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문제는 자연환경을 잘 보전해 쾌적한 물리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신앙처럼 여기며 살아온 삶의 대전환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늘과 땅과 물과 허공이 온전할 수 없으며, 거기에 기대어 사는 인간과 뭇생명의 목숨을 이어갈 수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지난 5월 22일 종교환경회의가 출범했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의 종교인들이 종교의 가르침인 자발적인 가난과 청빈, 무소유의 실천을 통해 환경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우리는 환경문제의 해결이 삶의 대전환에 있듯, 이의 해결을 위한 가장 확실한 주체는 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종교환경회의의 출범을 반기는 한편 왜 지금에야 뜻을 모았는지 뒤늦었다는 아쉬움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것과 많이 소유하는 것을 발전이며 행복으로 여겼다. 많이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의 것을 빼앗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량생산과 소비의 신화는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왔고,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의 불화와 전쟁을 가져왔다. 그래서 환경문제의 해결은 인류와 뭇생명의 삶을 진정으로 풍요롭게 하는 근본적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그 방안은 종교환경회의가 발족하면서 밝힌 참회문에 나와 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기고 자연이 나의 가장 소중한 벗임을 깨달아 댐 개발, 골프장 건설, 에너지의 과다 소비 등으로 인해 죽어갈지도 모를 수많은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환경의 파괴가 곧 삶의 근거를 파괴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삶의 전환을 주저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인이 먼저 나서야 한다. 삶의 전환은 곧 만물에 불성이 있다는 가르침의 체현이며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환경회의 발족을 계기로 불자들 스스로 삶의 전환을 이루는 정진의 서원을 새롭게 다지길 바란다. 아울러 사찰과 교회의 대형화, 고급화에 대한 반성도 뒤따라야 할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