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부터 알라. 너부터 알고 너부터 믿고 너부터 그 본래 있는 거를 찾는다면 이 세상 우주 만물이 돌아가는 섭류를 네 자신이 잘 알 수 있느니라. 그럼으로써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느니라. ?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일체제불과 저와 여러 스님들과 더불어 같이 본래 한자리로 돌아갑니다. 더우기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인데도 모두 그냥 ‘비 오거나 말거나 맞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이렇게 하시는 것을 오늘 역력히 보았습니다. ‘비가 오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하다가 정히 비가 와서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면 비가 오지 않게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 정성 여하에 달린 그 자신들의 마음을 시험해 보는 것도 됩니다. 하여튼 여러분 장하십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여러분이 스님들보다 더 신심이 돈독하지 않나 하는 생
우리는 봄을 기다리는 나무처럼 꾸준히 밑 빠진 구멍에 모든 것을 믿고 놓아야 합니다. 먹고선 싸지 않으면 부작용으로 죽습니다. 싸야 살듯이 놔야 삽니다. 몸이 있을 때 이 공부를 안 하면 세세생생 가슴찢고 울부 짖으며 창살 없는 감옥처럼 그렇게 자유스럽지 못하게 지낼 터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알음알이로 쉽게 말은 하지만… 문) 불법을 공부한다 하면서 행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까웠는데 사실은 저도 그러고 있더라고요. 누가 뭐라 하면 ‘둘이 아니잖아.’ 하고 알음알이로 쉽게 말은 하지만 정작 저 자신도 행은 안되거든요. 열심히 해서 이 도리를 알고 싶은데 어찌 공부하면 좋겠습니까. 답) 사람마다 누구나가 다 둘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우리가 둘이 아닌 것이라고 하
일체의 모든 것을 거기다 맡겨놔라. 이 우주 천하에 직결돼 있는 근본이 모두 사람의 마음에 직결돼 있는 것을 알고 그 직결돼 있는 주인공을 믿고 거기다가 모든 것을 맡겨놔라. (지난 호에 이어서) 큰스님: 아까 끄트머리로 말씀하신 것은 아까, 뭐라 그랬죠? 질문자1(남): 산소를 잘못 건드렸을 때 자손에게 화가 미친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큰스님: 네. 그거는요, 여기서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소승이다, 대승이다 하는 교리를 다 놓고 돌아가는 이 진리를 탐구하는데 무슨 그것이 잘못되고 잘되고가 있습니까? 일체 만법에 뭐, 마음은 체가 없는 겁니다. 그렇죠? 영(靈), 의식은 수만 개가 들어와도 들어온 사이가 없고 내놔도 내놓은 사이가 없고, 또 내가 가다가 ‘아, 여기가 좋
?어느 누구든지 깔보지 않고 병신이든 병신이 아니든 똑똑하든 똑똑지 않든 누구를 막론해놓고 웃으면서 대해줄 수 있으며 ‘내가 못 배웠을 때 내 모습이다. 바로 나인 것이다.’ 이렇게 사랑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졌을 때 바로 모든 것에서 몰락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눈을 마주하면서 서로 토론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말을 하면 여러분이 먹을 것이요, 여러분이 질문을 해도 내가 먹고 없는 것입니다. 함이 없이 하는 도리가 바로 이 도린가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지금 이러한 도리를 공부하는 데 대해서 갈등이 있거나 방황하는 분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고도 또 이건 대승(大乘)이니 소승(小乘)이니 하면서, 여기는 체계가 잡혔느니 잡히지 않았느니 하고 생각들을 하고
만사만생이 다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원리가 누구나 잘되고 싶지 못되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못되고 싶어서 못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눈이 없고 귀가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마음의 도리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백종에 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문) 백종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어떤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지요. 답) 옛날에는 자손들을 육 형제나 오 형제나 이렇게 많이들 낳아도 낳는 대로 저거 했지 어린애를 지우거나 이런 법이 없었거든요. 어느 사람이 칠 남매를 두었는데 그 칠 남매를 두고 농사를 지어서 가르치고 뭐 하고 하려면은 얼마나 그게 참 피땀이 나왔겠습니까. 그래서 부모들이 위로는 좀 가르치고 그러다가 밑으로 막내를 가르치질 못했어요. 인제는 쇠약하고 저거
우리가 수행을 하려면 가는 것 잡지 않고 오는 것 막지 않고 무조건, 부처가 온다 하더라도 꿀떡 삼킬 수 있고 마구니가 온다 하더라도 꿀떡 삼킬 수 있어야만 됩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천도를 스님네들한테 청하되 무엇을 많이 차려놓는 걸 바라지 마십시오. 찹쌀가루를 해서 재사 지낼 때 뚱그렇게 그냥 부쳐서 아홉 조각 아니면 일곱 조각, 일곱 조각 아니면 세 조각 이렇게 해서 놓고, 초 향 물 이렇게 해놓고 지내신다면 그것으로써 족합니다. 환란이 없어져요. 왜냐하면은 나물 먹고 떡 먹고, 뭐 이거 먹고 저거 먹고 이렇게 하는 의식들은 벌써 그건 아주 하의 중생들의 얘깁니다. 여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조상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냥 떡, 밥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듭니까? 그 의식
물질을 갖다 아무리 산더미같이 쌓아놓는다 하더라도 마음이 넉넉지 못하고 공한 도리를 모른다면 아예 불도 밝게 일어날 수도 없거니와 조상들도 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칠석(七夕)하고 백종(百種)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면서 칠석을 지내셨는지 궁금하군요. 칠석은 산 사람들을 위해서 지낸다고 합니다. 또 백종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지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산 사람, 죽은 사람 이렇게 나누는 게 아닙니다. 칠석이다 하면 칠(七)은 우리 몸 자체와 마음 자체를 말하고, 석(夕)은 그 마음이 깊은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밝힌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내가 형성된 날이나 죽는 날이라고 해도 되고, 아침 저녁이라고 해도 됩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불을 켤
평상시에 모든 걸 놓고 편안하게, 와선이나 입선이나 행선이나 좌선이나 이런 거를 모두 한데 합쳐서 그냥 생활 자체를 참선으로 돌려야 됩니다. 그렇게 내마음의 용광로에다 다 놓게 되면 자동적으로 재생이 돼서 나갈 텐데 뭐가 걱정입니까. 길 아닌 길을 걸어가려면 문) 이 마음공부를 알고부터 모든 것을 주인공에 놓고 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편안하고 걱정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길 아닌 길을 걸어 보려면 어떻게 마음을 내야 되는지요. 답) 여러분 모두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벌써 원소를, 자기가 생명력을 가지고 나옵니다. 생명력을 가지고 거기 들어가서 모습을 받는단 얘기죠. 그런데 자기 원소가 그렇게 고생을 하고 수억겁을 거치면서 그렇게 진화하고 형성
관법이 별나게 다른 게 아닙니다. 수박을 갖다 놓고 ‘이게 뭣고?’ 하고 매사 걸 ‘뭣고’로 돌아가기보다는 두려움 없이 그냥 짜개서 드세요. 그러면 수박 맛이 어떠한가 알게 되고 또 수박 속에 씨가 있다는 것도 알게 돼서 세세생생 먹일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3(남): 연일 계속되는 장마에도 하필이면 오늘 따라 이렇게 날씨가 쾌청하고, 또 제가 큰스님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있으니까 벌써 준비했던 질문이 거의 반쯤은 풀린 듯도 합니다. 질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삼법인(三法印)중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제법에는 이름하여 붙일 것이 없다.’ 하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법에 이름이 없다면 오늘 수행은 누가 하는
더운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매우 감사히 생각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차원의 그릇에 따라서 모두 끼리끼리 모이게끔 돼 있는 것입니다. 멀어도 멀다 안 하시고 이렇게 왕림해서 한마음이 돼 주시는 것에 재차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마음을 생각할 때에 ‘마음이 참 요상한 놈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주 요상한 놈이라고 말입니다. 마음이 요상한 게 아니라 마음내는 게 요상하겠죠. 우리가 항상 몸을 중심으로 해서,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뜻대로 육근(六根)이라고 하고 육경(六境)이라고 하고 육식(六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가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의식이 색에 들고, 색은 의식에 포함돼서 항상 밝게, 어떠한 생각이든지 하게 하고 어떠한 거든지 보게 하
마음공부를 꼭 해야 하는 것인지요 문) 부처님 가르침은 너무나 방대해서 쉽게 공부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마음공부를 꼭 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답) 부처님께서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해서 가르치신 뜻은 너무나 크고 묘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적인 문제보다도, 근본적으로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자체에 세계적으로 퍼지고 퍼져서, 또 줄어들고 줄어들면서 또 퍼지고 하는 이 이치, 생했다 멸했다 생했다 멸했다 하는 반복되는 이 진리지만 이 속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그런, 여러분이 겪어 보지 않고 실감해 보지 않은 뜻이 있으며, 너무나 많은 법과 더불어 무서운 도리라고 생각됩니다. 만약에 알면은 너무나 좋고 자비하고 묘하고 광대무변하고 홀로이 우뚝 선 이 뜻이지마는 모른다 하면은 너무나
모든 거 하나하나 전부 나 아님 없고 내 스승 아님이 없습니다. 어느 것 하나 가르치지 않는 것이 없거든요. 그런데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좋게 생각을 해서 배워야 합니다. 나쁜 건 하지 말고 좋은 건 하고 내가 조금 밑지더라도 남을 이익하게 하면서 폭넓게 마음을 쓴다면 그대로 선지식이요, 부처가 될 거 아니겠습니까. (지난 호에 이어서) 우리 지금 생각을 가만히 해 보세요.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기막힌지요. 여러분이 일주일 내내 일하다가 토요일이 되고 일요일이 되면, ‘아, 일요일이 됐으니까 좀 늦게까지 자도 괜찮다.' 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그냥 푹 자 버려요. 요렇게 마음이 용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내 마음먹는 데 따라서 모두 활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모든 걸 천치 바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