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 ‘무주상보시’ 상관없어 어려운 이웃 자비 손길이 중요 지난해 12월 24일 나는 신도 대표와 함께 우리 동네 초등학교 네 군데를 돌며 2013년에 중학교로 진학하는 아이들에게 동ㆍ하복 교복교환권을 주었다. 60명의 아이들은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중학교 입학 학생들에게 교복을 준 것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교복을 지원하기 시작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2011년 1월 어느 날, 40대 중반의 보살님 한 분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내년에는 중학교에 가는 아이들에게 교복을 좀 해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거기에 대해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는 이야기를 좀 자세히 해보라고 했다. “우리 큰아들이 살아 있었으면 올해 고등학교에 갈 나이인데 여섯
절절한 고인과의 추억 가슴에 묻고 우린 살아가네 우리절에서는 49잿날 재를 지내는 중간에 돌아가신 분에게 가족이 쓴 편지를 읽는다. 아들이 어머니께, 딸이 아버지께, 외손녀가 외할머니께,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사위가 장인어른께, 아내가 남편에게…. 나는 임종을 앞둔 환자가 있는 집의 가족들에게 말한다. 임종환자의 눈이 빛을 잃기 전에, 정신이 온전할 때 이별을 충분히 하라고.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그들은 혼침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 또렷한 정신을 지니고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경우는 없었다. 어느 날 문득 환자가 정신이 혼미해져 있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고 싶은 말이 아무리 많아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사람을
49재 사찰운영 방편 아니라 슬픈 신도들 위로하는 자리여야 참석한 비불자에겐 불심 심어야 지난 2009년,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善終)한 지 49일째 되는 날 경기도 용인 천주교 묘원 성직자 묘역에서는 신자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추모 미사가 치러졌다. 이 일을 두고 세간에서는 49재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한동안 화제에 올랐었다. 천주교에서는 장례미사를 올리고 나서 ‘연(煉)미사’ 또는 ‘위령(慰靈)미사’라는 걸 올리는데, 유가족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올릴 수 있다. 적잖은 천주교인들이 49일 되는 날 연미사를 봉헌함으로써 ‘49재’를 지내고 있는데도 한국 가톨릭 교단에서는 49재를 금지하지도, 공인하지도 않는다. 해당국가의 전통을 가톨릭으로 수용하는 현지화전략 때문일 것이다. 내
기도비의 변형된 형태 회비제 도입 재정난 이겨 나눔과 문화축제 ‘풍성’ 정말 이럴 줄 몰랐다. 처음에 출가할 때 내가 이렇게 살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법정 스님처럼 그렇게, ‘맑고 향기롭게’ 살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신도들이 법당 난방기를 켜두고 가면 그걸 끄면서 나는 불평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는데도 화장실 문을 열어두고 가면 그걸 닫으면서 중얼거렸다. 수도꼭지가 덜 잠겨 물이 흐를 때도, 가스밸브가 덜 잠겼을 때도, 대낮에 전등을 끄지 않았을 때도 내 인상은 굳어졌다. 일반인들은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사실 절을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연료를 넣어야 가는 자동차처럼. 불전에 갖가지 공양물도 올려야 하고, 너나없이 음식도 먹어야 한다. 직원 월급, 전기,
신도 없이 시작한 절집기도 신묘장구대다라니 1500일 기도 신도 모이고 지역 사회에 기여 “저는 주지 안 할 겁니다.” 은해사에서 잘살고 있는 나를 은사 스님께서 불러 “법화사 주지할래? 보성선원 주지할래?”라고 물으셨을 때 내가 한 대답이었다. 은사 스님은 잠깐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그럼 사제를 살게 할 테니 이름이나 빌리자”고 하셨다. 은사 스님의 그런 부탁까지 거절할 순 없지 않은가.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8년 1월 나는 대구 보성선원 주지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강사가 되어서 자연과 벗하면서 우아하게(!) 살고자 했던 나의 계획은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이렇게 꺾이고 말았다. 처음엔 신도가 별로 없어서 운영이 잘 되지 않았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부터 절집에
스리랑카서 안거 중 숭산 스님 만나 달라스 포교당서 홀홀단신 포교 6개월 뒤 귀국…해외포교 고충 느껴 94년 여름, 1년을 기약하고 떠난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불교국가 순례길이 4개월에 접어들 때 스리랑카에서 여름안거를 지내고 있었다. 보다 의미 있는 만행을 위해 영어공부도 하고 힘을 얻어가던 참선에 좀 더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안거를 반쯤 지냈을 때 영어공부는 제법 진전이 있었지만 정진에 큰 고비가 왔다. 좌선을 하면 속이 꽉 막힌 듯 거북함과 답답함이 점점 심해지며 집중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마침 희한하게 숭산 스님께서 스리랑카에 오셨고 스님께 가르침을 받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스님께서는 동안거부터 당신의 지도하에 공부하기를 권하셨지만 계획한 여행이 많이 남았기
불교학생회·청소년 지도법사 소임 탁마도량 해인사 소임은 어려울 듯 출가본사 수덕사 후배지도로 보답 인생이란 다양한 많은 인연들이 모이고 쌓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부모와 형제 등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근본적인 인연이 있고 또 사람마다 살아가면서 만나고 만드는 각기 다양하고 특별한 인연들이 있다. 불교와 관련하여 가슴에 품은 특별하고 소중한 인연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첫 번째가 불교학생회이다. 학생법회를 통해 스님의 법문을 만나고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또한 여러 학교의 다양한 환경의 많은 친구 및 선후배들을 만나고 사귈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출가의 마음을 다지게 된 것도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고교시절 불교학생회의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마음속 불만으로 외유한 어머니 기도 시작하며 가족에 기쁨 줘 딸도 본받아 지역봉사에 나서 2012년 12월 31일 저녁, 부석사 해넘이해맞이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사람들이 다담(茶談)자리에 함께 했다. 찻물이 식기를 기다리면서 참가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 및 참가동기를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제일 끝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 절 신도부부 차례였다. 부인이 먼저 간단한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첫마디가 상당히 놀랍고 충격적인 말이었다. “저는 부석사에 다니면서 개과천선했어요.” 순간 참석자들이 당황스러워하며 약간의 동요가 있었다. ‘개과천선(改過遷善)’ 단순하게 보면 지난날의 잘못을 고쳐 착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을 쓸 때는 그 지난 잘못의 정도가
1년간 대전운불련 법회 법문 맡아 어느날 잊지 못할 법문 한가지 청탁 “손님 모시듯 인생도 목적 갖고 살자” 대전의 포교당에서 지낼 때 운전기사불자연합회(운불련)법회를 1년 동안 맡게 되었다. 외부법회는 보통 한 두 차례 보아주고 마는데 운불련의 특별한 사정 때문에 1년간 법회를 보게 된 것이다. 당시 기사불자들은 택시의 가, 나, 다, 라의 4개 조로 편성된 영업 일자로 인해 각각의 쉬는 날에 맞추어 4일간 계속 같은 내용의 법회를 해야 했다. 그런데 4일을 계속 한 스님께 부탁하기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스님을 모시기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 사정을 들으신 은사스님께서 나에게 1년간 법회를 맡아서 봐주도록 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게 결정이 되고 운불련의 회장과 임원들이 인사를
고등학교 졸업 후 청년법회 안가 강제로 참여시키니 적극 활동 법회서 남편 만나 딸 한문학당 보내 몇 해 전 여름, 일주일동안 어린이 한문학당에 참가했던 보련이는 글씨를 꼼꼼하고 예쁘게 쓰고, 암기도 잘하며 봉사 및 선행활동에도 솔선수범한 모범 어린이였다. 갸름하고 하얀 얼굴에 마르고 키가 큰 편이었는데 때로 초등학생답지 않은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보이기도 했다. 두 번째 참가했을 때는 함께 온 동생을 알뜰하게 잘 챙기는 의젓한 언니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장난꾸러기 사내아이들의 지나친 장난이나 놀림에는 화를 내기도 하고 분을 삭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무척이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이제는 고등학생이 되었을 보련이의 부모님은 결혼 전부터 나와 오랜 인연이 있다. 한
한달 지나도록 신도 10명도 안와 첫 임기동안 시주금 아껴 도량 정비 이제는 지역 문화도량 ‘자리매김’ 10여 년 전 처음으로 말사주지를 맡아 인수를 받을 때, 전임 주지스님께 들은 기도법회와 신도에 대한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초하루 법회를 비롯한 정기법회와 기도는 없고, 연중 정초와 초파일, 칠석과 동지기도불공을 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하루 기도법회를 정기적으로 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전임 주지스님이 말씀하시길 “아마도 세 명 정도가 오거나 아무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그 다음 달 초하루를 맞이하면서 그 말이 사실임을 실감하였다. 정말 세 분의 불자님들만이 초하루에 절에 오셨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절의 든든한 중심이 되어주고 있는
수양아들 같은 유발상좌 인생상담해 가며 바른길 인도 부담스러워도 피하지 말아야 조금은 고집스럽고 집착이 강한 신도가 있었다. 평소에는 원만하고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언행을 유지하지만 한 번 고집이 발동하면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성격이었다. 그런데, 이 신도님이 어느 날 자신의 아이를 내게 유발상좌로 입적시키고 싶다고 청해왔다. 이전까지는 신도들의 이런 부탁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신도님의 경우에는 생각을 해보아야겠다고 하고 가까운 도반들과 상의를 해보았다. 결론은 좋은 인연이 될 수 있는 다른 스님을 소개하기로 하였다. 그 불자님은 얼마간 하소연과 불만을 토로했지만 내가 소개한 스님에게 아이를 유발상좌로 인연 맺었다. 지금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지만 불과 한 세대전만
대불련 시절 도반 인연 지속돼 여성신도 마음 몰라준다며 충고 女心 알아주는 스님 되고자 노력 수덕사에 출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도량에서 울력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와 함께 온 젊은 보살님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저~ 혹시 대불련(대학생불교연합회)활동을 하지 않으셨나요?” “아~ 네, 그런데요.” 잠시 손을 멈추고 그 보살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자신도 대전에서 대불련 활동을 했는데 전국연합수련회 때 본 기억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렇게 잠시 인사를 나누고 초심출가자로서의 형편도 그렇고 어머니와 함께 온 그 보살님의 여건도 그렇고 해서 간략하게 대화를 정리하였다. 지역은 다르지만 대학시절 같이 불교활동을 했다는 것이 인
법당 출입 없으시던 아버지 평소 안부 전화에도 경어 써 가족포교 못하면 부끄러운 일 전화벨이 울린다. 속가 아버님의 전화다. “여보세요” “셋째가?” “예, 주경입니다.” “아~ 그래. 스님, 잘 지내지요. 여기 집이다. 아버지.” “네, 알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편안하시지요.” 속가의 부모님은 스님이 된 아들에게 전화를 하면 아직도 말씀을 올렸다 내렸다 하시며 편안하고 자연스럽지가 않다. 아들이 스님이 되고도 10여 년 정도 자주 보지 못할 때는 당신들 편한대로 말씀을 하셨지만, 주지를 맡고나서는 거처가 일정한 까닭에 초파일을 비롯해 기도와 행사가 있을 때는 자주 절에 오시곤 한다. 처음에는 당신들 편한대로 평어로 말씀을 하셨지만 신도들이 스님께 예의를 갖추는 태도를 자주
첫 만남서 스님 팔장낀 보살 어느날 딸은 ‘여친’ 있냐고 묻고 이제 손녀가 도량서 뛰어 놀고 있다 성지순례를 가던 도중에 잠시 휴게소에 들렀다. 무심하게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한 보살님이 “스님, 같이가요.”라고 말하며 팔짱을 끼는 것이었다. 느닷없이 생긴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그대로 있기도 불편하고 팔을 억지로 빼기도 어색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불자님이 달려와서 스님께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고 하며 팔짱을 풀어주었다. “어머, 스님하고 친하고 싶어서 그랬는데 그러면 안 되나요?” 순간 주변에 있던 보살님들이 실소를 터뜨렸다. 얼굴을 보니 처음으로 성지순례에 동행한 불자님이었다. 얼마 전에 시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재를 지냈던 분인데, 절에 다니기로 마음먹고 첫 인연으로 성지순례에
법당 뒤 중학생 뽀뽀사건 아이들 말썽은 당연한 일 그때는 불안하고 어려웠다 산중의 본사에 출가하여 몇 년을 산중에서만 지내다가 89년 초 대전 시내의 포교당에 나가서 살게 되었다. 도시에 가서 살기 싫다고 사양과 반대의 뜻을 보였었지만 은사스님을 모셔야 하고, 지금쯤 새로운 변화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사형의 설득을 못 이기고 결국 따라 나서게 된 것이다. 대전시 동구 천동 심광사, 도시에 와서 살게 된 사찰의 이름이었다. 변두리 주택가에 자리 잡은 심광사는 진행중인 불사가 중단되어 있고, 도량이 정비되지 않아 지저분하고 심란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사찰은 종단 정화의 한 축으로 중요한 활동을 하신 대의스님께서 주석하시던 도량으로 한 때 대전불교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 유서 깊은 도
대전 포교당 학생법회서 만난 청년 佛法의 매력에 빠져 출가 인연 사람 아름답게 하는 힘, 법회에 있어 무척 친숙한 느낌을 주는? 젊은 스님 한 명이 무척 반가운 얼굴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함께 마주 인사를 하자 해맑은 웃음을 띤 얼굴로 자신을 알아보겠냐고 묻는다. 표정이나 태도로 보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가까운 사이 일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생각을 더듬어 보았지만 뚜렷하게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난감한 기색을 보이자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그제야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었다. 덥석 손을 잡고 반가운 인사를 새로 나누었다. 1989년 은사 스님을 모시고 대전의 포교당에서 포교의 인연을 지을 때, 학생법회에 다니던 불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염불 소리에 감동 기도 동참한 등산객 “백마디 훌륭한 법문도 좋지만 한마디 염불 마음 움직이기도” 겨우 머리를 깎고 아직 승복이 제대로 어울리지도 않는 초발심 때, 은사스님께서는 수행자의 살아가는 법에 대해 자주 말씀하시곤 했다. “출가인은 법상에 오르면 법사가 되어서 법문을 해야 하고, 밭에 나가면 농부처럼 일해야 하며, 아픈 사람이 있으면 간병인이 되어야 하고, 부엌에서는 부엌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 탁자의 마지(摩旨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를 내려먹을 수 있을 만큼 염불도 해야 한다.” 본사주지 소임을 사시던 당신이 직접 행자들에게 초발심자경문을 강의하시고 한명 한명씩 암기 한 것을 확인하시곤 하셨다. 때때로 새벽 도량염불을 하시곤 하셨는데 경쾌한 목탁소리와 청아한 염불소리에 산중대중이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