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이 막 보급될 때 쯤 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어느 보살에게서 메일이 왔다. 아니 보살이라고 하기 보다는 여자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문투와 글의 내용으로 보아 신심있게 절에 다니는 불자는 아닌 듯도 했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불교에서는 여성을 차별하여 출가하여도 남자스님보다 아래고, 차별이 심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투였다. 그날부터 많은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자신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면 안되겠냐며 출가 과정에 대해 구체적인 몇 가지를 묻고는 소식이 끊어졌다. 왜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여성차별을 강조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불교 내부의 상황을 보면 8경계법이 있어 언뜻 그래보일지 모르지만 종교라는 테두리에서 보면 여성을 우리사회에서 당당한 일원으로 진정 해방시킨 종교가
8월의 마지막 밤의 날씨가 제법 선선했다. 참으로 계절 주관자가 누구일까. 달력도 보지않으면서 어떻게 9월이 오는 것을 알았을까? 아침에 어느 보살이 초하루법회 하냐고 물었다. 초하루 법회가 아니고 오늘은 음력 초여드레 약사재일법회 한다고 일러주었다. 약사재일법회 던 무슨 법회 던 9월 첫째 날 하는 법회면 그것도 초하루법회 아니냐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언젠가 법타스님께서 양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한지 오래 지났는데도 절에서 음력을 기준으로 법회를 하고 있다며 변화의 필요성을 말씀하셨다. 양력에 맞춰 생활하는 사람들의 패턴과 이격되어 불교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며 안타까워하셨다. 공감이가는 말이다. 주부들 중심으로 사찰이 운영된다고 하여 보살절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지고 있는게 현실이다. 여기에서 탈피하
“자~ 스님들, 요기 보시다가 하나 둘 셋 하면 파이팅~! 하면서 웃으세요.” 인상 좋은 사진사의 말에 21명의 스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청암사 승가대학에 재학 중인 학인들이 지역 대학교에서 2년간 사회복지 과정을 모두 마치고 졸업사진을 찍는 날이다. 2012년 2월 절 밖 출입이 제한된 스님들이 승복 위에 사립대 학사모를 썼다. 학인들이 일반 대학에서 단체로 위탁교육을 받고 졸업하는 건 우리나라 승가대학 중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주지 스님, 이제 학인 스님들도 전문성을 갖춰야 불교의 사회적 역할 확대에 도움을 줄 수가 있어요. 현재의 승가대 4년 교육과정 속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교과 과정을 연결하면 사회복지 활동이 증가하는 시대에 스님들이 사회 참여를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김천
구미 마하이주민센터 3층에는 법당이 있다. 특별하다면 불단에는 어느 나라에서 모셔 왔느냐에 따라 스리랑카 부처님, 캄보디아 부처님, 중국 부처님, 베트남 부처님으로 구분되는 크고 작은 부처님이 작은 불단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이주노동자들의 50%는 불교문화권에서 온 노동자로서 자기 나라에서 온 부처님 모습을 보면 매우 좋아한다. 부상으로 아픈 몸으로 센터를 오거나 휴일날 갈 곳이 없을 때 이 곳 법당은 남방불교 염불소리와 향 내음으로 가득하다. 그 나라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대부분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이 아프지 않기를 기원하고, 한국에서 돈 많이 벌 수 있기를 염원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15년 전 나는 3개월 간 헝가리에 머문 적이 있다. 부다페스트에서 3시간 떨어져 있는 작은 쩔러싼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넨 청년이 모자를 벗자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왼쪽 뇌의 3분의 1을 잘라 낸 청년의 얼굴을 본 사람은 대부분 놀라워했다. 마음고생을 나타내 듯 까맣게 타들어간 입술, 멍한 그의 모습에 맞이할 말을 잃었다. 그의 곁에는 아버지 반디가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무슨 말로 이 가족이 겪고 있을 고통을 위로해야 할지 생각이 복잡했다. “반가워요. 이곳이 이주노동자 쉼터라는 것은 알고 있지요? 오늘밤은 마음 편안히 푹 잠을 자세요.” 1차 수술을 마치고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28살의 착한 눈빛을 가진 베트남 청년, 토안(To An)은 이렇게 나와 인연이 시작되었다. 한국으로 건너온 지 3년째가 되는 2010년 7월 늦은 밤 오토바이를 타고 마트에 다녀오다 한국인 자가용
부처님은 달리라고 설법하신 적이 없다. 하지만 극한의 고통을 반복하며 달리기를 하는 것이 내가 선택한 수행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제일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라톤이 어디 쉬운 운동인가. 새벽 2시, 굽이굽이 이어진 깊은 산골을 달리다 보면 간혹 전봇대가 내게 다가오기도 하고 발을 헛디뎌 아슬아슬할 때가 있다. 졸음이 밀려들면서 환각상태가 찾아오고 앞이 보이지 않아 어지럼증도 도진다. 발은 물집이 잡혀 엉망이다. 한 발 디디기도 어려운 몸을 끌고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버티는 순간이다. 졸음이 몰려들면 허벅지를 꼬집고 뺨을 때리기도 하면서 달린다. 정말 이렇게까지 달려야 하나 싶어 눈물이 솟구칠 때가 있다. 맨살을 드러내는 일을 금기시하는 보수적인 불교계에서는 마라톤복을 입고 뛰는
1981년 2월 사미계를 받았다. 계를 받기 전 법주사에서 행자생활을 했지만 동국대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싶은 생각에서 법주사를 나왔다. 수능시험을 본 뒤 법주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나를 받아 줄 스승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지금의 모악산 금산사에서 나를 받아 주었다. 남은 행자 생활을 마친 뒤 큰스님께 법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처음부터 금산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 한 것이 아닌데다 금산사에 얼마 지내지 않고 바로 동국대학교에 가겠다고 하니 학비 지원을 해 줄 수 없다는 거다. 1년 이상 큰 절에서 생활을 하다 대학에 가면 사찰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나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공부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동국대를 선택했다. 그곳에 가니 같은 기수
운명이라는 말로 모든 삶을 결정지을 수는 없지만 가끔은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말로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내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고등학교에 입학 후 우연이 불교 동아리를 만나게 되면서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불교반 지도 법사님으로부터 ‘너의 인생관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인생관은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가치관입니다. 가는 실이 있고 굵은 실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삶도 가늘 게 사는 사람과 굵게 사는 사람이 있어요. 또한 가늘고 길게 사는 길과 굵지만 짧게 사는 인생의 길이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요? 의미있는 삶, 가치있는 삶을 찾아보세요.” 법사님의 설법은 내게 오랜 여운을 남겼다. 그러면서 진리가 무엇이냐를
저 이제부터 “딩티응앗!” 아니에요. “임지영”으로 불러주세요. 27살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이 웃으면서 법회에 참석하자마자 요청을 한다. 자국 출신의 이름을 한국 국적 취득한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이 개명이란다. 왜 그런가 했더니 엄마 이름을 두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놀리기 때문에 화들짝 놀라서 취한 행동이었다. 한국인 아빠와 베트남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에는 갑작스런 이혼이나 기타 사유로 엄마 나라로 출국한 뒤 아직도 되돌아오지 못한 7세 이하의 한국 아이들이 1,000여명이 넘는 통계자료가 있다. 또한 이주노동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무국적 상태로 건강보험과 같은 의료보호를 받지 못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어 한국을 떠나고 있다. 우리나라는 부모의 체류자격에 따라 출생한
하루에도 수많은 인연과 만나고 헤어진다. 나에게 특별한 만남을 말하라면 당연히 새 생명과 눈을 맞출 때이다. 그리고 가장 아픈 이별을 떠올려보라면 이 아이들이 국내에서 자라지 못하고 연락없이 어느 새 사라지는 때이다. 6년 전 탄시르는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엄마 친구의 품에 안겨 인도네시아로 출국해야했다. 인도네시아 노동자 부부가 공장에서 월급을 제 때 받지 못한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동비자를 연장 받지 못해 미등록 노동자가 되었다. 사실 이들은 불법노동자가 아니다. 나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란 의미가 포함된 불법이란 용어보다 서류가 갖춰지질 않아서 행정기관으로부터 비자를 연장받지 못한 미등록 노동자로 불러도 될 것이다. 탄시르 엄마, 스텔라는 같은 나라 출신인 아빠와 사랑을 나누었고, 준비되지
2013년 초파일을 한 달 앞두고 우연히 뚜안을 만났다. “스님, 안녕하세요. 센터에 친구 만나러 왔어요.” “반가워! 뚜안. 그런데 왼손이 아픈 거야? 붕대를 왜 감고 있어?” 그런데 단순히 붕대를 감은 수준이 아니었다. 새끼손가락을 빼고 모두 프레스기에 잘린 상태였다. 합장을 하게 했더니 사라진 부위가 너무 컸다. 사실은 새끼손가락도 안 남고 손바닥 안쪽까지 잘려나갔던 것이다. 손이 없으니 당연히 그에게 일자리를 줄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산재보험에 해당되어 보상금을 받았단다. 하지만 한국에 올 때 빚진 것을 갚기 위해 모두 집으로 송금했다고 한다. 무료하고 심심한 일이 반복되면서 뚜안은 2주 뒤에 고향인 베트남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의수를 왜 안 했는지 물었다. “비싸요.” 30살
“내 마누라!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이주여성 쉼터 입구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들이 뭔데 내 마누라, 내 새끼 데려가려는데 막아!”라며 들어오려는 사나이와 실강이가 벌어졌다. 욕설과 고함, 폭력이 난무하면 결국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다. 긴급 피신한 여성은 애를 안 주겠다고 울고, 남편은 막무가내로 아이를 데려가려고 하고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는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그 정도 양보안하면 누가 집에 들어가겠냐고 되물으면 남편들의 기가 꺽인다. 아내의 역할을 도와주는 양성평등 문화에서 자란 여성과 보수적인 남성위주의 삶 속에서 자란 남편과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도 적지 않아 이 문제가 극복되면 원만한 합의하에 가정으로 돌아가는 이주 여성도 있다. 정답은 서로가 공통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