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막 시작되던 6월 말, 간단한 짐을 챙겨 땅끝마을 해남 미황사로 향했다. 서울에서 가장 먼 곳으로 길을 잡은 것은 작년에 이어 두번째로 열린 ‘청년출가학교’ 행사 진행 때문이다. 청년출가학교는 20대에게 출가자의 삶을 안내하고 출가가 새로운 삶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출가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됐다. 8박9일동안 사찰에서 생활하면서 불교와 인문학 강의를 들으며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고 불교적 안목으로 사회를 통찰해 스스로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길러주는 프로그램이다. 형형색색의 옷을 벗고 회색 법복으로 갈아입은 40 여명의 청년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특히 흰고무신을 신고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아 차수한 모습은 말 그대로 ‘행자
젊은 세대일수록 불자수 감소 “한국불교 변하지 않으면 박물관서 과거 흔적만 보게 될 것” 한국불교의 미래는 어떨까? 나이를 먹을수록, 승랍이 들어갈수록 나는 이 문제가 염려스럽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보면 이 같은 우려가 구체적인 수치로 드러난다. 2005년 우리나라 종교인구를 연령별로 살펴보았을 때 50대 이상의 전체 인구를 100명이라고 할 경우, 불자는 32명, 개신교와 천주교를 더한 기독교는 29명으로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연령이 낮아질수록 불자의 수는 급격히 줄어든다. 20세 미만의 연령층을 100명으로 볼 경우 기독교 인구는 31명이지만 불자는 그 절반인 16명에 불과하다. 교육현장에서는 이보다 더 심각하다고 한다. 초등학교 교사가 자신이 가르치는 아
매주 7~80명 모이던 청년 법회 출가자도 나오고 회원끼리 결혼도 명맥 유지하는 대불청에 관심절실 큰일이다. 이러다간 완전히 사라져버릴지 모른다.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 대한불교청년회 말이다. 2주 전에 말한 것처럼 대불청 대구지구 관계자들이 우리절 어린이ㆍ청소년법회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대구는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대구지구 차원의 연합법회는 꿈도 못 꾸고 있고, 지회가 몇 개 있긴 하지만 회원의 수가 몇 명 되지도 않는다. 이건 전국적인 현상으로 젊은이들의 또래문화에서 불교가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일부 청년회는 누가 봐도 ‘청년’이라고 할 수 없는 연령층이 이름을 장악하고 있다. 나는 청년회 출신이다. 출가 전에
다른 절 경로당처럼 조용한데 청소년 위한 프로그램 마련 활기 넘치는 법당 ‘ 흐뭇’ 일요일이 되면 우리절엔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신도 20~30명, 어린이와 청소년, 교사와 보조교사 50~70명이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오전 10시, 승합차에서 내린 아이들은 법당에 들어간다. 이미 자리잡은 어른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빈자리에서 부처님께 절을 올린다. 저희들끼리 킥킥거리며 장난치는 아이들도 있지만 조그마한 손을 예쁘게 모으고 진지하게 절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신도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을 바라본다. 처음엔 아이들이 시끄럽다고 꾸짖던 노보살님들도 지금은 별로 불편해 하지 않는다. 어린이법회를 2년간 꾸준히 했더니 지금은 중고등학생도 제법 된다. 첫해에
청년회 법회는 청소년 법회, 청소년 법회는 어린이 법회 관건 “어린이법회 교사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2011년 6월 어느 날 젊은 불자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반가워서 그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냐고 물었더니 어느 불교유치원의 원장이 이야기하더라고 했다. 2008년 초, 내가 처음으로 주지 소임을 맡고 나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사실은 어린이법회였다. 모두 다 아는 이야기지만, 어린이법회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가 갖춰져야 한다. 하나는 유능한 교사, 다른 하나는 재정적 뒷받침이다. 재정 문제는 내가 주지로서 사찰을 운영하는 위치에 있으니 어떻게든 해나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교사였다. 유능과 무능은 일단 두고, 교사를
기초수급 노인 80% 독거 노인들 삶 위로하는 게 사찰 목표 수치와 통계를 나열하는 것은 쓰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지루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우리절이 위치한 지역은 저소득층 노인이 많다. 6월 20일 현재 우리 동네인 대구 달서구 송현1동에 거주하는 65세 이상 노인인구 2,688명 가운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219명으로 8.1%를 차지한다. 2011년 현재 전국의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의 비율이 평균 2.9%인 걸 감안하면 우리 동네에 저소득층 노인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동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가운데 독거노인의 수는 179명으로 전체 노인인구 가운데 6.7%를 차지하지만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노인 전체에서 독거노인의 비율을 따져
빡빡한 스케줄 뚫고 법회 응해 올해 3천명 이상 신도 몰려 ‘성황’ 우리 절집에서 ‘엄친아’라고 하면 딱 한 스님이 생각난다. 혜민 스님! 인물 좋고, 인상 좋고, 언변 좋고, 글 잘 쓰고, 학벌 좋고, 미국의 대학교수니까 직장(?)도 좋아서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다. 지금까지 220만 권 넘게 책이 팔렸다고 하니, 수입도 여간 좋은 게 아니다. 게다가 인간성도 좋고 예절까지 바르다. 한국에 들어오면 전화라도 지인들에게 꼭 인사한다. 난 혜민 스님이 사랑스럽고 예뻐 죽겠다.(그렇다고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진 말라.) 혜민 스님을 소개한 사람은 내게 단체영화 관람을 권했던 울산 해남사 만초 스님이었다. 2010년 여름이었는데 해남사에서 혜민 스님 초청법회를 했더니 신도들이 아주 좋아하더라면
시간과 비용이 들지 않는 사랑 없어 보살행은 자신의 소중한 것 쓰는 것 우리절에서는 지난 5년간 해마다 ‘자비의 김장나누기’를 해왔다. 작년엔 기초생활수급자 270가구로, 한 가구당 평균 9Kg의 김치를 플라스틱 들통에 담아 주었다. 이렇게 김장나누기를 하는 이유는 중생제도라는 보살의 본원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쉽게 말하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김장 불사는 8월 하순쯤, 해남의 농부에게 배추를 주문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배추 단가는 일반 업자보다 높은 액수로 정하되 출하 당시의 시세에 따라 연동하도록 했다. 계약단가와 시세의 중간 액수가 최종 가격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만약 시세가 폭락하더라도 농민으로서는 어느 정도 안정된 수입을 기대할 수 있고, 폭등할 경우 우리절에서는 상대적으
2008년 권유로 김장행사 열어 크고 작은 인연 모여 3100포기 김장 김장은 우리절의 연례행사 가운데 가장 큰 행사다. 참가 인원으로 본다면 부처님 오신날이나 봉축음악회가 있지만 투입되는 인력이나 일하는 기간으로 본다면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힌다. 그러니 김장에 대하여 할 말이 좀 많겠는가. 그래서 두 번에 걸쳐서 글을 싣는다. 내가 보성선원에 부임해 온 지 반년 쯤 지난 2008년 가을, 4촌 사형인 현명 스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제주시에 삼광사라는 절을 창건하여 봉사활동을 왕성하게 하는 스님이다. “절 운영은 어떻소?” “뭐, 별일 없이 세 때 기도하면서 그냥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절에서는 5년 전부터 김장 나누기를 하고 있는데 스님도 한 번 해보지, 그래.”
욕먹을 각오로 말한다. 나는 오디오를 한다. 이렇게 고백해 둬야 다음 이야기가 풀리기 때문에 미리 털어놓는다. 예전에 산속에 살았을 때 오디오를 켜두고 혼자 음악을 듣고 있으면 등산 온 사람들이 가끔 물었다. “스님은 왜 염불 안 듣고 음악 들으세요?” 그때 나는 장난처럼 말했다. “나는 입만 열면 늘 염불하는데, 염불을 듣기까지 하고 있으면 얼마나 지겹겠어요?” 몇몇 분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부분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만큼 음악은 절집과 이질감이 느껴지나 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도 탐탁찮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 거다. 그런 분은 신문을 한 장 넘기시거나 다른 코너를 읽으시라. 괜히 욕해서 업 짓지 말고. 나, 욕먹으면 기분 나쁘다. 사람이니까. 나는 중고 오디오로 음악을
얼마 전 우리절에 아주 기쁜 일이 생겼다. 대웅전의 불상과 복장에서 나온 경전이 보물 제1801호와 제1802호로 각각 지정된 것이다. 보물 제1801호의 정식 명칭은 ‘대구 보성선원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인데, 삼존불과 각각의 후령통, 발원문, 다라니 등 10건 129점의 유물이 해당되고, 보물 제1802호인 ‘…삼존좌상 복장전적’은 1395년에 조성된 목판에서 인출한 〈인천안목〉 등 네 권이 해당된다. 문화재 지정 과정을 소개하려면 5년여 전의 일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처음 이 절에 와서 인수인계를 할 때 전임 주지 스님이 말하기를 부처님 얼굴이 갈라져 있으므로 개금을 다시 해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봐도 개금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불사를 시작하지 않
다섯 차례 단체 영화관람 마련 공양과 여흥거리 더 좋아해 2009년 2월 말이었다. 울산 해남사 주지 스님이 내게 전화한 게. 만초 스님은 신도들과 영화 〈워낭소리〉를 단체관람했는데 아주 감동적이었다면서 우리절 신도님들도 모시고 가라고 권했다. 내가 영화를 보고 나서 극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극장의 담당과장을 만나 무료급식에 오시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영화를 단체로 관람하고 싶다고 말했다. 관람자의 수가 적은 화ㆍ수요일날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에 관람하는 조건으로 1인당 2천원씩으로 할인하되 200명 이하에는 무조건 200명의 관람료를 내고 초과 인원에 대해서는 1인당 2천원씩 추가하기로 했다. 영화관람 당일에는 관광버스를 세 대 빌리고 생수 한 병씩과 삶은 달걀 2개, 찰강냉이를 한
절 집안에도 스타마케팅 필요 산사음악회 등 적극 활용해야 우리절 인근에 중산층 아파트 단지가 4~5년쯤 전에 들어섰다. 27개동, 2420가구로 꽤 큰 규모다. 내가 처음 여기로 왔을 땐 골조 공사가 한창이었다. 새로 이사 오는 이들에게 어떻게 전법할 것인가가 당시에 나의 화두였다. 전법을 하려면 우선 우리절의 존재를 그들에게 알려야 했는데 어떤 방편을 쓸지 고민이었다. 우리절은 도로에서 한 블록 들어온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 전통사찰도 아니어서 도로에 간판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네에 사는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절이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홍보 방법은 스타 마케팅(star marketing)이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
영화상영으로?젊은이 포교 발원 참여자 줄어 중단, 아쉬움만 남겨 나는 5년 전 보성선원에 온 이래 도심사찰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방편을 써야 할 것인지 고민해왔다. 그래서 세 가지로 방향을 잡았다. 첫째는 신행공간, 둘째는 복지공간, 셋째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신행(信行) 공간으로서의 역할은 어느 절이나 다 하는 거니까 특별할 건 없다. 문제는 복지(福祉)와 문화(文化)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불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보면 불자는 대부분 여성인데다 노령층이 많다. 나는 젊은이들을 절에 오게 하기 위해 어떤 방편을 써야 할지 깊이 생각했다. 문화의 여러 분야 가운데 영화와 음악에 눈길이 갔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의 틈을 좁
한 불자가 있다. 사업가인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 우리절에서 ‘장수사진’ 촬영 봉사를 한다. 처음엔 ‘영정사진’이라고 불렀는데, 몇몇 어르신들이 ‘영정’이라는 말이 들어가니까 기분이 나쁘다고 하시면서 오래 살라는 뜻으로 이름을 장수사진으로 바꿔달라고 하셨다. 이름 바꾸는 데 법원에 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냉큼 바꿔드렸다. 노인이 죽고 싶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이라더니 역시 옳은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영정사진을 찍지 않고 장수사진을 찍는다.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네모난 소프트박스 조명과 가장자리가 자줏빛인 배경지를 우리절에 갖다 두고 그때그때 자신이 직접 설치하여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 후래쉬가 천장을 향해 터지도록 하는데 2개의 조명도 동시에 터져 세 개의 조명으로 사진을 찍는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오래전 한 카메라 회사에서 썼던 광고 카피다. 기억의 유한성과 기록의 무한성을 강조한 명언이다. 광고 카피는 때때로 명언으로 남는다. 나는 거의 모든 걸 기록으로 남긴다. 글로 남기는 건 날마다 꼼꼼하게 쓰는 일기와 사무장이 쓰는 일지가 대표적이다. 언제 누가 어떤 봉사를 했는지 적어두지 않으면 곧 잊어버리게 되고 자원봉사 통장에 누락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일지를 세밀하게 쓰라고 사무장에게 말한다. 물론 보살행을 하는 봉사자 입장에서는 통장에 기록하기 위해 봉사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주최자인 종무소에서는 사소한 것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것이 봉사자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사진은 기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매체다. 백 마디의 말보다 사진
편지가 왔다. 선생님이 직접 가져온 커다란 봉투에는 예쁜 분홍색 종이를 오리고 풀로 붙여 만든 편지봉투도 있고, 올록볼록한 입체 캐릭터 스티커를 붙여 멋을 낸 것도 있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연필로 무지개를 그리고 그 속에 글씨를 써넣은 편지, 인쇄된 밑그림에 색색의 형광펜으로 장식한 예쁜 편지도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조심스레 가위로 봉투를 잘라 편지를 꺼낸다. 정성이 담뿍 담긴 편지를 상하게 해서는 안 되니까.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아이들이 삐뚤빼뚤 연필로 꾹꾹 눌러서 쓴 편지는 무려 쉰 장이 넘는다. 처음 장학금을 받은 아이들은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쁘다고 한다. 5학년 시은이는 “나는 친구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장난꾸러기 회장이다. 그런 내게 장학금이라니! 장
우리절은 한 달에 세 번 지역 어르신들께 점심 공양을 대접한다. 매번 평균 200분가량 오시는데, 1년에 한 번 전복죽을 끓일 때는 400~500분가량 참석하시고, 동짓날은 300분가량이 드신다. 이 글을 보는 주된 독자가 스님들일 거니까 솔직히 말한다. 내가 무료급식을 처음 시작할 때 순수한 뜻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뭔가 순수하지 못한 의도도 있었다는 얘기다. 내가 이 절에 부임하고 나서 두 달 후에 취임식을 했다. 도반들과 타지에서 인연맺은 불자들이 축하해 주기 위해 절을 찾아왔다. 그들이 이 부근에 와서 우리 동네 주민들에게 절의 위치를 물었지만 절을 코앞에 두고도 보성선원을 모르더라는 것이었다. 뜻밖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남의 일에 무관심하다는 거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
8월 22일 신도 여덟 분과 함께 혜각 거사의 병문안을 갔다. 52세, 암이 임파선을 타고 신장에 퍼져 있고 간까지 전이되었다고 하였다. 병실에 들어갔더니 그의 얼굴은 이미 납색이 되어 있었다. 통상적인 인사를 나누는데 그의 눈이 어느 순간 풀려 초점을 잃었다. 내가 그에게 정신이 가끔 풀어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고 솔직히 대답했다. “거사님, 지금은 가끔 그렇지만 점차 그 시간이 길어질 겁니다. 고통은 심해질 거고, 진통제를 더 많이 쓸 겁니다. 거사님의 육신은 병들어 회복되기 어렵습니다.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려야 합니다.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는 것처럼, 병든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으셔야 합니다. 살겠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고통만 길어지게 됩니다.” 그는
호스피스.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행하는 의료행위 대신 평안한 임종을 맞도록 위안과 안락을 최대한 베푸는 봉사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행하는 갖가지 봉사활동을 말하는데 나는 약 6개월 정도 대구 영남대병원에서 활동하다가 성대결절이 생기면서 그걸 치료하는 동안 당분간 쉬게 되었다. 그동안의 일을 일기로 썼다. 그 중 일부를 싣는다. 8월 7일 863호실. 58세인 백영자 불자님은 내가 다가가자 나를 바라보며 합장했다. 위암. 몸이 많이 수척한 상태인데 수시로 토하고 있었다. 갈색 물질을 한동안 토해내고 나면 생수로 입을 헹구기를 반복했다. 맡기 힘든 냄새가 진동했다. 토하기가 끝나자 내가 말했다. “보살님, 절에 자주 다니셨어요?” “자주는 못가고 형편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