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15일은 1950년 6월25일과 맞서 있다. 아니 1945년 8월15일이후 55년의 세월과 맞서 새로운 날이 되고 있다.

그날 밤 나는 평양 목란관 만찬장에 있었다. 한반도의 운명이 바뀌어지는 남북정상회담의 결실인 남북공동선언 초안이 만찬 끝무렵 두 정상 사이의 최종적인 검토 끝에 합의를 이끌어 낸 순간의 한 증인이었다.

나는 세상 떠난 소설가 이기영의 아들 이종형 아 태 부위원장,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매제 장성택 민족경제부위원 장등과 술잔을 부딪치며 축하했다.

서울을 떠나던 6월 13일 이른 아침, 나는 소감을 묻는 TV의 질문에한반도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이번 정상회담을 규정했다. 그 규정은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다. 나보다 국내 외의 여러 입에서 그 이상의 표현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아마도 이 사건은 가장 위대한 통일의 그날 이전의 어떤 사건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태운 비행기가 휴전선으로 갈라진 상공을 통과해서 북한 영공으로 들어갔다. 대통령일행의 비행기가 갈때는 으레 우리 공군기가 엄호한다. 그 공군전투기들이 인계하자 북한의 공군기들이 그들의 영공에서 우리 일행을 맞아들이게 되어 있다. 서로 적과 적으로 공중전을 하던 전투기가 정상회담을 위해서 날아가는 비행기를 인계하고 인수하다니 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일인가. 더구나 북한당국에서는 그런 손님맞이 전투기편대도 내보내지 않은 평상시의 빈 하늘이었다.

황해도 서쪽 끄트머리 장산곶이 내려다 보였다. 몽금포 쯤으로 여겨지는 포구도 보였다. 그곳들은 남한의 서해안 어디와도 하나 다를 것 없는 눈물겨운 갯펄과 갯마을이었다.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 미국생활이 1년만 늦게 되었더라도 이번 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미국에 머물고 있다 해도 대통령과 정부 당국이 가자 하면 못갈 것도 없지만, 그래서 며칠동안 태평양을 건너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의시간 엄수라는 미국 대학의 실정으로 보면 내 평양행은 불가능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미국의 동서부 연구 방문교육의 강의일정을 다 마치고 돌아온 것이 2000년 2월이었다.

아마도 역사의 어떤 의지가 지난 30년에 걸쳐 조국의 민주화와 함께 통일을 위한 문학운동을 한 나에게 너는 이번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에 꼭 참여하라는 행운을 베풀어서 내가 한국에 있을 때 회담이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사실인 즉 내년에도 나는 국외 나들이가 예정되어서 쉽사리 어떤 일에 참여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지난 해와 내년 사이의 이 시간이 나를 평양에 가게 한 사실은 행운 이상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것은 내 행운이 아니라 역사속의 불가피한 선택에 내가 응답한 것인지 모른다.

나는 2년전에 자연유산과 문화유산들을 보러 북한에 간 적이 있다. 15일동안 자강도만 제외하고 북한 각 지역을 두루 다닐 수 있었다. 그 당시 북한 당국자는 이런 광범위한 여행은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백두산 삼지연, 압록강 상류, 묘향산, 구월산, 금강산의 내 외금강, 원산, 개성, 성불사, 예성강 등을 실컷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과 문화의 흔적을 만나러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절망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조국의 절반인 북한땅에 발 디딜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시대의 발전이 있어 그곳을 가게 된 감격은 북한여행 내내 몸속에 울음을 담고 있게 했다.

나는 삼지연 원시림속에 있는 베개봉 호텔의 밤에 남과 북이 하나의 모국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혼자 울었다. 그렇다 이 하나의 말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울음 끝의 딸꾹질을 했다.

그때의 여행이 산천초목과 유서있는 유적을 만나러 간 것이라면 이번 평양 3일은 민족의 새로운 삶이 개막되는 역사의 현장에 참여하는 일이었다.

북한 당국자 추산의 80만 환영인파는 온통 꽃술이었고 만세소리의 함성이었고 환호성이었다. 순안비행장 청사 정문이 아니라 청사 옆으로 난 차량문호를 통해서 걸어나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타났을 때 나는 동행자들에게 소리쳤다.

“직접 나온다! 저기 봐요”

모두 놀랐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대통령 1호기 밑에서 서로 악수했다. 환영식과 열병이 끝나자 우리 일행의 긴 행렬은 연도의 환영인파에 답하느라고 팔을 번갈아가며 손을 흔들어야 했다.

대동강은 아름다운 강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그 강 기슭의 모란봉 산길을 지나 주암산초대소 2층 숙소를 배정받았다. 방안에 마련된 들쭉술 한모금을 입안에 적셨다.

이렇게 평양에 온 것이다.
오후에 만수대극장에 갔다. 나를 예술계 인사로 대접해서인지 대통령 내외분과 김영남 상임위원장 부부들과 주석단에 앉게 했다. 북한은 공연예술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하룻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 나는 서울의 한 신문으로부터 청탁받은 16쪽짜리 시를 즉흥으로 써내려 갔다. 그리고 강만길 교수와 함께 오전 5시 무렵의 숲속을 거닐었다. 둘은 이제 죽어도 여한없다고 말했다.

평양 2일째도 쉴 참이 없는 일정이었다. 대통령과 정부공식 수행원들, 일반 수행원들은 연이은 정상회담에 눈코 뜰 사이가 없었고 우리들 특별수행원도 일정에 맞추느라 한눈 팔 겨를이 없었다.

오후 1시간 경제분야, 사회 문화 분야 인사들이 나뉘어져 북한 인사들과 회동했다. 그리고 나는 북한 사회 민주당위원장 겸 민족화해위원회 김영대 위원장을 만나 몇가지 제안을 해서 원칙적인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이같은 모든 협의는 정상회담 자체의 성공을 위한 것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부재자가 되고 싶었다. 하나의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첫날의 북측 국가원수 초청의 인민문화궁전 만찬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 주최의 만찬이 목란관에서 베풀어졌다. 그 만찬장에서 공동선언 초안에 합의를 본 것이다. 대개 만찬은 만찬만이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런 만찬에서까지 초안이 날아들어 그것을 서로 번갈아 보고 나서 합의를 마치는 광경은 서로 격의가 없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이 합의가 이루어진 뒤 두 지도자는 연단으로 손잡고 나와 공존과 통일을 위해 감격적인 축배를 들었다. 장내는 축제 절정이었다. 그때 강만길 교수가 내 시를 한광옥 비서실장 박재규, 박지원 장관에게 알리고 그들이 두 지도자에게 알려 내가 소개된 것이다.

나는 대동강 앞에서라는 긴 시를 낭송했다. 장내는 숙연했고 갈채해 줬다. 북한 인사들이 나를 껴안아 주었다.

떠나는 날 대통령 숙소인 백화원초대소 환송오찬에서 김위원장은 격찬하면서 나를 초청했다. 나는 적절한 시기에 평양을 방문할 것이다. 이제 민족의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말 그대로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추억의 대통령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