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석(七夕)과 백종(百種)

590호 길을 묻는 이에게

92년 8월 16일
칠석(七夕)과 백종(百種)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를 한 것이 아주 오래 된 것 같습니다. 허허허. 여러분이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우리가 칠석(七夕)하고 백종(百種)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면서 칠석을 지내셨는지 궁금하군요. 칠석은 산 사람들을 위해서 지낸다고 합니다. 또 백종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지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산 사람, 죽은 사람 이렇게 나누는 게 아닙니다. 칠석이다 하면 칠(七)은 우리 몸 자체와 마음 자체를 말하고, 석(夕)은 그 마음이 깊은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밝힌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내가 형성된 날이나 죽는 날이라고 해도 되고, 아침저녁이라고 해도 됩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불을 켤 때나 끌 때나, 이런 것이 바로 과거도 현재고 미래도 현재이듯, 즉 말하자면 아침에 불 켜는 그 마음이나 저녁에 불을 끄는 마음이나 같이 엮어서 마음을 밝히라는 뜻입니다.
아침도 현재 내 마음 속에, 저녁도 현재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 내가 항상 이런 말을 하죠.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쳐져야 불이 들어온다고요. 그래서 이 아침이나 저녁이나 없는 마음, 그 마음에서 발견해서 밝히면 칠석(七夕)이 칠성(七星)이 된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그 도리를 모르면 칠석이고 그 도리를 알면 칠성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칠석날은 내 마음을 모아서 과거 미래를 한데 합쳐서 내 마음에 깨달음을 밝게 가져오는, 즉 광력을 자재로이 쓸 수 있는 그런 중용을 말합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 한해서는 이런 얘기가 있더군요. 견우와 직녀도 그렇게 만나지 못해서 애를 쓴다고요. 일 년에 한 번씩 만난다고 그랬죠. 안 그렇습니까? 대답을 좀 크게 해주셔야죠. 허허허.
대중: 예.
큰스님: 그런데 우리가 일년에 한 번이라 하는 것도, 여기서 생각할 때는 일년이지만 그 별성에서 생각할 때는 일 초, 하루를 뜻합니다. 즉 말하자면 여기에서 그 수명이 일년이면 거기서는 하루라고 볼 수 있겠죠, 비유를 한다면. 아무튼 여기서 지어놓은 것입니다. 지어놔도 해당이 되게 지어놓은 것입니다. 아무리 표현이다, 방편이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일년, 하루 이것을 비유하자면 우리가 여기에서 하룻동안, 24시간 동안에 한 번 만나는 것도 마음과 마음이 서로 동해야만이 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말입니다.
그러면 일체 사생(四生) 모두가, 천차만별로 돼 있는 모든 만물만생이 다 견우 직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있으면 인간이 있듯이 모두가 이렇게 인연이 돼야 생산이 된다는 뜻입니다. 납득이 안 가십니까? 이 모두가 인연이 없으면 생산이 되지 않습니다. 발전도 될 수가 없고요. 창조도 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깨달으면 칠성이 된다. 칠성 부처님이 된다. 칠성 부처님이 명을 또는 생산을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 소임을 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이라야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칠석(七夕)날은 칠성(七星)이 되기를 원하면서 내 마음을 다스리면서 밝힌다, 이런 겁니다. 내 마음을 밝히지 않는다면 백종에 건질 수가 없어요. 왜 목련존자를 비유해놨을까? 목련존자가 그 깨달음을 가지고도 열반의 구경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는 지옥문을 열지를 못해서 어머니를 건지지 못했어. 그래서 다시 가서 부처님한테 구해서 다시 정진하라고 그래서 다시 정진해서 지옥문이 스스로 열렸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조상님들의 문도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칠석이다 하는 날은 항상 나한테 숨어있는 그 마음, 깊숙하게 들어있는 그 마음을 발견해서 불을 켜라, 밝혀라 이런 뜻입니다. 내가 깨달아야만, 칠석에 깨달아서 칠성이 돼서 그 마음의 불을 밝힌다는 뜻이죠.
백종은 아침과 저녁 이것이 한데 모아진 한마음입니다. 한마음이기 때문에 생각이 없는 중생이나 생각이 있는 중생이나, 산 중생이나 죽은 중생이나 할 것 없이 일체 만물만생의 모든 영령들을 건질 수가 있는 문이 열린다, 이런 뜻입니다. 문이 열리는 것도 깨달음에 의해서 문이 열려야 건질 수가 있지, 깨달음에 의해서 문이 열리지 못하면 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북하면 백종입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백종을 그냥 돈이나 갖다놓고 영령들을 어떻게 해달라고 그러면 되는 줄 알지 마십시오. 스님네들의 힘을 빌려서 한다 하면은 스님네들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그 상대방에서도 내 마음을 알아야 한마음이 돼서 건져지지 그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둘로 보고 그렇게 보니까 이 봉투에다 돈이나 넣어서 이름이나 써서 갖다 놓으면 영가가 천도된다, 이런 생각은 아예 마시고.
항상 그렇게 얘기하죠. 예를 들어서 내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과 내 육의 조상들과 둘이 아니라고,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조건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자비라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마음과 내 부모들의 조상 마음과 둘이 아닌 까닭에 항상 내 한마음에 모든 거를 맡겨놓고 마음을 내는 것이 그게 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조상들의 마음도 내 한마음으로 하나가 돼서 모든 게 탄생이 되든지, 승천을 하든지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 마음 자체를 깨달아야만 된다.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항상 마음이 흩어지지 말고 항상 부모와 일체제불과 모든 일체 중생이 다 한마음 속에 있다, 한마음 속에서만이 빚어진다, 들이고 내는 모든 것이 전체 한마음에서 들이고 내진다, 이런 거를 강조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칠석에도 그 마음을 내 한마음으로 하나 되게 넣는다면 둘로 봐지지도 않고, 그렇게 한다면 바로 부모들이 자기가 되는 겁니다. 자기 속의 자기 마음을 훤히 다 알기 때문에, 부처님도 같이 이렇게 있기 때문에 거기서 툭 터져서, 삽시간에 물리가 터져서 승천을 하시는 겁니다. 칠석이 그런 마음의 도리지, 물질을 아무리 많이 갖다가 산더미같이 쌓아놓는다 하더라도 마음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하고 그렇게 공한 도리를 모른다면 아예 불도 밝게 일어날 수가 없거니와 조상들도 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여러분이 잘 아셔서 하도록 하시고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나가는 데도 아까 견우와 직녀 얘기 했는데 그게 납득이 됐습니까? 하하하. 여러분이 다 견우와 직녀라고요. 딴데, 먼데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견우와 직녀고, 견우와 직녀는 그렇게 울고 그렇게 사연이 많다지만 그 만남도 즐겁게 만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즐겁지 못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고, 허허허. 그건 그렇게 해두고요. 그러기 때문에 그 견우와 직녀 속에서,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 공부하는 겁니다. 견우와 직녀 속에서도 벗어나게. 모두가 나 아님이 없고, 내 자리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이 그냥 훌렁 벗어나게끔 지금 공부하는 겁니다. 그래서 칠석도 아침저녁이 한데 모아져서 공해버렸다. 공했으면 그 공한 도리를 알 때는 그냥 무(無)다. 무조차도 무다. 이렇게 됩니다. 그 도리를 알았을 때는 바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상시 살아나가는 데도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산 것대로 입력이 돼서 현실에 저절로 나옵니다. 스스로 나오는 것을 어떻게 커버할 수 있고 어떻게 타파할 수 있을까, 이런 건데 우리가 지은 거라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콩이 팥이 될 수가 없고 팥이 콩이 될 수가 없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흑인이 흑인 아이를 낳아서 데리고 가는데, 까만 초콜릿을 입에 물려가지고 가는데 너무도 기가 막히더라고요. 흑인은 백인을 낳을 수가 없어. 그러듯이 우리가 지금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나가는 거 하나하나 자기가 살아나가는 대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그냥 그대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게 마련이거든요. 이거는 지금 현재 세상에서 잘못한 것이면 좀 감춰서라도 끌려가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이건 감추고 자시고 할 사이가 없는 겁니다. 자기가 아는 것을 우주 법계에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당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곧 이 자리에 있다 하는 것인데 한마디 더 하자면 독사같이 살면 독사의 무명을 쓰고 나오죠. 지옥이다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여러분이 사람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나갈 때의 생각과, 말이나 소나 됐을 때에, 속으로는 사람으로 살던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거죽으로는 말의 모습을 가졌을 때, 소의 모습을 가졌을 때, 개구리의 모습을 가졌을 때, 독사의 모습을 가졌을 때, 벌레의 모습을 가졌을 때, 가지각색의 모습을 가졌을 때에 그 답답함이란 어떻습니까? 달리 지옥이 아닙니다. 죽고 나서 영가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탄생을 하기도 한다 이겁니다. 자기가 지은 대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된다 이겁니다. 이런 말 하는 거를 무시하지 마세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영령들의 의식은 첫째, 살아서 의식을 가졌을 때에 ‘나’가 항상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나라고 했기 때문에 죽었어도 항상 나라는 게 있는 걸로 알고 돌아다닙니다. 돌아다니는 데는 자기 몸속의 의식들이 전부, 이 수십억 마리가 그냥 깔려있으니 한 발자국을 떼어놓을 수가 없다 이거야, 악업 선업의 그 업식이 따라다니기 때문에. 그리고 둘째는, 내가 있다는 것 때문에 강을 사이에 놓고 건너가지 못해, 빠져 죽을까봐. 그러니까 물가를 뺑뺑 돌면서 오백년을 돌아도 배가 오질 않아. 그래서 이 공부를 하라는 겁니다. 세 번째는, 불바퀴를 넘어서야 될 텐데 뜨거워서 타 죽을까봐 못 들어가는 거야. 그 또한 ‘나’라는 걸 놓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겁니다. 하나만 알면 나라는 게 공해버려서 무조건,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모든 걸 팽개치게 될 텐데, 그거를 놓지 못해서 항상 그 업식에 밟혀서 못 나오고, 자기 의식대로 물에 빠져죽을까봐 못 나오고, 불에 타죽을까봐 못 가고 이래서 자기의 갈 길을, 궤도를 넘지 못한다 이런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어서 그렇게 넘기보다는 살아서 깨달아야 그게 열반입니다. 살아서 깨달음이 열반이지 죽어서 혼백이 가는 것이 열반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열반이란 말도 할 것도 없죠. 살아서 깨닫지 못한 사람이 죽어서 어떻게 깨닫습니까? 죽으면 살았을 때 그 업식이 그대로인데…. 그래서 살아생전에 이 도리를 알아야 우리가 발자취를 걸머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하나 놓고 하나 떼어놓고, 또 하나 놓고 또 하나 떼어놓고, 하나 놓고 하나 놓고, 이렇게 걸음을 걷지 않습니까? 일체 만법이 다 우리가 걸음 걷듯이 그렇게 놓고 돌아가는 겁니다, 지금. 항상 얘기해드리죠, 그렇게 놓고 간다고. 자연스럽게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자연스럽게 남편 노릇을 하고, 자연스럽게 형님 노릇을 하고, 아들 노릇을 하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돌아간다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돌아가니 어떤 노릇을 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없는 게 공한 도리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말로 할 땐 실감이 안 납니다. 자기가 진짜로 지옥고에 들어서봐야 정말이지 이거는 이렇게 할 게 아니로구나 하는 거를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열 아들을 두었는데 이리로 가라면 저리로 가고 얼마나 청개구리짓을 하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하기를 “나 죽으면 산에다 묻어다오.” 그랬거든요. 그러면 물가로 갈 줄 알고. 그랬더니 돌아가시니까 아이, 살아생전에 영 말을 안 들었으니까 죽어서나 말을 듣겠다고 아, 산으로 올라가지 뭡니까? 그런데 막내 아들한테는 “나를 죽으면 물에다 넣어다오. 관을 물에다 넣어다오.” 그랬죠. 그러다가 그렇게 산으로 올라가려고 그러니깐 막내 아들이 밤중에 몰래 지게를 대어놓고는 관을 져다가 강물에 갖다 넣는데 그냥 쩍 벌어지면서 그냥 들어가거든요.
그렇게 하고나서 큰 아들 죽고 작은 아들 죽고, 뭐 셋째 아들, 넷째 아들 모조리 죽고 막내 아들만 남았는데, 아버지는 죽어서 저승 천자가 되시고요, 아들들은 죽어서 소가 됐어요. 소가 되어서 전부 외양간에 매여 있는데 막내 아들이 꿈을 꾸니까 환경이 그렇게 돼 있더란 말입니다. 꿈을 꾸니깐 “음매” 하면서 눈물을 줄줄줄 흘리고 그러니깐 아버지가 있다 하는 소리가 ‘저것은 너의 큰 형이다, 저것은 너의 작은 형이다. 그렇게 말을 안 듣고 남을 해꼬지를 하고 그랬으니, 소가 돼서 남의 일을 봐줘야 되고 언짢은 일 한 거를 다 저걸로 갚아야 하느니라.’ 하더랍니다. 그런데 소 무명을 쓰고 나왔으니 자기는 “음매, 음매” 아무리 말을 해도 사람이 못 알아듣죠.
실지로 자기가 당해보지 않으면 실감이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이 돼요. 그러니까 허술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저 한 철 날 동안에 열심히 내 탓으로 돌리고 남을 원망치 말고,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부드럽게 말해주고 부드러운 행동으로써 모든 일을 내 탓으로만 돌린다면, 남의 원망 같은 것은 하지 않고 그게 바로 내 마음 발견하는 데 지름길입니다. 모든 것 내 탓으로 돌리고 그 한 구멍에, 두 구멍도 아닙니다. 구멍 없는 구멍에다가 모든 것을 놓으면 거기서 일체 만법이 나고 일체 만법을 거기다 놓고…. 이런 말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게 일상생활 속에서 전체 살아나가는 게 여러분이 살지 딴사람이 살아주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못 믿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이끌고 다니면서 모든 걸 그렇게 살아나가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길을 걸어가다 엎드러지면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사실을 꼭 아셔야 됩니다. 자기에게 잘못된 일도 자기만이 해결할 수 있는 거지 딴 데서 보태주거나 빼앗아 가거나 그런 게 없습니다.
그리고 재(齋) 지내는 도리 이것을 좀 말씀 드리겠습니다. 옛날에도 얘기했듯이, 저 최씨라는 분이 천도를 시킨다고 절마다 다 다니면서 해도 천도가 안 되더랍니다. 안 되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꿈에 조상들이 나타나서는 보따리를 들고 저길 나가다가 도로 들어오고 도로 들어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는 내게 온 겁니다, 이제. 그래 지내고 싶으면 거기 깔고 앉았던 방석 있죠, 거기다가 놓고 절하고 가라고 그랬죠. 아, 그러니 그 사람으로서는 기가 막힐 거 아닙니까? 그냥 차려놓고 지내도 안 되는데 아니, 방석에 그냥 놓고 ‘저 방석에 하고 가라고’ 이러니 그거 믿겠습니까? 그러나 고개를 꺄우뚱하면서 거기다 놓고 갔습니다, 절을 하고.
그러더니 그 이튿날 오더니만 “아이고, 천도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그냥 그 고마운 사례로 얼마를 갖다가 거기 방석에 또 놓더군요. 그날 저녁에 꿈을 꾸니까 아니, 구름을 타고 선녀들이 내려와서 모시고선 그냥 구름을 타고 다 올라가더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렇게 하고 난 뒤에 그 집이 최씨네 가문이 일어난 겁니다. 가발 공장을 했었죠. 그래서 아주 그게 그냥 담뿍 그때 일어나서 큰 부자가 됐죠.
그랬듯이, 여러분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스님네들이 절에서 보통 이렇게 차려놓으면 스님네들이 얼마만큼 차려놨다는 걸 영령들이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럼 영령들이 들어와서 뭐부터 보느냐 하면 스님네들 마음부터 보거든, 마음부터 읽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스님네들이 상 차려놓은 거하고, 돈 얼마 가져온 거하고, 돈 얼마 놓은 거 그것만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 들어와서 그렇게 알지 뭐, 영명(靈明)하죠.
그러나 이 마음 도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목탁 소리는 우주 법계에까지 들립니다. 그래서 문이 탁 열렸으니깐 상을 안 차려놨어도 그렇고 차려놨어도 그렇죠. 모든 게 내거 아님이 없고 하나도 버릴 게 없는데 아니, 그 영령들이 그 스님네들의 마음에 탁 가서 하나가 됐는데 뭐를 바라겠습니까? 바랄 게 하나도 없죠. 그러니까 그대로 거기 한데 합쳐져도 두드러지지 않고 자동적으로 풀려서 제도가 돼도 줄지 않는다, 이거죠.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재사 지낼 때, 여기서 천도재를 지낼 때 물건을 많이 사다가 상에 온통 쌓아 놓고 지내야만 잘 지내주는 걸로 아니 이 노릇을 어떡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물건을 안 사면, ‘아이, 물건도 안 사는데 뭐 돈 이것만 해도 되고, 안 내도 되지 뭐.’ 이렇게 생각을 한다 이겁니다.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모습을, 아까 얘기했듯이 일차적으로 그렇게 독사의 무명을 타고났거나 또는 어떠한 짐승의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극매고 있는 그런 지옥고를 범했을 때, 이 공부하면서 그것을 면해주기를 바라고 모든 거를 합니다. 사람의 모습만 가지고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산 대로 지은 대로 콩 나고 팥 나듯이, 그렇게 가지각색으로 모습을 쓰고 나오는 것이 지옥고입니다. 오간지옥고니 하는 그 오간지옥이란 것은 땅 속에서 파먹고 땅 속에서 바깥에 나오지도 못하는 것이 오간지옥입니다.
그러니 그 지옥고에서 벗어나려면 단 하나의 그 마음, 즉 영령을 탁 건져서 내 마음과 둘이 아니게 해놓는다면은 금새 제도가 되는 거죠. 인간이 된 거죠. 그렇게 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천도재를 지내고 또 지내고 또 지내게 되는데 어머니의 아버지의 형제의 그 무명을 벗기기 위해서 지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건너가지 못하는 것을 건너가게 하기 위해서 지내는가 하면, 한 발자국도 떼어놓지 못하고 업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건지려고 지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령들의 의식은 체가 없습니다. 체가 없기 때문에 열도 되고 백도 되고 스물도 되고 이럽니다. 돌아가셔서 천도재를 했으면 아이, 제사(祭祀)도 안 지내야지 왜 지내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 된 도리죠. 잘 됐든 못 됐든 자식이 된 도리예요. 묵은 빚 갚아야죠, 은혜를. 자기가 은혜를 못 갚으면 자기 대에서 또 자기 은혜를 갚지 않습니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아주. 그러니 허명무실하게 떠넘기지 마시고, 그러기 때문에 제사 지내는 것도 여기 상을 차리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단 한 가지라도 뜻있게 해서 이 세상의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떡 한 그릇이 되남도록 해라, 이런 겁니다. 물과 초, 향 그거면 족하지 뭐가 더 필요하냐! 모든 빗방울이 바다로 들어간들 빗방울이라고 하겠습니까? 바다의 물이라고 하지. 수만 개의 영령들을 한마음에다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럭하면 더 집안이 깨끗하고 더 청정합니다.
천도를 스님네들한테 청하되 무엇을 많이 차려놓는 걸 바라지 마십시오. 찹쌀가루를 해서 재사 지낼 때 뚱그렇게 그냥 부쳐서 아홉 조각 아니면 일곱 조각, 일곱 조각 아니면 세 조각 이렇게 해서 놓고, 초 향 물 이렇게만 해놓고 지내신다면 그것으로써 족합니다. 환란이 없어져요. 왜냐하면 나물 먹고 떡 먹고, 뭐 이거 먹고 저거 먹고 이렇게 하는 의식들은 벌써 그건 아주 하의 중생들의 얘깁니다. 여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조상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냥 떡, 밥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듭니까? 그 의식을 떠나지 못하게 만듭니까? 그래서 그렇게 해놓고 마음속으로 예배를 올리면 그리고 절 삼정례(三頂禮)를 할 때에, 맨 끄트머리에 모든 것을 한데 모아서 내 한마음 주인공에 모든 걸 맡겨놓고 일어난다면 아주 그것이 극히 좋은 일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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