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불교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가 있다. 각각의 종교는 문화와 역사가 다른 환경에서 발생했고, 종교마다 추구하는 목표와 방식도 다르다. 따라서 모든 종교를 통틀어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종교의 정의란 없다. 다만 각기의 종교마다 자신의 입장에서 정의하는 종교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불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생사문제를 다룬다. 생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의 문제요, 회피할 방법도 없고, 피할 수 있는 곳도 없는 절체절명의 문제이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근원적이며 궁극적인 이 문제에 대한 해답과 그에 따른 지혜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치는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다시 말해 불교는 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몸소 해결하고 니르바나(涅槃)의 평화롭고 걸림 없는 삶을 사신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불자는 부처님이 누렸던 그 니르바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체험하고자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다. 따라서 모든 불자들에게 최상의 목표는 니르바나의 체험이다. 어떤 식으로 말하더라도 그것이 불교인 한 니르바나의 체험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교의 핵심을 빗겨 선 방편적 불교일 뿐 바른 불교일 수가 없다. 불교공부는 궁극적으로 니르바나의 체험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거기에는 바른 믿음과 투철한 원력이 요구된다.
어찌하여 바른 믿음인가?
믿음에는 미신(迷信)이 있고, 정신(正信)이 있으며, 맹신(盲信)이나 광신(狂信)도 있으며, 신앙(信仰)이 있는가 하면 신해(信解)가 있다. 불교의 바른 믿음은 신해(信解)이다. 이 믿음을 원효 스님은 “확실히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라 했다. 확실히 그렇다고 말하자면 먼저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납득도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는 것은 신앙일 뿐 신해가 아니다.
신앙은 계시종교의 믿음으로, 거기에는 이해하고 납득하려는 인간이성이 개입할 여지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무조건 받아들이고 오로지 복종하는 것만이 있을 뿐 인간의 이성으로 의심하고 따져보는 일 따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의심이나 확인은 신에 대한 모독이요 도전이라 보기 때문에 징벌의 사유가 될 뿐이다.
그러나 불교의 믿음은 계시종교의 신앙과는 전혀 다르다. 불교에서는 전혀 의심조차 해보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맹목적인 자세를 어리석음이라 하며, 우리의 밝고 순수한 본래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삼독(三毒) 가운데 하나요, 악의 뿌리라고 본다. 조금도 의심해 보지 않고 무조건 믿는 것은 맹신일 뿐 깨달음의 길도 아니고 니르바나로 인도하지도 않는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니르바나는 신해를 통해 증득되는 것이지 신앙이나 맹신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경전에 신해수지(信解受持)나 문법신해증보리(聞法信解證菩提)를 강조하고, 신해품(信解品)은 있어도 신앙품(信仰品)이란 말 자체가 없다는 것을 보아도 불교는 신해의 종교임이 분명해진다.
나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나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이려하지 말고 면밀히 검토해 보고나서 옳다고 생각되거든 받아들이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유행경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다섯 가지 보배 가운데 하나로 부처님의 설법을 신해(信解)하는 사람을 들었고, 대반열반경에서는 신심은 있으나 지혜가 없으면 이 사람은 무명(無明)이 증장하고, 지혜는 있으나 신심이 없으면 이 사람은 사견(邪見)만 증장한다고 했다. 대소승경전이 모두 신해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의 믿음은 의심할 것은 의심해보고 더 이상 의심스러운 것이 없어서 확실히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인식(認識)이다. 조금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이 행동에 옮길 수 있으므로 바른 인식으로써 바른 믿음은 그대로 실천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신행이다. 의심스러운 점들을 충분히 의심해 보고 난 믿음이므로 불교에는 맹신이 있을 수 없고 광신도 있을 수 없다. 무명으로 전락하지도 않고, 사견으로 치닫지도 않는 바른 믿음이기에 믿음은 바른 인식이어야 하고, 믿음은 신념에 가득 찬 행동을 이끌어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신행정진(信行精進)이요 여법신행(如法信行)이다.
그런데 이따금 불교의 믿음을 신앙으로 오해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이는 불교에 대한 이해부족이거나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사전들이 하나같이 신학적 입장에서 종교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불교이어야지 불교의 신학화(神學化)는 있을 수 없다. 불교의 신학화야말로 불교왜곡의 극치요, 오늘 이 땅의 불교가 극복해야 할 위기이기도 하다.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임을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면 나도 깨달음을 얻고 니르바나를 체험할 수 있음을 확신하며,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부처님처럼 무량한 공덕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불교의 바른 믿음이다. 불교의 바른 믿음은 결국 자신에 대한 신뢰이지 나 밖의 어떤 대상을 절대화하고 의탁하거나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질 때 불법에 바르게 들어갈 수 있게 되고, 온갖 공덕을 낳게 되며, 온갖 번뇌 망상을 벗어나 더 이상 위없는 도에 이르기 때문에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모체라 말한 것이다.
굳건한 원력이란 어떤 것인가?
원(願)이란 말의 범어는 ‘쁘라니다나’인데, 여기에는 목표를 향해 온 정신을 쏟는 집중력으로 마치 대지가 새싹을 밀어내고, 나뭇가지가 새잎을 밀어내는 것과 같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을 주체적으로 실현시켜 나아가는 굳은 의지인 이 힘은 불자에게 있어서 가능성을 구체화시키고, 이상을 현실화하는 내적 원동력이다.
이 힘은 깨달음을 얻어 니르바나를 체험하는 날까지 중단되지 않고 끊임없이 분출되어야 하므로 비장한 각오이기에 비원(悲願)이며, 자칫 나태해지거나 물러서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을 향해 스스로 채찍을 가하게 되므로 서원(誓願)이다. 불자가 세우는 원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단계를 뛰어넘어 이웃과 사회 나아가 모든 생명을 품안에 안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바다처럼 깊고 넓다고 하여 대원해(大願海)라 한다.
<덕광태자경>에 “말로만 원을 세운다고 보살이 되지 않는다”고 했고, 천태대사는 “보살의 길은 원행상부(願行相扶)”라고 했다. 원은 행동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고 행동은 원을 떠받드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실천되지 않는 원은 몽상에 지나지 않으니 결국 허망할 뿐이요, 원이 없는 실천은 자칫 방황이기 쉬우니 갈등을 불러온다. 비유하면 망망한 대해를 건너려는 뱃사공에게 나침반이 원이라면 실천은 피안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노를 젓는 행동이라 하겠다.
그가 얼마나 성숙한 불자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그의 원력이 얼마나 사회적이며, 자신이 세운 원력을 성취하기 위하여 지금 얼마나 노력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사실 불자의 원이 아름다울 수 있고, 불자의 삶이 돋보일 수 있는 길은 비록 어렵고 힘들더라도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원을 넘어서 사회와 온 생명을 나의 따뜻한 가슴으로 안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에 있다.
불자가 언제나 깨어있는 마음으로 향상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믿음이 바르게 정립되고, 원력이 굳게 서 있어야 한다. 불자에게 믿음은 밝은 이성이 전제된 인식이고, 원력은 실천이 전제되어 있는 밝은 꿈이요 희망이다. 이성이 병든 믿음은 맹목이 되어 미신이나 맹신 나아가 광신을 초래할 뿐이고, 실천의지가 전혀 없는 꿈은 망상일 뿐이다.
불교는 믿음만의 종교가 아니다. 또한 깨달음이 없는 불교는 불교학에 지나지 않는다. 니르바나를 체험하지 못하고 이론만 탐구하는 불교학은 생명력이 없는 지식의 축척일 뿐이다. 생사를 이론적으로 잘 안다고 그가 생사의 굴레를 벗어난 것이 아니며, 심리현상을 이론적으로 잘 분석하고 이해했다고 번뇌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삶은 지금, 여기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생명의 약동이며, 온갖 희로애락이 함께 어우러져 흘러가는 세찬 물결과도 같다. 무엇이라고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는 이 역동적인 생의 실상을 깊이 통찰하고 매순간 맞부딪치는 현실을 직시하며, 그 무엇에 얽매이거나 주눅이 들지 않고 자신의 삶을 관조하며 유유자적하게 이끌어 줄 수 있는 지혜의 길이 바로 불교요, 이 불교를 제대로 알기 위해 바른 믿음과 원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성열 스님(강남포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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