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바람은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왔다갈 뿐”광우 스님의 법구를 모신 상여가 운구차에 오르자 스님의 마지막 모습에 대중들은 눈물을 터트렸다. 평소 생사에 대해 초연한 모습을 보인 스님이지만 따르는 불자들에게는 아직 스님이 남긴 여운이 커 보였다.‘명사 태허당 광우 계민문도장 장의위원회’는 7월 22일 동국대 일산병원 영결식장에서 광우 스님 영결식을 거행했다.광우 스님의 유지에 따라 문도장으로 엄수된 영결식에는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 조계종 원로의원 원행 스님, 운문사 회주 명성 스님, 전국비구니회장 육문 스님 등 50
광우(光雨)스님.현대 한국불교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큰 원력을 가지셨던 어른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법당 불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재를 키우는 불사’입니다.”라는 스님의 말씀이 귓가에 쟁쟁합니다. 1980년대 초 제가 동국대 선학과에 다닐 때 매주 마다 스님을 뵐 수 있는 인연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정각사에서 주는 수석 장학금을 받은 것을 계기로 청년법회 지도법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법회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따뜻한 점심 공양을 함께 하시곤 했습니다. 때로는 현대불교학의 석학 뇌허 김동화 박사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
나는 태허당 광우 명사 스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감사와 존경이라는 두 단어를 함께 떠올린다.스님을 가까이 찾아 뵌 것은 1982년 일본으로 유학의 길에 오르면서다. 평소 친밀하게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비구니계의 어른이시고 유난히 공부하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말씀을 많이 들어와서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되어서였다. 처음 정각사 골목길을 내려가면서 평소에 잘 모시지도 않았던 어른을 찾아뵙는다는 것이 좀 서먹한 생각도 들었지만 용기를 내어서 대문을 들어섰다. 정적에 감싸인 정각사 마당에 서니 불안했던 마음도 가라앉고
광우 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58년 여름, 보문사(탑골승방) 남별당에서였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인 나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를 알아와 발표하라는 세계사 선생님의 숙제를 안고 일조 스님을 찾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속 시원히 일러줄 분이 올 테니….” 나는 무작정 그 분을 기다렸다. 저녁때가 되자 양복차림의 훤칠한 남자 한 분이 내 앞에 나타났다. 동국대 불교학과 재학생이던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이광우(李光雨)스님이었다. 다생의 인연이 지중했음인가. 광우 스님이 정각사(삼선교 소재)를 짓던 그 해에 우리 집은 절 근처
한국 비구니 원로 태허당 광우 스님은 ‘한국불교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수식할 수 있는 수행자다. 스님의 일생에서의 주된 키워드 중 하나가 ‘최초’이기 때문이다.광우 스님은 1940년 국내 최초의 비구니 강원인 상주 남장사 관음강원의 최초 졸업생이며, 1956년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4년제 정규대학(동국대)을 졸업했다. 당시 스님은 ‘양복 입고 대학에 다닌 비구니’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1958년 성북구 삼선동 망월산에 정각사(正覺寺)를 창건한 이래 불교계뿐만 아니라 여성, 학술,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크게 활동한 스님은 200
태허당 광우 큰스님, 평생 지혜와 자비를 베푸시고, 후학들에게 사표가 되신 스님께서 이렇게 홀연히 열반에 드시니, 각별한 인연을 가졌던 저는 그저 아득하고 황망할 따름입니다.스님께서는 저보다 대여섯 살이나 연배이시면서도 언제나 도반으로, 단짝으로 대하시며 어려운 일을 상의하시는 등 격의 없이 대해주셨습니다.평생 크게 의지했던 선배이자 도반이셨던 스님께서 이렇게 훌쩍 떠나가시니, 항상 비구니가 가야 할 길과 갖춰야 할 자세를 알려주셨던 큰 스승의 부재를 후학들은 이제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광우스님, 생전 스님께서는
삶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가 어느날엔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태어나면서 이미 전제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역시 위안이기도 하고 대안이기도 합니다. 겁(劫)을 두고 생과 사를 되풀이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일 진데 이번의 이 삶은 수 많은 삶 가운데 하나의 삶일 것입니다.다시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감내해야할 부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되는 희망이기도 합니다.스님께서는 이번 생을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시작하셨습니다. 慧자 峰자 큰 스님을 아버지 겸 평생의
법화행자로서 늘 관세음보살의 미소를 머금으시며 한 점의 차별심도 없이 모든 사부대중을 따뜻하게 제접해 주셨던 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니 황망하고 공허한 심정 가눌 길이 없습니다.언제나 모든 비구니스님들의 사표로서 우뚝 솟은 모습으로 한국불교와 청정도량 정각사를 가꾸고 지켜주신 스님께서 세연을 다하시고 홀연히 떠나시는 모습은 그 자체로 열반적정의 법문 입니다. 그렇듯 자비롭고 인자하신 스님의 모습을 기억하는 저희들로서는 담담하고 무심한 마음으로 스님을 보내드리기에는 너무나 아쉬움이 큽니다.스님께서는 종단이 어려울 때 물심양면으로 법통을
광우스님! 광우스님!이렇게 오셨다가 이렇게 가십니까!여여히 오셨다가 여여히 가십니까!밤낮이 없는 밝은 일광은 고금이 없지만밤의 어두운 느낌은 피하기 어렵습니다.스님께서는생멸이 적멸인 대승신심과무주상 수행의 보살원력으로정진하고 또 정진하셨습니다.스님께서는미래세에도 일념신심과 광대원력으로무생무멸하고 무장무애한불가사의 해탈경계에서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광수공양하고 보개회향하여보현행원을 이루십시오!광우스님! 스님께서는 평소에바람은 떠날 때 집착하지 않는다.그저 왔다가 갈 뿐이라 하셨지요가실 때도 자취 없이 가시듯이오실 때도 소
태허당(太虛堂) 광우(光雨)스님!사바에 홀연히 오시어 각별한 신심과 원력으로 산하대지를 흔들더니, 이제 어디로 가시려 하십니까. 모든 불자들의 사표(師表)이며 비구니계의 큰 스승이신 스님께서 이렇듯 원적(圓寂)에 드시니, 스님의 후학 제자들과 수많은 인연들은 그 슬픔을 가누기 어렵기만 합니다.아무도 가지 않았던 미답의 길을 헤치며 위법망구의 삶을 살았고 인천의 스승으로서 표상을 보이셨으니,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시려 애썼건만 스님의 덕행은 후대에 길이 감화를 미칠 것입니다. 전법과 수행에 전념하시면서도 인재 양성에 헌신하셨으니, 아
우리를 바른길로 안내하는 선지식을 만나는 것은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 만큼이나 큰 복이다. 비구니 명사 태허당 광우 스님은 대중들에게 삶의 길을 일러준 훌륭한 선지식이셨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스님이 삶 속에서 보여준 행지(行止)는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가음에 따뜻한 가르침으로 남아있다. 비록 지면을 통해 스님의 행지를 전할 순 없지만 평소 남긴 가르침이 다시 법향으로 전해지길 기원하며 정리해본다. 노덕현 기자행이 있으되 믿지 않아 교만스레 되지 말고, 신이 있으되 행 없어 어리석지 말고 육바라밀의 지침을 잘 받들어 수행해 나가면
한국불교 비구니계 원로이자 비구니 최초 명사법계를 품수한 태허당 광우 스님이 7월 18일 법랍 80세, 세수 95세로 원적에 든 가운데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을 비롯한 주요인사들이 빈소를 찾았다.동국대 일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광우 스님의 빈소에는 19일부터 조계종 스님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가장 일찍 조문을 다녀간 스님은 교육원장 현응 스님과 구룡사 회주 정우 스님이었다. 분향을 마친 뒤 식장을 나온 정우 스님은 “특별한 인연은 없었지만 스님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을 산 어른으로 기억하고 있다. 일찍이 서울에 오셔서 정각사에서
한국비구니계의 원로이자 조계종 명사(비구의 대종사격)인 태허당 광우 스님(정각사 회주)이 7월 18일 오후 4시 5분 주석처인 서울 삼선동 정각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80세, 세수 95세. 광우 스님은 지난 2009년부터 정각사 주지 소임을 상좌인 정목스님에게 맡기고 오직 전법과 보림행에 힘써왔다. 그러던 중 고령으로 인한 미질을 앓아왔고 7월 18일 상좌, 손상좌 등 문도들을 한 자리에 불러 후사를 당부했다. 그 후 “떠나는 바람은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왔다가 갈 뿐이다”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홀연히 원적에 들었다. 1925년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