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좌의 속성은 변씨(邊氏)이며, 휘(諱)는 균여(均如)이다. 아버지는 환성인데, 뜻을 고상하게 가져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점명(占命)인데, 일찍이 천우 14년(917) 4월 7일 밤에 꿈속에서 자웅 한 쌍의 봉황을 보았는데, 모두 누런색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와 모두 자기의 품속으로 들어왔다. 천우 20년에 이르러 점명의 나이 이미 60이었는데 아기를 배었다. 그리하여 21순(旬)만인 그 해 8월 8일에 황주(黃州) 북쪽의 형악(荊岳) 남쪽 기슭에 있는 자택에서 스님을 낳았다.”
진사 혁련정(赫連挺)이 1074년 가을에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완성한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의 강탄영험분(降誕靈驗分)의 첫머리이다. 흔히 보이는 영웅, 성인의 전기와 다를 바 없는 영험스러운 일들이 균여의 탄생을 즈음해서도 일어났음을 서술하고 있는 어찌 보면 평범한 서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이어지는 구절로 어려서부터 재기가 뛰어났느니 하는 문장을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은 전혀 반대의 것이다.
처음 탄생했을 때 용모가 비길 데 없이 추하여서 부모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길거리에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마리의 까마귀가 버려진 아이의 몸을 날개로 덮어 보호하므로 아버지는 후회하고 어머니는 한스럽게 여겨서 다시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그렇지만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서 당당히 내어놓고 자랑하며 기른 것은 아니고 사람들이 쉽사리 볼 수 없도록 상자 속에 넣어두고 길렀다고 하니 그 용모의 괴이함이 지나쳤던 것으로 보인다.
까마귀가 날개로 보호하여 아이를 다시 데려다 길렀다거나, 한 쌍의 봉황이 품에 들어오는 태몽 역시 스님이 어렸을 때 용모로 인해 고생했던 사실을 후인들이 오히려 미화시킨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이다. 더욱이 21순(旬)만에 태어났다 했으니 흔히 말하는 칠삭둥이로 신체 역시 강건하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스님의 용모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기에 전한다. 국사가 된 후에 향찰로 보현십종원왕가를 지었는데, 최행귀가 이를 한시로 번역하였다. 그것을 중국 사람이 다투어 베껴서 전하였고 소문이 황제에게까지 들어갔다. 황제의 신하들이 이 노래를 지은 이는 부처가 세상에 나온 것이라고 주청하여 사신을 보내어 스님에게 공경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사신을 맞은 고려 조정에서는 사신이 스님의 용모를 보고 깔볼 것을 염려하여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스님 또한 그 사정을 알아채고는 통역관을 보내어 직접 뵙기를 청하는 사신을 만나지 않고 몸을 감추어버렸다. 이 역시 스님의 용모가 평범하지 않음을 넘어서 괴이하기까지 했음을 알려 준다.
왜 뜬금없이 스님 이야기를 하면서 전연 상관없는 외모 이야기만 풀어놓는지 의아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 특히 성형까지 쉽사리 해대는 요즘 시대의 못생긴 사람들은 오히려 외모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에 대해 쉽게 이해해 줄지도 모르겠다. 성형이니 뭐니 해서 그만큼 외모를 강요받는 세상이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천형도 그런 천형이 없었을 것이다.
갓 태어났을 때는 부모마저 외면하여 버려졌으며, 승과에서 스님의 뜻으로 정통을 삼고 왕의 존경을 받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 용모의 괴이함 때문에 중국에서 이역만리 찾아온 사신마저 만나지 않았을 정도이니 용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출가 후에 의순 화상을 쫓아 영통사(靈通寺)로 옮긴 후로 화엄의 교의를 상세히 연구하여 저술을 지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광종이 새롭게 창건한 귀법사(歸法寺)로 옮겨가기까지 무려 26년간을 영통사에서만 주석했을 뿐 거처를 옮긴 일이 없었다 하니 이 역시 용모 콤플렉스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더하게 한다. 하지만 그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오히려 균여 스님을 크나큰 서원과 원력의 실천자로, 민중의 구원자로 만들어놓았던 것은 아닐까?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균여 스님은 해동 화엄의 초조였던 의상의 사상을 정통으로 계승하였으며, 의상계의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원효와 법장의 화엄사상을 융회시킨 대학장(大學匠)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대학장으로서의 균여라는 명성 뒤로 가려진 보살의 진면목을 쉽게 놓쳐버리곤 한다. 왜 다른 승려들처럼 진서(眞書)인 한문으로 저술을 집필하지 않고 향찰로 글을 썼을까? 왜 멋들어진 한시 창작 실력을 드러내 자랑하지 않고 당대의 명인들은 잘 알아주지도 않았을 향찰로 보현보살의 십종원행을 주제로 하는 원왕가(願王歌)를 지어 시중에 퍼뜨렸을까?
아마도 균여의 심중에는 어렸을 때부터 외모로 인해 소외받았던 기억이 뚜렷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소외받았던 모진 기억이 소외받는 이들을 외면하지 못하게 아니 더 극진하게 마음을 쓰도록 이끌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건대 아기 때 버려지기까지 했던 균여, 괴이하게 생긴 용모로 인해 소외받았을 균여, 그 균여에게 삶의 지향점이 되어주었던 것이 바로 보현보살의 원행이 아니었을까.
화엄원교의 학장이라면 보현보살의 행원을 중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원(願) 중의 으뜸이라 하여 원왕(願王)으로까지 불리는 보현보살의 행원을 접한 균여에게 그것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일체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늘 따라 배우고(常隨佛學願), 일체 중생을 남김없이 수순하여 이익되게 하며(恒順衆生願), 일체 공적을 모두 중생들에게 회향하고자 하는(普皆廻向願) 보살의 무량한 서원을 접했을 때 균여에게도 또 다른 세상이 열렸을 것이다.
해서 고려의 몽매한 서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고려의 말로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들어 널리 알린 것은 원왕(願王)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나누고자 했던 균여의 서원이 글 속에 노래 속에 진정으로 깃들었음에 틀림없다. “통속적인 말을 따르지 않고서는 크고 넓은 인연을 나타낼 길이 없어 11수의 거친 노래를 짓는다. 이는 여러 사람의 눈에는 지극히 부끄럽지만 여러 부처님의 마음에는 부합될 것이다. …… 글을 맞추고 글귀를 지어서 범속(凡俗)의 선근(善根)을 낳기 바란다.” 그런 진정이 담겼기에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전해지고 하다못해 담과 벽에까지 쓰여질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 부처님
지나간 세상을 닦으려 하신
난행(難行)과 고행(苦行)의 원(願)을
나는 돈연히 좇으리.
몸이 부서져 티끌이 되어 가매
목숨을 버릴 사이에도
그렇게 함을 보이리.
모든 부처님도 그러한 분일지니
아아, 불도(佛道)를 향한 마음이
다른 길 아니 비껴갈지어다.

균여 스님이 지은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王歌) 가운데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노래’(常隨佛學歌)의 한 수이다. 몸이 부서져 티끌이 될지라도, 목숨을 버릴 지경에 처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 찰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염원이 절로 드러난다. 균여의 한 낱의 중생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백년 뒤의 진사 혁련정에게도 전해졌던 것일까. 혁련정은 스님의 시적(示寂)을 상세히 전하기보다는 입적할 즈음(973년)에 벌어졌던 김해부사의 상주문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올해 모일에 어떤 이승한 승려가 종려나무 갓을 쓰고 바닷가에 왔는데, 이름과 거처를 물었더니 스스로 비바시(과거칠불 중의 첫 번째 부처님)라고 하면서 ‘일찍이 나는 500겁 전에 이 나라를 지나다 인연을 맺었는데, 지금 삼한이 일통되었음에도 불교가 흥하지 않았다. 때문에 전세의 인연을 갚고자 잠시 송악산 밑에 와서 여자(如字, 균여)로서 불법을 널리 펴고, 지금 일본으로 가려 한다.’고 말하고는 곧 숨어버렸습니다.”
균여의 입적을 놓고 단순히 입적이 아니라 중생이 다할 때까지 수순함을 멈추지 않는 보살의 변역생사(變易生死)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생전에 보살의 원행을 잠시도 놓지 않았던 삶의 종적이 시적(示寂) 역시 또 다른 원행을 위한 보살의 변역생사일 뿐이라는 후인의 바람으로 나타난 것이다.
석길암(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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