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벌 같은 존재일까? 파리 같은 존재일까? 광수생각'

며칠 전 한 일간신문 한 컷 만화에 실린 글로, 우리에게 '공포감'을 한번 생각케 해 준다. 방안에 들어 온 벌 한 마리를 보고 공포에 질려 온갖 살충제를 뿌려 그 벌을 죽였는데 '침을 지니지 않은 파리를 보고도 이랬을까?' 스스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파리라면 성가시긴 하겠지만 살의까지는 느끼지 않는다. 벌이라 해서 반드시 침으로 사람을 찌르지는 않을 것인데…. 하지만 바로 그 무기, 그 침이 상대의 살의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모든 살의의 저변에는 이 같은 상대에 대한 공포가 있다.

심리학에선 태생적 공포감은 없다한다. 갓난아기는 호랑이나 불 죽음 등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 무서운 존재에 대한 공포는 학습된 것이며 이 같은 공포감은 한편 '위험을 경고해 주는 생존의 필수적 방어체계'의 하나가 된다. 우리 뇌의 뇌편도(Amygdala)가 그 학습된 공포를 조절한다고 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21세기 새로운 공포는 테러다. 미국에 대한 자살 비행기 테러, 탄저병 등 생화학 테러는 그야말로 지금 미국을 '떨게 하고'있다.

아프가니스탄에 무지하게 쏟아지고 있는 폭탄과 미사일은 파리 아닌 벌에게 마구 살충제를 뿌려대는 심리 저변과 같은 공포의 반사작용일 것이다.

학습된 공포가 비록 생존의 필수적인 방어체계라 하더라도 또한 통어되고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불경은 가르치고 있다. 반야심경의 '무유공포'가 그것이다. 반야심경 수지독송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공덕은 '공포가 없어지는 경지'가 아닌가. 그러면 왜 불경은 공포를 극복하라 하는가. 공포는 한편으로 탐려扁치의 튼튼한 방어체계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21세기의 평화는 '공포'를 연구하고 '공포'를 극복하는 지혜를 터득해 나감으로써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김징자(언론인, 본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