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축특집]불교의 경쟁력 진단

김대곤 한경아카데미원장
불교에도 경쟁력이 있을까? 아니 불교에소 경쟁력이 필요할까? 기업의 경쟁력 요소를 불교에 대비할 수 있을까? 불교에서 경쟁력 강화라는 말을 써도 괜찮을까? 경쟁이라는 말 속에는 “나는 옳고 너는 그러다” “나는 확대되어야 하고 너는 축소되어야 한다”는 심리적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불교의 경쟁력은 불교이외 타종교에 대한 경쟁이 아니라 나와의 경쟁, 즉 보다 더 발전하려고 하는 불교와 나태해져 가는 불교와의 경쟁 구도로 이해하면 한결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필자는 불교의 경쟁력 강화방안을 기업 경영적 요인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이 역시 자칫하면 성스러운 불교를 상업적인 기업과 견주는 무례한 짓으로 손가락질 받을 것으로 우려된다. 그렇지만 노인도 손자에게 배울게 있다고 하듯이 오늘날 막강한 경쟁력을 발휘하는 기업의 성장요인을 분석하여 불교계에 접목시키는 것도 크게 흉이 되지 않을 것이라 본다.

정부도 과거에는 개인과 기업위에 군림했지만 요즘은 잘나가는 대기업으로부터 배우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그것은 바로 기업경영방식이 효율적이라는 평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기업이 급성장하긴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백년을 넘기기 가 어려운 반면 불교는 수 천 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단기적으로는 기업의 경영방식이 유효한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종교적 방법이 유효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불교가 기업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것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또 자문해보고 싶은 것은 기업경영 요소와 불교의 요소를 대비해도 괜찮을까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우 무리한 대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 기업경영에서 벤치마킹한다는 차원에서 다소 무리가 따르지만 대비를 하고자 한다.
신심 깊은 신도님과 스님들께 정중히 양해를 부탁드리고 싶다.

자 이제 기업식 표현 어휘를 불교식으로 바꾸어 보자.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자인 CEO는 사찰에선 주지스님으로 보면 될 것이다.
기업의 상품은 불교의 교리쯤으로 바꿀 수 있을까.

소비자 ,고객은 예비 신자 혹은 신도로 사규는 계율로 ,법인체는 종단으로 ,영업사원은 포교사로 R&D는 수행 혹은 정진쯤으로 대비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얼마든지 상호 유사한 점끼리 대비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쯤에서 성장기업의 성장요인을 개략적으로 분석하고 불교에서 벤치 마킹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기업성장의 3대 핵심요소-시스템,CEO,고객

조직과 시스템을 만들어야 양적성장에서 질적 성장이 가능하다.
기업이 대량 생산체제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은 산업혁명이 후 증기기관과 같은 기계시스템과 기업의 조직과 제도 시스템 덕분이었다.

가내 수공업시대에는 서로 각자 같은 일을 하면서 단지 열심히 일한 만큼 더 많이 생산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체가 일한 량은 각자가 일한 양을 합친 것 보다 크게 많지 않았다. 시스템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1+1=2가 되는 것이 아니라 1+1=1인듯하지만 그 효과는 3이상이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백 개의 부품으로 만든 자동차나 비행기가 조립을 거치면 1대의 자동차나 비행기 인 것 같지만 단순한 쇳덩어리가 아니라 움직이는 자동차 비행기가 된다.

이보다 인간의 신체야 말로 가장 훌륭한 생명시스템이다. 머리 가슴 팔 다리 그리고 심장과 위 폐등 각각의 장기가 결합하여 하나의 인간신체를 이루고 여기에 정신이 깃들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최고 걸작의 시스템으로 작용한다.

남과 여가 만나 하나의 가정을 만들면 아이가 탄생하고 역사가 이어지듯이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더 큰 힘을 발휘 할 수 있을 때 시스템적(system)이라고 하고 그 힘(energy)을 시너지(synergy)효과라고 한다.

시스템이 되려면 먼저 각각의 부분이 서로 다른 요소이어야 한다. 즉 각자의 역할이 분명히 달라야한다 . 기업에선 구성원 각자가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한다. 기획 생산 마케팅 영업 관리 등등이 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제도와 매뉴얼이나 기업문화가 있다. 기본적인 사규에서 시작하여 제안제도 사원복지제도 핵심인력양성제도 프로젝트 개발계획 등 수많은 제도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이런 제도 시스템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잘못 작동되면 오히려 부작용도 심하다. 시스템이 잘 만들어 진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그 기업은 잘 돌아간다고 볼수 있다.

불교에서도 이런 시스템적인 요소를 확대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물론 불교 안에도 스님들 간 역할이 있고 동안거 하안거 등의 교육 시스템이 있고 49재 등의 제도시스템이 있다.

그런데 문서화되지 않았거나 , 문서화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대충 얼개만 있지 정교하지 않아 해석하는 사람이 임의적으로 적용하여 엉뚱한 결과를 낳는 수가 많다.

스님들도 불교의 교리와 수행법에 관한 것은 기본적으로 하되 요즘같은 분업화되고 다양화한 현대사회에서는 수좌, 행정승, 포교승 등 그 역할을 명확히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포교는 그 대상에 따라 방편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문학, 공예, 음악, 심지어 기술까지 전공을 가지고 포교에 나선다면 훨씬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신도들도 사찰 내에서 각자 해야 할 역할을 구체적으로 부여하고 주지스님 뜻에만 의지하지 말고 제도나 규칙 즉 시스템에 의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주면 훨씬 더 참여의식을 가지게 된다.

기업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조직을 학습조직으로 바꾸고 지식경영을 하는 것이다. 대기업일 수록 사원은 물론 회장 임원들도 끊임 없이 배우고 연구하는 점이다.

불교에서도 기본적인 불교공부뿐만 아니라 교단의 조직을 제대로 이끌어가기 위한 리더십이나 직무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CEO라고 해서 기업경영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시스템적으로 되려면 구성원 각자의 역할이 분명해야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역할이 어떤 일관성과 방향성을 유지 하지 않을 때 그 시스템은 깨어지고 만다. 아무리 훌륭한 마징가제트를 만들어 두어도 그 로봇을 움직일 사람이 없다면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 아무리 인간의 신체 조직이 훌륭한 시스템이라고 하더라도 정신이 없다면 동물이 아니라 식물과 다를 바 없다. 기업이라는 시스템을 미션, 비전,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자가 바로 CEO이다 .CEO는 인간의 육신을 움직이는 정신과 같은 것이다.

교향악단에선 지휘자가 바로 CEO역할이다. 지휘자는 직접 악기를 연주하지 않되 악단의 연주자 각자가 바이올린 하프 피아노 첼로 북 등을 스스로 잘 연주할 수 있게 격려하고 도와준다 .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화음이 맞도록 나아갈 때와 멈출 때를 조절해준다. 그러려면 각각의 악기에 대한 역할과 속성을 이해해야하고 연주해야할 교향곡 전체의 화음을 이해해야 한다. 나무도 알면서 숲을 봐야 한다. 하나를 알면서 전체를 봐야 하고 전체를 보면서도 각자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한다.

기업이 자본주의의 핵심이긴 하지만 돈이 많다고 혹은 기술이 뛰어나다고 혹은 재무관리를 잘한다고 CEO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를 보고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종업원 각자는 단순한 부품이 아니다. 그들도 개인 각자가 하나의 인격시스템이다. 그 들 스스로 움직이는 시스템의 주인이다. 그러니 더욱 어렵다 . 인사(人事)는 사람에 관한 일(事)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事)이다.

CEO는 사람을 아는 사람이고 사람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크게 성공할 수 있다. 사람은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니 마음이 육신을 움직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마음이 중요하다 .

불교란 무엇인가 사람을 아는 것이고 특히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다스리는데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불교를 공부하면 될 것이다.

불교에서 기업의 CEO에 해당하는 분이 바로 주지스님이다. 주지스님은 불교의 기본인 불교의 교리나 수행법만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사찰을 어떤 모습으로 키울 것인지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 하는 것이 아니라 사부대중의 의견을 청취하고 역할을 나누어 주어야 모두들 참여의식이 높아진다. 특히 CEO가 유의할 것은 공과 사를 구별하는 일이다. 주머니돈과 회사돈을 구별하는 것은 기업회계의 기본이듯이 사찰에서도 투명경영을 한다면 더 많은 보시가 이루어 질 것이다. 주지스님은 사찰 내에 있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하는 스님들의 고초를 알고 그들을 뒷바라지 해줄 수 있고 때로는 관세음보살과 같은 존재이다.

마에스트로(지휘자)가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연주자들의 소리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화시키고 현실화시키는 대역사를 이루어내시는 대장부이시다. 그런데 스스로 훌륭한 명연주 명 지휘를 한다고 생각해도 무대 밖의 방청석에 있는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고 있거나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졸고 있다면 그 음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업은 고객을 왕으로 모실 줄 안다.

기업에서 아무리 훌륭한 물품을 만들어도 소비자가 외면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기술을 개발하고 그 기술로 성능이 뛰어난 제품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시장에서 냉대 받거나, 설사 소비자가 매우 훌륭한 상품이라고 공감은 해주지만 사고 싶어도 너무 비싸서 아무도 살 수 없다면 그 상품은 시장에서 반송되어 기업의 창고 속으로 묻히게 된다. 창고에 상품이 쌓이면 팔아서 수익이 나기는 커녕 창고비가 발생해 수익을 잠식할 뿐만 아니라 만약 은행으로부터 대부를 받았다면 지급이자까지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기업은 항상 고객을 염두에 둔다. 고객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객이 왜 싫어하는지 끝없이 고객의 소리를 경청하려고 한다. 적극적으로 하는 방법이 마켓리서치이다.

옛날 기업이 적고 생산품이 적든 시절에는 기업이 알아서 만들면 됐지만 이제는 소비자의 마음을 헤아려 그들로부터 사랑받는 법을 통해 접근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소비자의 콧대가 너무 높아져 오만하기까지 하다. 소비자는 왕이고. 기업은 신하이다. 왕에게 잘 보이는 것이 능사라고 생각하기 쉽다. 왕은 성군도 있지만 폭군도 있고 부족한 임금도 있다. 왕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빨간색이 좋다고 해서 만들어 갔더니 아니란다. “그 때는 빨간 색을 좋아했는데 이제 생각하니 연두색이 좋다.”고 한다.

변덕이 죽끓 듯하다. 철없는 아이와 같은 존재가 소비자이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제대로 육아법을 알아 잘 키우면 때론 부모와 자식 간에 언쟁도 있지만 성장하여 효도로 보답하듯이 소비자는 기업에게 수익이라는 보상을 준다.

바로 이것이 기업의 경쟁력과 성장력의 원천이다. 기업과 소비자는 서로 상생의 길을 가고 있으며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이렇게 하려는 것이 마케팅적 사고방식이라고 한다.

간혹 기업에서도 마케팅을 잘못 해석하는 수가 있다. 소비자 지향적이라고 해서 소비자에게 아부하라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의 마음을 읽고 소비자의 미래를 걱정하며 진정한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신도 안 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불교에서 소비자는 예비신자로 한 두 번 절에 오는 신도는 충성도 높은 고객으로 볼 수있다. 번창하는 사찰은 그렇지 않지만 잘 안 되는 사찰에 가보면 “너 왔냐?, 너 가느냐”고 고개도 돌려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가실 정도로 어떻게 오셨습니까?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하고 수다를 떨 필요는 없다. 기업에서도 요즘은 과잉 서비스가 역효과를 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객을 잘 모시기 위해 기업에서 영업을 강화하듯이 불교에서도 포교사의 역할 을 강화해야한다. 포교사는 스님이 될 수도 있고 자질 있는 신도들 중에서 선발하여 부촉할 수도 있다. 고객심리를 알면 마케팅의 절반은 해결 되는 셈인데 불교는 명색이 심리학의 최고봉이 아닌가.

절에서 최고 어른은 당연히 스님이지만 그러나 고객인 신도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면 신도들의 절에 가는 발길이 차차 줄어들 것이다. 절에 젊은 사람이 적은 이유가 무엇일까 노인은 공경 받는데 청소년 젊은이는 하대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좋은 불교를 젊은이들은 모른다고 한탄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 들이 왜 오기 싫어하는지를 살펴야 하지 않을까 . 내 것을 팔기만 하겠다고 하는 기업이 문을 닫듯이 내 것이 옳다고만 강조하지 말고 신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제도와 시스템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불교는 기업에게 지속가능경영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최근 기업경영의 화두는 지속가능 경영이다. 기업이 개인보다 급성장하긴 하는데 단명하다는 게 문제이다. 30년을 넘기기가 어렵고 100년 된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불교는 2천년을 넘기고 있다. 그 비법은 무엇일까? 경영학계에선 혁신을 부르짖기도 하고 환경경영 투명경영 윤리경영 등을 말하기도 한다. 모두가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다고 본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불교에 그 가르침이 있다고 본다. 기업이 성장하게 된 출발은 “더 큰 나”를 만들겠다는 집착에서 나온 것이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생각대로 이루어진다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 아닌가 . 어쩌면 기업경영은 가장 불교적 실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교의 더 큰 기본 가르침은 제행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머무르지 않는 법이다. 성주괴공의 순환논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한다. 그렇다고 기업이 망하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화 리틀붓다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만다라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오른 쪽 주먹에 모래를 움켜쥐고 마치 모래시계처럼 가늘게 모래를 흘러내리면서 우주를 상징하는 만다라를 모래로 만든다. 조금만 집중하지 않으면 만들어놓은 만다라가 엉망이 될 수 있다. 온갖 정성을 다해 만든 만다라. 장엄하고 찬란하다.

그러나 완성 되는 그 순간 모래를 흘러내린 바로 그 손으로 만다라를 흩어버린다. 보고 있는 내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당사자인 그 수도자는 얼마나 아쉽겠는가.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 지속가능경영의 비법이다. 자기가 쌓아올린 걸작품을 스스로 허물 줄 아는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제법 무아.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불교는 깨우치고 있다.

역사는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발전한다. 모래성이긴 하지만 더 오래가는 더 높은 모래성을 쌓기 위해서는 정상을 끌어내려 바닥을 넓혀야한다. 스스로 쌓은 것을 본인이 갖지 않고 바닥에게 돌려주는 것이 무엇인가.

불교에선 그 것을 회향이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쌓은 공덕을 남과 나눠 갖겠다는 것이 회향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부처님의 진리이다. 세상은 인연과이다. 인연과 인연이 닿아 여기 한 모습 장엄한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기업이 아무리 성장해 간다하더라도 독식하려고 하면 무너진다. 기업이 성장하게 된 것은 자신의 공도 있지만 아무 도움을 준 것 같지 않은 우주 삼라만상의 밑바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불교의 위대성은 바로 이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철저한 자기인식에서 출발하지만 제법무아 제행무상을 재인식하며 모든 공덕을 우주 삼라만상으로 돌리는 회향을 한다.

오늘날 대기업들이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말고 스스로 겸손해지고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바닥을 더 넓히는 대회향을 하면 더욱 크고 오래가는 지속가능경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대곤 한국경제신문 한경아카데미원장<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