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주 회암사터(사적 128호)에 대한 발굴이 진행될수록 조선시대 왕실사찰로서의 위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완벽한 형태로 보존된 건물터가 계속 확인되고 있고, 용이나 봉황이 새겨진 기와와 왕실용 자기들이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박물관과 기전문화재연구원 공동발굴조사단은 지난 7월부터 실시한 회암사터 4차 발굴조사 결과 5단지 동쪽과 4단지(전체 조사면적 2천50평)에서 고려말∼조선 전기 건물터 18곳을 새로 확인했다고 11월 24일 밝혔다. 지난 1∼3차 조사에서 확인된 건물터까지 합치면 지금까지 모두 41곳의 건물터가 확인됐다.

특히 이번에 확인된 18곳의 건물 배치는 고려말 목은 이색이 회암사 중창 때 기록해 놓은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의 내용과 크게 달라 회암사가 조선 초기 왕실의 지원을 받아 중창을 거듭하면서 사역을 확대해 나갔음을 확인시켜 준다.

기전문화재연구원 김무중 연구원은 “3차 발굴까지는 건물 배치가 이색의 기록과 일치했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며 “조선시대 이후 왕실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여러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지난해 드러난 서승당 건물터와 같은 구조의 구들 시설이 추가로 확인됐다. 탁상식 구들 구조는 침상처럼 바닥보다 구들을 높게 마련한 것으로 세계건축사전에 올라 있는 하동 칠불사 ‘亞’자형 방과 비슷하다.

출토된 유물들도 왕궁에서나 사용되던 최상급인 것으로 확인됐다.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 어려운 용이나 봉황이 새겨진 막새기와가 출토되는가 하면 왕실용 자기들도 다량 출토됐다. 이 가운데는 1611년 광주 탄벌리 가마터에서 제작된 자기들도 포함되어 있어 폐사 이후 승려들의 복구과정에서도 왕실의 재정적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암사터 발굴조사는 2004년까지 계속되며, 최근 1만1천 평이던 사적 면적이 10만 평으로 확대 지정됐다.

권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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