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화엄학 분야의 대강백인 설파상언(1707∼1791)과 그의 제자 인악의첨(1746∼1796), 연담유일(1720∼1799) 스님이 지은 ‘화엄경 사기(私記)’ 3권이 번역돼 발간된다. 이 달 말 출간되는 <화엄십지품(華嚴十地品) 삼가본사기(三家本私記)>는 봉선사(주지 일면) 능엄학림 2기 학인들이 3년 동안 이 세 스님의 사기 중 현재 전하는 여러 소장본을 비교해 내용을 정서하고, 토를 단 작업 끝에 나왔다. 화엄경 사기로 전하는 목록이나 전적은 많지만 그 내용이 일반에 공개되기는 처음이라 화엄학 연구자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사기(私記)는 <화엄경>의 어려운 부분들을 상세하게 풀어놓은 일종의 주석서로 화엄을 이해하는 지침서다. 하지만 조선시대 강백들은 중국에서와 달리 ‘소’나 ‘초’를 붙이지 않고 ‘사사로이 사견(私見)을 밝힌다’는 겸손의 뜻으로 <사기(私記)>라 이름 붙였다. 설파 스님이 지은 <잡화기(雜華記)>와 연담 스님의 <유망기(遺妄記)>, 인악 스님의 <잡화부(雜貨腐)>가 조선후기의 대표적 사기다. <삼가본사기>는 바로 이 세 저술을 모았다.

우리 나라 특유의 경학 연구 방식은, 사기와 과도(科圖, 내용을 소제목 별로 나눈 일종의 분류표)를 함께 펼쳐 놓고 <청량소초>를 보면서 <화엄경>을 공부한다. 하지만 다른 분야와는 달리 화엄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사기가 널리 쓰이지 못했다. 의도적으로 뺀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초서와 비슷한 형태로 흘려 쓰다 보니 사기를 지은 스님들마다 ‘∼체’가 있을 정도로 읽기가 힘들기도 하다. 누가 썼는지 밝혀진 게 별로 없고, 전체 내용이 전하는 것이 드물다.

초서를 정서하고 토를 단 원민 스님(능엄학림 2기 연구생)은 “사기는 강원의 강사들이 <화엄경>을 가르치면서 판본의 오·탈자를 교정하고, 내용상 오류에 대한 자신의 견해, 다른 전거들과의 비교 등을 소상히 기록해 놓은 일종의 강의 노트인 셈인데, 이들 사기의 저자가 대강백들인 만큼 내용을 정리하면서 그 정확성과 깊이에 놀랄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또 하나 <삼가본사기>는 우리의 전통적인 역장(譯場) 방식에 의해 번역됐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불조통기(佛祖統記)>에 나오는 것처럼 9개의 역할을 다 나누지는 않았지만, 원민 스님이 초서를 해독해 옮겨 쓰고 토를 달면(書寫 단계), 강주 월운 스님이 해독과 번역이 바른가를 검토해 수정하고(證義), 이를 갖고 학림 스님들이 공부하면서 잘못된 내용을 지적했다(刊定). 마지막으로 강주 월운(동국역경원장) 스님이 다시 한 번 검토해 내용을 확정했다.

월운(동국역경원장) 스님은 “사기의 출현이 학인들의 학구 기능을 저하시킨 훈고학의 전형적인 병폐라 지적하기도 하지만 요즘같이 문장력이 약해서 때로는 한치 앞도 못나가고,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심정일 때, 과도는 나침반과 같아서 방향을 가늠케 하고, 사기는 해도와 같아서 주변정세를 알게 해 주는 기능이 있다”고 간행사에서 말했다.

4×6배판 900여 쪽에 달하는 <삼가본사기>는 <화엄경> 사기 중 ‘십지품’ 부분만을 떼 낸 것이다. 화엄경 사기 전체를 다 끝내려면 앞으로 4년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완성되면 16절지 2600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사기 전체가 정리되면 <한국불교전서>에도 수록된다.

권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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