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벗어 손에 쥐었다가, 눈을 하늘에 두었다가, 땅을 내려다 보고 마침내 좌우를 살피며 몇 분쯤 병원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이런 나를 쳐다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나는 얼굴을 한 번 쓸고는 큰 걸음으로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구미의 한 산부인과 안으로 들어서자 한 손은 부른 배에 얹고 한 손은 허리에 댄 산모들이 눈에 들어왔다. 음, 음, 당장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 헛기침이 나왔다. TV 다큐에서나 보았던 산부인과 모습이다. 마침 한 남자가 만삭의 아내를 부축하며 접수계로 다가서다 나와 딱, 눈이 마주쳤다. 눈빛에서 스님이 무슨 일로 산부인과에? 하는 의구심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대둔사 주지 진오라고 합니다. 원장 선생님을 뵐 수 있을까요?” 진료실 앞에서 차례를
한 생명에게서 듣는 ‘아빠’라는 그 가슴 벅찬 말. 이 귀중한 말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속의 아빠들이 힘을 내어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좋은 아빠가 되는 일이 참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그런 아빠들에게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둔사에도 봄이 찾아왔다. 봄은 숨찬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햇살을 만끽하기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이 나른한 평화를 누리는 것도 잠깐 일어나라, 일어나기 싫다. 학교 가자, 학교 가기 싫다 하는 입씨름 소리가 내 귓가로 들려왔다. “이눔 자식들, 어여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 안 해!” 한마디를 툭 던지자 부스스 까치 같은 머리 꼴을 하고 마지못해 일어나는 세 명의 남자 아이들, 아침부터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남자 아이들 셋이 모여 있다 보니 두 곱절의 힘
업(業)이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우리의 생활 수단인 직업(職業)을 보면 업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 알 수 있다. 사람은 대부분 살아가는 수단으로 직업을 선택한다. 백짓장 같은 마음이 직업을 가지면서 서서히 그 업에 빠져들어 간다. 그래서 군인은 군인 같고, 공무원은 공무원 같고, 우리 같은 스님들은 스님 같아진다. 우리가 무슨 직업을 가지던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본마음이다. 다시 태어나도 그 직업을 가질 것이 아닌데도 그 직업 때문에 마음이 변하는 경우가 많다. 지구상에는 수만 종의 직업이 있다. 우리는 편의에 따라 그 중 하나를 선택해 가족의 생계를 맡기고, 자신의 발전을 도모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요 통과의례다. 특히 자신들의 직업을 스스로 천시하지 말고 본
제목이 잘못 나온 지 알 수도 있겠다. 스님은 절을 짓고, 목사는 교회를 짓고, 무당은 굿당을 지어야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사가 지어야 할 교회를 스님이 짓다니. 어떤 일일까. 5사단 군종참모로 있을 때의 일이다. 부임해 종교 시설을 살펴보니 벽돌이 2m 쯤 올라가다 만 건물 한 채가 눈에 띄었다. 무슨 건물인가 싶어 알아보니 교회를 짓기 시작하다가 예산이 모자라 짓지 못하고 6개월째 방치돼 있다는 것이었다. 원래 군대 내 사찰이나 교회 등 종교시설은 군 예산으로 짓기가 매우 어렵다. 토지야 군대 땅을 쓸 수 있지만 일일이 부대마다 종교시설을 짓다보면 엄청난 예산이 들어 하는 수 없이 민간지원을 받는 것이다. 이 교회 역시 원래 민간의 한 교회가 지원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교회가 지원을
군승으로 임관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월남전에 참전한 나는 직접 총을 쏠 일은 없었지만 전투부대에서 병사들과 동거동락을 함께 했다. 틈나는 대로 각 부대를 찾아다니며 전투로 지친 장병들에게 설법을 하기도 했고, 불가피한 살생이 아니면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워낙 전투가 치열했기에 불법을 전하는 시간보다 죽거나 다친 장병들을 천도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던 중 월남에서 한 스님을 따라 월남 한 사찰을 방문했다. 그러던 중 사단이 발생했다. 느닷없이 군복입은 사나이가 나를 향해 총을 내밀었다. 베트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비록 스님 신분이었지만 전투복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누가봐도 나는 그들의 적이었다. 더구나 겉으로 봐서는 장교 차림이었다. 베트콩들이 들이닥치자 순
“환영! 한국 군승단장 일행! 400년 만에 방문한 승장들을 환영합니다!” 일본 나리타 공항에 대형 현수막이 나부꼈다. 군승단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일본 진토진종의 초청으로 일본에 방문했을 때다. 당시 군승으로는 사명대사 이후 400년 만에 군승 대표들이 일본을 방문한 것이었다. 군승단이 공항에 도착하자 일본 불자들은 열렬한 환영을 보냈다. 공항에 마중나온 일본 사람들은 우리를 가리켜 승장이라 하였다. 우리들을 사명대사와 같은 반열에 올려준 것이다. 나는 마치 사명대사가 왕사 자격으로 일본에 들어갔을 때처럼 무슨 담판을 지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왜란 이후 죽음을 무릅쓰고 적지인 일본에 들어가 포로송환 교섭을 하고, 일본 문사와 무사들에게 한껏 조선인의 기개를 드날린 사명 대
대한민국 국군에 군목(軍牧)과 군 신부는 있어도 군승(軍僧)은 없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군포교의 암흑기라 부를 수 있는 1968년까지다. 이 당시 대한민국 국군에는 군승이 파송되지 않았다. 불교가 우리나라 최대 종교임을 감안할 때 이는 누가보아도 불평등한 일이었다.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며 구호품을 교회를 통해 배급했다. 해방 후 민간구호품은 미국 교회를 중심으로 모은 것들이었으며, 이 구호품을 한국 교회를 중심으로 분배하는 것은 이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난이 핑계였던가? 당시 구호품을 받기 위해 불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불자들도 적지 않았다. 스님으로서 그런 상황을 보는 것은 정말 가슴이 아팠다. 우리 불교가 그만큼 그 기능을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군 요
한번은 공군의 후배 법사님이 찾아와 ‘학생군사학교’ 법사님이냐고 물으며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다른 법사님에게 감사인사를 받으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의아하더군요. 그 법사님에게 들으니 치통이 있어 병원에 가니 군의관이 일어나더니 스님이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하니, 합장을 하며 ‘성불하십시오’ 하더랍니다. 의무대에서 군의관이 합장하며 인사를 하니 왠지 뿌듯하더랍니다. 그래서 스님에게 인사하는 것을 어디서 배웠냐고 했더니 학생군사학교 법사님이 그랬다고 하여 저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 군의관은 불자로서 항상 신심을 가지고 장병 진료에 앞장서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불자를 양성하는 곳은 누가봐도 군대입니다. 짧게는 5주에서 16주 가량 훈련을 받으며 매주 법회에 참석하면 저절로 불
경기도 가평의 어느 부대에 근무하던 때의 일입니다. 신병교육대에서 법회를 마치고 간식을 나눠주는데 한 훈련병이 찾아와서 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스님,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법회에 왔습니다. 그런데, 삼귀의를 하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군생활을 하면서 삼귀의를 하는데 눈물이 난다고 하는 사람을 처음만났기에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삼귀의를 하는데 눈물이 난다. 예전에 미국에서 온 현각 스님을 만났을 때 들은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불자들이 애국가를 들으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삼귀의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니… 전생에 스님이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 친구가 하는 다음 말이 저의 머리를 아프게 했습니다. “스님, 그러
강원도 최전방 부대에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신병교육대에서 법회를 하면서 많은 훈련병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도 20대 후반이라 때로는 형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훈련병들의 마음은 모두 같았습니다. 집에 계신 부모님은 잘 계시는지, 여자 친구는 잘 지내는지, 또 자신은 잘 지내는 것을 알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훈련병들의 소식을 잘 지내고 있다고 개별적으로 문자로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아가씨의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 배석호 훈련병 여자 친구인데요, 석호 잘 있나요?”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서 훈련병의 안부를 묻는 전화라니, 무척 난감했습니다. 여러 명의 안부를 전해주었기에 잘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다만 이 아가씨의 남자친구이
간부를 양성하는 부대(학교기관)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부대에 처음 온 후보생들에게 종교 소개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러 종교의 군종장교들이 각자의 종교를 소개했습니다. 목사님이 기독교를 소개하고 신부님이 천주교를 소개했는데 서로 자기 종교의 특징과 믿을 만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어 입대하기 전에 교회나 성당을 다녀본 이들을 손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손을 든 이들이 참 많았습니다. 신부님과 목사님은 군대에서도 바깥의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불교를 소개하는 차례가 오자 저는 거두절미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독교나 천주교는 입대 전 정기적으로 종교활동을 해 온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소개를 하면 있는 불자들도 무언가 자기
군법사들은 1년에 세 번씩 전체가 모일 일이 있습니다. 그 때 포살도 하고 교구의 주요안건을 다루거나 어떻게 포교하고 있는지, 수행하고 있는지 의견을 나누기도 합니다. 한번은 공군에 계신 후배법사님이 나를 찾아와 ‘학생군사학교’ 법사님이냐고 물으면서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신자들에게 감사인사를 받는 일은 많지만 육군 법사가 공군 법사에게 감사인사를 받을 일은 많지 않습니다. 감사인사를 받고 나니 기분은 좋아지더군요. 내용인즉, 공군 법사님이 치통이 있어 부대병원에 갔더랍니다. 법사도 중생이라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병원 가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의무대 치과엘 들어갔는데 군의관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스님이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군의관이 앞으로 나와 합
올해로 통도사 강원에서 생활하다 입대한지 16년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는 배고픈 곳입니다. 특히 한창 나이인 장병들이 느끼는 배고픔은 더합니다. 군법사로 살다보면 종종 부대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할 일이 생깁니다. 한번은 전방의 대대를 방문했는데 대대장께서 병사들과 동석 식사를 하며 격려해주면 좋겠다고 의견을 주었습니다. 저야 당연히 흔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점심 메뉴가 ‘돈가스’였던 것입니다. 배식대에 긴 줄이 서있는 가운데 대대장과 제가 배식을 받는 차례가 왔습니다. 대대장은 눈치도 없이 자신의 분량을 떠서 먼저 자리로 갔습니다. 육식을 좋아하지 않던 저는 데 뒤에 있는 병사에게 제 몫까지 먹으라고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 병사는 돈가스 두 개를 자신의 식판 위에 올렸습니다.
간부를 양성하는 부대의 법사로 있으면 적게는 100명, 많게는 1000명 이상의 교육생들이 법회에 참석하기 때문에 일일이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독특한 인연이 생기면 아무래도 기억하게 되지요. 한번은 법당에 나온 지 6주 정도 지난 청년 불자가 심각한 얼굴로 법회 후 저를 찾아왔습니다. “법사님, 법사님은 스님이십니까?” 무슨 날벼락 같은 질문일까요? 사실 그 청년 불자는 군대에 오기 전에 한 번도 절에 가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저 절이라면 어머니가 가족을 대표해서 다니는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입대를 할 때가 되니 어머니께서 군에 가면 꼭 절에 가서 스님 말씀 잘 들으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습니다. 마침 부대에 절이 있어서 매주 참석을 했는데 법회에 참석하는 것이 일주일간의 가장
군대에서는 요즘 혹한기 훈련이 한창이다. 대게 12월부터 2월까지 각 부대에서는 혹한기 훈련을 한다. 필자는 사단 예하 연대나 직할대가 훈련을 할 때마다 출정기도나 야전종교의식 및 위문활동을 하곤 한다. 혹한기 훈련은 전시를 가정한 훈련이기 때문에 항상 무사히 훈련을 마치기 위한 기도와 더불어 적을 이길 수 있다는 용기와 전쟁의 공포심 극복을 위한 부처님 말씀을 들려준다. 오늘은 군에서 실시하는 훈련 시 장병들에게 하는 법문을 요약해서 실어본다. 부처님께서는 반야심경에서 공포와 몽상을 여의라는 내용이 정확하게 제시하고 계시다. ‘고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故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바로 이 구절이다. “마음에 어떤 두려움과 의심된 마음도 없이 거꾸로 된 꿈같은 허망함을 멀리한 까닭에 마침내
대부분 남자들 사이에는 아직도 ‘군대’ 하면 대화와 소통으로 풀어가는 조직이 아닌 “하면 된다”, “하라면 해” 식의, 의견 수렴이 안 되는 대표적인 조직으로 이야기 하곤 한다. 그러나 군도 많이 바뀌었다. 많은 사람들이 군이라는 조직이 얼마나 인재의 선발과 양성에 치밀하고, 또 그 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또한 군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조직답게 이곳에 살고 있는 병사들의 능력과 재능들이 각양각색, 무한한 곳이다. 어느 일요일, 법회를 마치고 간식을 먹고 난 뒤 법당을 나서지 않고 피아노를 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다가갔다. 제법 실력이 좋았다. 그 병사와 음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을 때 한 병사가 다가와 피아노를 쳐도 되겠냐며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들리는 피아노 선
어느 날 신병교육대대 법회에서 병사들과 재미있는 대화로 인해 한바탕 웃은 일이 있었다. 이날 유독 머리가 돋보이는 훈련병 하나가 눈에 띄었다. 머리카락을 남기지 않고 스님들처럼 완전히 삭발한 상태였다. 보통 훈련병들이 머리가 짧은 것은 당연하지만 워낙 삭발을 한 탓에 유독 튀어보였다. 법회 후 간식 시간에 그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내가 머리에 대해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 친구들이 키득거리며 이야기를 했다. “법사님, 수계법회 때 이 친구는 법명을 ‘민모’로 지어 주셔야합니다.” “무슨 말이니?” “보시다시피, 머리카락이 없지 않습니까? 털이 없으니 민모 아닙니까. 게다가 이름도 민모입니다.” “아 그렇구나. 본명도 민모구나. 하하하!” 이름도 ‘민모’이고, 또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머리카
2012년 말 TV에서는 초코파이 광고가 흘러나왔다. 교회에 간 군장병이 줄을 서서 초코파이를 받는 장면이었다. 초코파이를 나눠받은 그 병사가 목사에게 고백한다. ‘저 사실 불교에요...’ 얼마나 장병들이 간식을 좋아하면 간식에 따라 종교를 선택하는 모습까지 TV에 나올까. 교회에서 초코파이를 받은 장병들은 광고 후반에 ‘성당은 두 개를 준데...’라며 좌절하는 유머러스한 장면을 연출하기까지 한다. 사실 바깥 군것질 거리를 접하기 힘든 훈련병들에게 종교행사 이후 맛볼 수 있는 간식은 생각보다 더 큰 관심사다. 다소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초코파이 광고처럼 간식에 따라 군대 내에서 종교를 선택하는 장병들이 다수 있다.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군대의 훈련 속에서 몸과 마음이 지친 장병들을 위로하는 거의 유일한
군에 있으니 인연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많아진다. 특히 신병교육대대가 있는 부대 법당에서는 매 기수 새로운 친구들과의 만남이기 때문에 인연의 흐름이 잠시도 쉬지 않고 지속된다. 매주 새로운 스물 한 두 살의 꽃다운 청년들과 새로운 인연은 시작된다. 지난해 한 훈련병의 이야기를 접하고 몹시 가슴 저린 기억이 난다. 이 친구는 입대 전 오랜 기간 사귀었던 애인이 사망한 슬픈 일을 겪었고 그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훈련소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항상 의욕이 없고, 훈련 열외 등을 반복하는 실정이었다. 부대 관계자에게 이 병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상담을 자청하였다. 이 병사에게 삼장법사로 친숙한 현장스님과 고창국의 왕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동남쪽에
필자는 남과는 다른 조금 특이한 이력 하나가 있다. 공군 군종법사를 복무한 뒤 다시 육군 군종법사로 입대한 것이다. 오늘은 공군 시절의 포교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한다. 공군에 관한 선입견 하나는 공군이 비행기만 타는 줄 안다는 것이다. 사실 전투기를 타고 적군을 제압하는 임무 못지않게 중요한 임무가 바로 적기(敵機)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지상무기 운용이다. 이른바 ‘방공포’ 운용으로 방공포병여단은 다양한 방공무기들을 운용해 대한민국의 후방 영공을 방어하고 있다. 2008년 대구의 제1방공포병여단 감천사에 근무할 때다. 처음으로 군종법사로 부임한 곳이기에 모든 일에 의욕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먼저 병사들과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았기에 병사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딱딱한