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위한 군사작전 명칭을 '무한정의'에서 '항구적 자유'로 바꾸었다 한다. 일부 이슬람 학자들의 '무한정의란 알라신만이 구현할 수 있다’는 주장에 '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가 명칭 변경 이유다.

피 터지게 싸우게되는 전쟁에 명칭이 무슨 영향을 주겠냐만 그나마 '정의'란 단어를 비켜 간 것이 약간은 다행스러워 보인다.

인도신화에서 아수라는 원래 선한 신으로 정의(正義)를 위해 싸웠다. 그래서 '정의의 신'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정의에 너무 집착한 탓인지 아니면 정의를 구실로만 삼았던 탓인지 그가 만든 세상은 그만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선한 신의 세계에 편입되지 못하고 추방되어 마신(魔神)쪽으로 분류되고 만다. 불교에서는 그 아수라의 경지를 육도 가운데 인간의 바로 아래 서열로 만들어 놓았다. 그나마 지옥, 아귀, 축생보다 한 단계 높아 인간에게 보다 가깝다. ‘정의’에 대한 지나친 집착만 버린다면 아수라도 인간 반열에 들 수 있는 것이다.

‘평화’ 역시 마찬가지다. 체코의 하벨 대통령 말을 빌리면 이렇다. ‘평화라는 말은 평화를 방어한다는 구실 아래 사실상 무력을 의미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높일 수 있는 소중한 단어들, 평화 정의 등도 그 말을 쓰는 사람, 또는 그 집단, 사회의 진실성 여부에 따라 이처럼 양면성을 띄게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항구적 자유’의 그 ‘자유’는 어떤가.
불교에서의 자유는 탐 진 치 삼독의 지배를 받고있는 가당찮은 자아(自我)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근,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자유’의 의미와는 글쎄, 그 맛이 좀 다르지 않은가.

‘항구적 자유’를 위한 전쟁이 혹, 강자들의 자유공간만을 확대하는 그런 자유가 아니기를 부처님께 기구 드린다.

김징자(언론인. 본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