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언어학계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집필한 각종 언어학 개론서에서 적어도 한번 이상 언급되는 인물과 문자로 `King Sejong'(세종대왕)과 `Hangul'(한글)이 있다.

이는 세계 언어학계에서 세종과 그가 주도적으로 만든 훈민정음, 곧 한글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다. 말하자면 한글과 세종은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우리 `문화상품'인 셈이다.

하지만 정작 국내에서 세종과 한글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떤지는 우리 나라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첫째 `한글실'이 없고, 둘째 80명 가량 되는 학예직 인력중 한글 혹은 서지학 전공자는 단 한 명도 없으며 셋째, 그렇기 때문에 지난 10월 한글날을 즈음해 이곳에서 개최된 한글특별전 기획전시는 한국미술사 전공자가 도맡아 했다.

한글에 대한 홀대는 비단 국립중앙박물관뿐만 아니라 고사 위기에 처한 한글문헌 역주사업 실태를 한문고전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이들 두 분야 역주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국가기관 혹은 공공기관으로는 각각 문화관광부가 지원하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교육부 산하 민족문화추진회가 있다.

이중 한문고전을 역주하는 민추는 매년 평균 50책 가량 되는 역주본을 내고 있는 반면 한글문헌 역주를 맡고 있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지난 91년 이래 지금까지 10년 동안 내놓은 이 분야 결과물은 고작 4종 13책에 지나지 않는다.

한글문헌 역주사업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면 「역주 석보상절」 2책, 「역주 월인석보」 5책, 「역주 능엄경언해」 5책에 이어 이번에 1책이 나온 「역주 법화경언해」에 그치고 있다.

2001년 내년 한 해의 경우 이런 격차는 더욱 벌어져 민추가 54책에 대한 역주를 추진하고 있는 반면 기념사업회가 생각하는 한글문헌 역주작업 대상은 전체 7권7책인 「법화경언해」의 1책에 지나지 않는다.

한글과 한문고전간 심각한 불평등은 단순한 수치에만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이 사업을 위해 지원되는 예산을 보면 더욱 한심하다.

즉 책당 기준으로 역주사업 예산이 한문고전이 3천500만원 가량인 데 비해 한글고전은 고작 1천500만원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고전역주를 위해 책정된 교육부 예산중 일부를 구걸하다시피 해서 따 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한글 최초의 문헌인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대서사시 「용비어천가」는 물론이고 500년 한글 번역사에서 최대, 최고 업적으로 평가되는 「두시언해」는 일부 열성적인 개인 학자가 내놓은 역주본 말고는 없다.

지지부진한 한글문헌 역주사업을 볼 때 더욱 아쉬운 대목은 어문정책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가 국립국어연구원을 직속으로 거느리고 있음에도 이 기관에서 이 분야 사업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 한문고전에 비해 한글고전 역주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잘못된 인식이 뿌리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한글고전 역주가 홀대받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차라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를 교육부 산하기관으로 해 주든지 아니면 문화부가 한글문헌 역주를 위한 대폭적인 예산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0.12.27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