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60주년]한평생 독립운동 Vs 국민정신 계몽에 앞장


탄허 스님.
최근 탄허 스님의 부친 김홍규 선생(1888~1950)의 독립운동 사실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종교인으로는 처음으로 1983년 입적 후 은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던 탄허(呑虛) 스님. 화엄학의 대가로 수많은 선지식과 재가 불자들을 길러냈던 탄허 스님의 부친이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우리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우지 못했던 뼈아픈 현대사 탓에 탄허 스님의 아버지 김홍규 선생의 지난 행적은 후손들과 세인들의 무관심속에 철저히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광복 60년을 맞은 올해 8ㆍ15 기념식에서 김홍규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서훈이 결정됐다. 불교계에서 이렇게 부자가 나란히 국가로부터 훈장을 추서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건국포장 서훈을 계기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있던 탄허 스님의 부친 김홍규 선생의 독립운동사를 되짚어 본다.

김홍규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이 드러난 경성복심법원의 재판 결과.



#독립운동에 일생을 헌신


“전라북도 정읍군에 큰 교당을 짓고 백만 명의 신도가 있다하는 태을교는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두 경찰부에서 늘 주의하여 오던 중인데 지난 음역 9월 십육인 모처에서 그 교의 간부가 비밀회의를 한다는 말을 듣고 전기 두 경찰부에서는 미리 변복한 경관을 다수히 파견하야 비밀히 수탐한 결과 과연 그들은 태을교라는 명목아래 두려운 큰 음모를 하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그 간부되는 전북 김제군 만경면 김홍규 등을 체포하는 등(중략)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는 지화와 은화를 합하야 107,750원을 넣은 항아리 한 개를 압수하였다는데(중략) 재작년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로는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여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達)코자 교도에게서 모집한 돈을 군자금으로 쓰기로 결의…(동아일보 1921년 10월 29일자)

율제(栗齊) 김홍규(金洪奎) 선생은 1888년 5월 2일 '징게맹게 외배미들(넓디넓은 김제 만경들판을 일컫는 사투리)'이라 불리는 김제평야 제일가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이명은 용규(鏞奎), 자는 민석(敏錫), 율제는 호다. 한일 합방으로 국운이 암울했던 1905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종교에 입문했다. 그때가 17살 되던 해였다. 이듬해 증산교에 입교, 1908년 다시 보천교에 입교했다. 1913년에 태을교에 입교했고 곧 태을교 재무주임이 됐다. 증산교는 강증산을 교조로 차경석을 교주로 하는 민족종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지도부의 지속적인 반일운동으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교명을 보천교, 태을교 등으로 수차례 바꿔 명맥을 유지했다. 1937년 정읍에서 서울로 옮겨온 현 조계사 대웅전도 이 보천교의 십일전(十一殿)을 일제가 빼앗아 불교계에 되판 것이었다.

만세운동이 크게 일었던 1919년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그해 10월 경북지역 독립자금 10만원을 수령했다. 11월에는 태을교 60방주 가운데 최고급 간부인 목주에 올라 교단의 2인자가 됐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흔히 그를 목주도인이라고도 불렀다. 세간에는 유학자로 출발해 불법과 술법을 익혀 도술을 부린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 봤다.

1920년 9월에는 교도들과 10만1500원을 독립자금으로 마련했다. 1921년 2월 이렇게 모은 돈 10만 3070원을 임시정부에 예치했다. 당시 백미 상등품 한가마니의 값이 3원 50전임을 감안하면 이 돈의 오늘날 가치는 수백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김홍규 선생은 1921년 독립자금 모금차 평안도로 가던 도중 일경에 체포됐다. 공주지법에서 1심과 2심(23년 경성 복심법원) 1년 6월형을 선고 받고, 이해 5월 고등법원에서 유죄로 판결, 상고가 기각됐다.

1924년 12월 출옥했지만 사실상 연금상태로 왜경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이 무렵 보천교 시대일보의 복간에도 참여했지만 감시가 심해 오래 관여하지는 못했다. 25년부터 다시 ‘영사(수은을 고아 만든 한방약재)’를 제조하는 독특한 기술로 매약상을 차려 큰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고스란히 김구 선생의 독립자금으로 헌납했고 가족들에게는 한 푼도 내놓지 않았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의 세력에 밀린 김구 계열의 몰락으로 치병에만 전념하다 50년 9월 28일 한국전란의 와중에 고문 후유증으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김홍규 선생이 10만원의 독립자금을 모금했다 발갇됐다는 당시 동아일보 보도.


#잊혀진 기억, 어렵게 기록 찾아



숨겨져 있던 김홍규 선생의 행적을 발굴한 주인공은 오랫동안 탄허 스님을 곁에서 모셨던 서우담 거사(도서출판 교림 대표)다. 탄허 스님은 부친의 이름이 김홍규라는 것과 김구 선생 계열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단 두 마디만 남겼을 뿐이었다. 우담 거사는 이를 실마리로, 십수 년간 관련기록을 찾아 헤맸다. 때문에 이번 김홍규 선생의 독립유공자 추서를 바라보는 우담 거사의 감회는 새롭다.
김홍규 선생에 대한 자료를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무렵이었다. 우담 거사는 “탄허 스님의 유훈에 따라 부친에 대한 정확한 기록만이라도 찾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막상 수십 년 세월 동안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과거의 일을 되짚어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한국전쟁으로 각종 정부문서가 소실된 것은 물론, 상대적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정당성이 취약했던 이승만 정권이 중국내 임정과 국내파 독립운동가들의 관련기록을 소홀히 취급하면서 관련 자료들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료를 찾기 위해 국립기록보존소, 국사편찬위 도서관, 법원도서관, 국회도서관, 정독도서관, 고려대도서관 등 안다녀 본 곳이 없다. 이 과정에서 1920년대 동아일보(1921.10.29자) 신한민보(1923.5.3자) 중외일보(1929.7.3자) 신문기록으로 김홍규 선생이 독립자금을 모금하던 중 왜경에 검거돼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해냈다. 어렵게 공주의 어느 개인 소장자에게서 법원의 재판 기록도 찾았다. 하지만 당시 복역했던 형무소 기록에 남은 사진기록 수백 장을 뒤졌지만 김홍규 선생의 사진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몰락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일제의 모진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김홍규 선생을 탄허 스님은 1924년까지 옥바라지 했다. 부친은 출소 후 농사를 지으며 아들에게 한학(漢學)의 전 과정을 가르쳤다. 어려운 살림에도 자식을 가르치려는 부친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남달랐던 탄허 스님 성품도 이 시절 부친의 영향이다.

29년 부친은 김제 제일의 천재라는 아들 탄허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이지함의 16대종가인 이극종가의 데릴사위로 보냈다. 그때 탄허 스님의 나이 겨우 17살이었다. 당대 기호학파의 거두 이극종 선생으로부터 <시경>을 비롯한 삼경(三經)과 <예기> <춘추좌전> 등 경서를 배워 금세 통달했다. 22살이 되던 34년 한암 스님이 계신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하면서 속가 동생들은 물론 권속들과 연을 모두 끊었다. 38살 되던 해 한국전쟁이 나고 부친이 숨을 거두고 얼마 있지 않아 스승인 한암 스님조차 이듬해 입적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의 고통이 심했다. 이는 탄허 스님의 속가도 예외 일 수 없었다. 독립운동에만 매달렸던 부친 탓에 끼니조차 잇기 힘들었던 시절 자식들을 가르치는 일은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아들 다섯에 딸 셋. 8남매 중에 그나마 제대로 교육을 받은 이는 탄허 스님이 유일했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 그렇듯 탄허 스님의 형제들도 사회적 무관심과 냉대 속에 험난한 세월을 살아가야만 했다. 더구나 해방이 된 후에는 자식들도 모르는 사이 부친의 독립운동경력이 이념의 색깔로 덧칠돼 있었다. 때문에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탄허 스님과 그의 속가에서는 부친에 관한 기억은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다.

우담 거사는 “광복 60주년이 지나도록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사회 아이러니다. 김홍규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삐뚤어지고 굴곡진 역사를 바로 잡는 구체적인 노력에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며 “그것이 이번 건국포장 서훈의 진정한 의미”라고 강조했다.

한편 탄허문화재단 이사장 혜거 스님은 “부친의 영향으로 평소 나라사랑에 대한 원력이 컸던 탄허 스님 유지를 받드는 차원에서라도 지속적인 조명작업이 이어져야 한다”며 “역사 바로 세우기가 사회적 화두가 된 요즘, 늦었지만 김홍규 선생의 숭고한 뜻이 역사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은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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