 위기였다. 여러 곳에 선원과 선실을 개설하는 등 선수행 풍토 진작에 앞장섰던 경허는 간화선 부흥자인 동시에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1918년 간행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를 인용해 “근대 한국불교는 선종이 교종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였다”고 말했다. 그 배경에 대해 최병헌 교수는 “조선 후기 선수행 기풍이 사라지고 강학ㆍ염불 등이 혼합돼 선종은 형체만 남은 외선내교(外禪內敎: 밖으로는 선을 하지만 실제로는 교를 닦는 기풍)였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한일합방 이전부터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각 종파들이 한국 불교를 장악하려 했다. 한일합방 후로는 사찰령과 30본산제를 통한 조선총독부의 한국불교 왜곡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을 찬양하며 협력했던 이능화가 <조선불교통사>에서 경허에 대한 많은 지면을 할애했던 것은 경허가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는 것을 반증하는 예”라면서 “당시 경허의 선법은 마설(魔說)로 비판받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최 교수는 “경허의 법은 선풍 진작 뿐 아니라 민족불교 운동의 효시였다. 1920년대 일본의 불교정책과 친일화 되는 불교에 대항해 일어난 선학원 운동의 주역이었던 만공ㆍ한암ㆍ성월ㆍ용성 등이 경허의 사법제자들이었다”고 설명했다.

# 대승보살의 화신, 경허
고영섭 교수(동국대)는 ‘경허의 살림살이와 마음가짐-간경불사와 수선결사의 역사적 의의’를 통해 “경허의 삶이 담긴 ‘살림살이’와 생각이 투영된 ‘마음가짐’의 기호가 역사와 철학 혹은 불사와 결사를 읽어내는 기표가 된다”고 전제했다.
고 교수는 “경허의 생년은 한암의 1857년설부터 만해의 1849년설 외에 경허의 행장을 거슬러 추정한 1846년설이 있다”고 소개한 뒤 “정확한 고증을 통해 통설로 확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펼쳤다. 그는 경허의 언어관을 행리와 행장의 검토, 간경과 불사, 가사와 노래로 나누고, 경허의 실천관을 수행ㆍ가풍의 분석 등으로 나눠 설명해 주목을 끌었다.
고영섭 교수는 “당시 법회는 한문불교 중심이었다. 대중들에게 선종의 선기를 명쾌한 언어로 소개한 <참선곡>이나 <중노릇 하는 법> 등 모두 국한문 혼용체였다”고 말한 뒤 “경허의 간경과 불사는 불교의 외연을 넓힌 불사”라고 정리했다. 그는 “견해가 같고 행동을 같이 하려는 사람이면 승속ㆍ남녀ㆍ노소ㆍ귀천 등 일체의 차별을 여윈 경허의 결사는 성불의 폭을 넓힌 불사”라고 평가했다. 특히 고 교수는 “경허의 결사는 지눌의 정혜결사를 계승했지만 선종 결사에 미륵정토의 사상을 결합한 것이 특징”이라 주장했다. 고영섭 교수는 “선법이 지닌 유사성과 선법의 대중화와 일상화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선종 결사와 미륵정토 사상은 상통된다”고 분석했다.
말년을 서당 훈장으로 살다간 경허를 고 교수는 “사문 경허에서 거사 선생 박난주로 인간상의 전환을 보였다”고 표현한 뒤 “속세를 넘나든 경허의 모습에서 불교적 인간상 창출을 고민하자”고 제안했다.

# 경허 스님
경허성우(鏡虛性牛, 1846∼1912)선사는 어머니를 따라 9세 때 경기도 광주(지금의 의왕시) 청계사에서 출가해 계허 스님의 제자가 됐다. 14세에 절에 와있던 선비에게 사서삼경을 배우고 기초적인 불교교리를 익혔다. 이후 동학사의 만화 강백에게 천거돼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마치고 유교와 노장 사상까지 섭렵하고 23세에 동학사 강사가 됐다. 유서(儒書)와 노장(老莊)등의 사상을 고루 섭렵하였다.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서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문자공부가 죽음의 두려움을 조금도 없애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영운 선사의 “나귀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들고 정진하던 중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라는 질문에서 모든 이치를 깨달은 경허는 이후 천장암에서 1년간 보림하며 활연대오한 경지에 올라 생사에 자재했다. 56세에 만공에게 법을 전하고 서당 훈장으로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생활로 말년을 보내다, 1912년 4월 25일 함경도 갑산에서 세수 64세, 법랍 56세로 입적했다.

# 만공 스님
만공월면(滿空 月面,1871∼1946)선사는 근대 한국 선의 중흥조인 경허의 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선풍을 진작시킨 위대한 선지식이다. 13세 되던 해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보고 크게 감동한 것을 계기로 공주 동학사로 출가했다. 경허 스님을 따라 서산 천장사로 와서 태허 스님을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사미십계를 받았다.
경허 스님의 법을 이은 스님은 덕숭산에 금선대를 짓고 수 년간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들을 제접했다. 수덕사ㆍ정혜사ㆍ견성암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다.
만공 스님은 일본 강점기에 선학원의 설립과 승가의 재정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운동의 주역이었다.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해 조선총독 미나미에게 직접 일본의 한국 불교정책을 힐책한 일화는 유명하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 전월사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입적하니, 1946년 10월 20일 그의 나이 75세, 법랍 62세였다.
덕숭 문중 법맥을 형성해 많은 후학을 배출한 그의 문하에는 비구 보월ㆍ용음ㆍ고봉ㆍ금봉ㆍ서경ㆍ혜암ㆍ전강ㆍ금오ㆍ춘성ㆍ벽초ㆍ원담 등과 비구니 법희ㆍ만성ㆍ일엽 등 당대의 선지식들이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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