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은 시청자들은 궁예가 죽을 때가 되었다고 흥분한다. 흥분이란 동조나 비평에서가 아니라 그 드라마에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왕이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미복(微服) 차림으로 산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부양지역 백성들에게 죽었다."<삼국사기> 궁예의 최후는 이미 그렇게 사료에 나와 있다. 또 다른 사료 <고려사>에는 보리이삭을 훔쳐먹다 부양지역 백성들에게 죽었다고 각색되었으나, 명백한 결론은 부양지역 백성들에 의해 죽었다는 기록이다.

여기에서 역사의 진위 여부를 가리려는 학구적인 논쟁이 아니라 시중에 나도는 궁예와 김대통령의 공통점 서른 몇 가지가 회자되는 것을 계기로 한번 짚고 넘어가야 점이 있다. 제작자들은 궁예의 죽음을 어떻게 그릴까 고심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고심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다. 사료에 나와 있지 않는 부분은 우리들의 창의적인 상상을 펴 그려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미 사료에 나와 있는 부분을 상상만으로 그리는 것은 '왜곡'에 속한다.

학술적으로 죽음에 대한 사료를 중심으로 논쟁을 할 필요는 있으리라 본다. 그런 공감이 없이 단순히 제작자의 상상력만으로 사료를 왜곡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지금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해 고쳐라 하면서 온 나라가 시끄러운 판인데, 따지고 보면 궁예의 죽음 표현도 왜곡의 일종이다. 내 눈의 대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만을 시비하는 어리석음과 같다. 역사적 사실을 명백히 왜곡 서술한 일본을 비롯해서 미국 중국 등지의 왜곡은 왜 한마디의 소리도 없는 것인가. 내가 하는 왜곡적 상상은 왜곡에 해당하지 않는가.

"궁예는 돌에 맞아 죽는다. 김대통령은…." 이런 떠도는 말을 의식해 궁예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왜곡했다면, 이는 정신분석적으로 일차과정 사고체계에 있는 미숙함을 보인 것이다. 일차과정 사고란 비논리적 사고로서 어린이들이나 할 미숙한 사고체계를 말한다. 웃고 말 일이지 그것을 믿고 왜곡하는 일은 더욱 웃음거리가 된다. 궁예와 김대통령은 논리적으로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바로 보자. 바로 보아야 바른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이근후(이화여대 명예교수, 본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