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련 당…유려하고 통쾌한 행서
부 석 사…담대한 기상 잘 나타나

◇예산 수덕사 ‘백련당’ 편액.

◇서산 부석사 ‘부석사’편액.

만공 월면(滿空 月面·1871~1946)은 전라북도 태인 출생으로, 1883년 김제 금산사에 갔다가 환희심을 느껴 출가를 결심하고, 이듬해 공주 동학사 진암(眞巖)의 문하에서 유발동자로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그는 서산 천장사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경허(鏡虛)를 계사로 삼아 사미계를 받고 득도하였고, 그 뒤 수년간 천장사에 머물다 아산 봉곡사, 서산 부석사, 부산 범어사 계명암, 공주 마곡사 등을 돌며 오로지 참선에 전념하였다. 그는 1905년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가 수덕사 금선대에 머물면서부터 40여 년 간 수많은 납자들을 지도하며 선풍을 진작하였다. 만공은 경허의 의발을 받아 한국불교의 커다란 선맥을 형성한 근대를 대표하는 선승으로, 그의 글씨는 그의 성품만큼이나 지정(至精)한 서미(書美)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당시 제일가는 서예가로 꼽히던 김돈희(金敦熙)와도 글씨로 교유하였다고 하는데, 예산 수덕사 <백련당>, <청련당>, <향운각>, 정혜사 <쌍수루>, 견성암 <견성암>, 아산 강당사 <관음전>, 서산 부석사 <부석사> 편액 등 주로 수덕사를 중심으로 한 사내 암자와 인근 사찰에 글씨를 남겼다.

예산 수덕사 <백련당> 편액에는 ‘2961(二九六一)’이라는 관지와 두인을 비롯한 ‘송월면인, 만공(宋月面印, 滿空)’이라는 백문, 주문의 방인 2과가 찍혀 있다. 백련당은 대웅전 우측에 청련당과 마주하여 자리한 ㄷ자형의 요당으로, 편액은 만공이 수덕사에 머물며 절을 중창하던 시기인 1934년에 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방필(方筆)로 통쾌(痛快)하게 써 내린 행서이다.

서산 부석사 심검당에 걸린 <부석사> 편액에는 ‘칠십옹(七十翁)이라는 관지와 두인을 비롯한 ‘송월면, 만공(宋月面, 滿空)’이라는 도서가 있다. 나무결이 드러난 느티나무 액판의 가장자리를 파서 변죽을 대신 한 이 편액은 만공이 덕숭산 산정에 전월사(轉月舍)라는 띠집을 짓고 지내던 1940년에 쓴 것으로, 아마도 그 무렵에 절을 중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강직(剛直)한 성정과 담대(膽大)한 기상이 잘 드러난 심후(深厚)한 필선의 행서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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